“오늘 볼 연극 제목이 뭐랬지?”
“반도체소녀!”
그럼 좀 심각한 내용이겠네. 저는 반도체소녀라는 말을 듣고 김옥빈이 나오는 이재용 감독의 옛날 영화 ‘다세포소녀’를 떠올렸다가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그래, 가끔은 심각하고 진지한 연극도 한 편 봐줘야지. 게다가 이 연극은 아내와 같이 ‘여자연구소’ 라는 모임의 멤버로 활동 중인 연극배우 이승연 씨가 출연하는 덕분에 가게 된 거니까.
지금 대학로 ‘아름다운극장’에서 문화창작집단 날이 상연하고 있는 연극 [반도체소녀]는 짐작대로 영화 <또 하나의 약속>처럼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가 사망한 노동자 이야기입니다. 소재 자체가
슬프고 심각한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한 시간 반 가량 되는 상연시간 내내 심각하기만 하면 관객들 몸이 뒤틀려서 끝까지 보기 힘들겠지요. 그래서 여기에도 재미있는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일인다역’ 역을 맡은 배우 오주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연극 도중 부당해고 된 재능교육 선생님들의 복직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는 인물 혜영 옆에 가 느닷없이 작업을 거는 연극배우 오주환은 자기가 가난한 연극배우임을 밝히며 이번에 들어간 연극 [반도체소녀]에서는 자그마치 ‘1인 14역’을 맡았다며 한탄을 하기도 합니다. 그 후에 그는 정말 신문기자, 인사담당자, 취객, 경찰, 퀵서비스 직원 등등 벼라별 변신을 거듭하며 관객들에게 깨알 웃음을 선사합니다. 어제는 판사로 분한 장면에서 맨 앞줄에 앉아 보던 저에게 와 망치를 선물하고 갔습니다
연극은 호스피스로 일하며 ‘반도체소녀’와 인연을 맺은 간호사 정민과 그녀의 남동생 세운, 정민의 남자친구 동용, 그리고 세운의 여자친구 혜영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호스피스인 정민은 임신 3개월 상태인데 얼마 전에 정을 붙였다가 죽어버린 환자 ‘반도체소녀’가 늘 눈에 밟히고 삼성전자 서비스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남자친구 동용의 건강도 늘 걱정입니다. 삼성에 입사하는 꿈을 꾸며 공부를 하고 있는 동생 세운은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언급하며 자신의 ‘스펙쌓기’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이상주의자 노교수가 못마땅하고 그런 자신을 이해하고 독려하기는커녕 사사건건 비난하며 ‘쓸데 없이’ 재능교육 1인시위나 하고 있는 여자친구 혜영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이래저래 모두들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힘든 피곤한 인생들이죠.
연극은 그러나 섣불리 그들의 처지를 도약시켜 해피엔딩으로 이끌거나 하지 않습니다. 반도체소녀는 죽은 뒤에도 이승을 뜨지 못해 정민 곁을 맴돌고 세운은 입사시험에서 낙방을 하고 맙니다. 설상가상 몇 개월 뒤 정민과 결혼식을 올리려던 동용은 갑자기 심장이 멈춰 죽어버리구요. 교수님이나 혜영에게도 뭐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없습니다. 아마 이 연극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직시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지금 2014년의 현실을, 그리고 우리 같은 사회 구성원들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한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게 없는 2015년, 2016년의 대한민국을 보다 입체적으로 보라고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을 좀 찾아보니 이 연극에서 교수 역을 맡은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는 실제로 ‘우리나라 강단의 마지막 맑시스트’로 유명한 분이더군요. 아무래도 현직 연기자가 아니라 연기는 좀 부자연스러웠지만 그 진정성을 생각하면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는 분이었습니다. 일부 수구언론에서 이 작품에 ‘빨갱이 연극’이라는 낙인을 찍었다고 하던데, 아마 이 분의 출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면 이 연극이 빨갱이 연극은 아닙니다.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 얘기하면 무조건 다 빨갱이 콘텐츠입니까. 그리고 요즘 세상에 빨갱이 연극이면 또 어떻습니까. 하긴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백]도 ‘빨치산 소설’이라고 쓰는 기레기들한테는 뭐든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연극을 볼 때면 늘 신기합니다. 특히 어제처럼 소극장 연극인 경우 바로 눈 앞에서 자잘한 소도구들만으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게 그렇습니다. 바로 제 발 앞에 놓인 기다란 직사각형의 아크릴 박스와 약간의 물, 그리고 모래만 가지고도 금방 바닷가가 되는 마술이 벌어지니까요. 불이 꺼지고 깜깜했다가 다시 들어오면 어둠 속에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있거나 서 있는 배우들도 신기하구요. 배우들과 관객이 서로 짜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공법의식이 생겨 늘 즐겁습니다. 그리고 이런 ‘쓸데 없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착하게 느껴져 고마운 생각도 들고요.
대학로 좋은 배우들의 고른 열연이 빛나는 연극이었습니다. 일단 11월 30일까지 상연한답니다. 시간 내셔서 한 번 관람하시기 바랍니다. 어제 제 아내는 이 연극을 보며 참 많이 울었습니다. 함께 연극을 보고 저희에게 맛있는 청국장 등을 선물해 주신 전미옥 대표님도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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