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2주년, 그래서 우리는 제주로 갔다>
아내와 만나기 시작한 날이 5월 23일, 내 생일이 5월 24일, 그리고 결혼기념일이 5월 25일. 우리는 이 정도면 ‘기념일 폭풍주간’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겠냐는 데 서로 동의했다. 그래서 아내는 작년 12월에 소위 ‘취소가 불가능한’제주도행 평일 항공편 티켓을 싼값에 끊은 것이리라. 일 년 삼백육십오 일 늘 바쁜척하며 사는 내게 아예 쐐기를 박은 것이다. 물론 나도 회사에 미리 사정 얘기를 했다. 평소에 더 열심히 일 할 테니 해마다 5월말 휴가만큼은 좀 보장을 해다오. 그러나 시집 가는 날 등창 난다고 휴가를 하루 앞둔 날이 하필 경쟁PT 준비로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이었다. 결국 휴가 전날 새벽 한시가 넘어야서 회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제주로 가는 비행기 시간이 낮 2시 45분이니 좀 천천히 일어나도 되겠지 생각했지만 막상 일어나 짐 챙기고 밥 먹고 씼고 공항까지 가서 발권하고 검색대 통과하고 하는 시간을 생각하니 도저히 느긋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멀미를 심하게 하는 나는 비행기 시간에 맞춰 멀미약까지 챙겨 먹어야 했다.
1일차
오후 늦게 제주공항에 도착해 버스를 탄 우리는 협재 근처 한림 금능리 ‘추의작은집’이라는 게스트하우스에 가서 체크인을 했다. 추소명 씨라는 젊은 여주인이 운영하는 이 곳은 안채와 바깥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바깥채가 다이닝룸으로 꾸며져 따로 식사나 차를 즐기기 좋았다. 우리가 들어올 때는 주인장이 없어 전화로만 얘기를 했는데 샤워를 하고 나와보니 밖에 키가 큰, 머리를 질끈 동여맨 젊은 여자가 얼핏 보이는 것이었다. 옥상으로 올라간 나는 텃밭에서 뭔가 하고 있는 여자분에게 주인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렇다고 하면서 아래층에도 남자분이 하나 계시던데요, 라고 한다. 그 남자가 바로 접니다, 방금 옥상으로 올라왔어요, 라고 대답하니 그녀가 웃는다. 나는 휴대폰 카메라를 들고 별 의미 없는 하늘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다시 일층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짐을 부려놓고 아내의 페이스북 친구인 윤수훈 씨에게 연락을 했다. 윤수훈 씨는 뉴질랜드에서 살다가 제주도로 와서 혼자 ‘연미당’이라는 떡볶이집을 하고 있는 솔직담백하고 멋진 여자였다. ‘추의작은집’에서 걸어가면 금방인 연미당에 도착한 우리는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다. 마침 수훈 씨 여자 후배 하나 씨도 같이 있길래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수훈 씨가 안내한 곳은 한림읍에 있는 ‘칠돈가’라는 곳이었다. 제주흑돈을 두껍게 썰어 연탄불에 올려 구워주는 집인데 고기 맛이 아주 좋았다. 그들은 제주도에 와서 돈을 더 내고 구태여 프리미엄 돼지고기를 먹을 필요가 없다고 귀뜸한다. 제주도에서 파는 돼지고기는 하나같이 품질이 좋기 때문이란다. 손님이 고기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될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서 구워주는 시스템이므로 우리가 할 일은 잘 익은 돼지고기를 골라 자신의 접시에 갖다놓고 그때마다 술잔을 들어 입으로 털어넣는 것뿐이었다. 수훈 씨가 뉴질랜드를 마다하고 제주도에 와서 장사를 하게 된 이야기, 서울에 사는 오랜된 남자친구와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는 하나 씨의 이야기, 우리가 5월에 제주여행을 하게 된 이야기 등등 일차에서 이런저런 정보들을 주고받으며 즐거워 하던 우리는 여세를 몰아 이차로 숙소의 다이닝룸에 와서 와인을 더 마셨다. 수훈 씨가 소주를 못 마시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술이 올랐다. 아내는 이제 그만 들어가 자자고 했고 나머지 술꾼들은 편의점에 가서 한 잔 더 하자고 했다. 결국 아내를 뺀 세 명만 편의점으로 가 싸구려 와인 한 병을 더 사서 플라스틱컵에 따라 마셨고 숙소로 들어간 아내는 ‘남편은 젊은 여자들과 술 마시러 가고 늙은 나는 잔다’라는 글을 남겼다.
2일차
아침에 둘 다 일찍 깼다. 매일 아침 일곱시 경이면 아침밥을 차려먹는 습성 때문이었다. 배가 고프지만 아침식사는 아홉 시부터라고 한다. 둘 다 하기가 져서 어쩔 줄을 모른다. 마루에 나가서 테이블에 쌓여 있던 책 중 [안도현의 발견]을 집어들었다. 안도현 시인이 한겨레에 연재하던 원고지 3.7매의 글들을 모은 책이다. 나도 한겨레를 보던 시절 즐겨 읽던 쪽칼럼이다. 책표지 안쪽에는 ‘추소명 씨에게 드립니다’라는 안도현의 친필싸인이 있었다. 책을 뒤적이다가 눈에 익은 시를 발견했다. 이제하 시인이 고등학교 때 써서 학원문학상 장원으로 뽑힌 '청솔 그늘에 앉아'라는 시다. 워낙 유명한 시였고 우리 집에 있는 [시의 고향]이라는 책에서도 읽은 적이 있는 작품이라 더 반가웠다. 천재의 작품이다. 도대체 고등학교 때 처음 쓴 시가 교과서에 실리다니, 뭐 이런 기분나쁜 천재가 다 있단 말인가.
아침에 추의작은집에서 차려준 샌드위치와 요구르트, 커피 등으로 허기를 채우고 오전 내내 금능리 해변을 어슬렁거리다 최상식 씨를 만났다. 상식 씨는 제주도에서 캠핑관련 사업을 하고 있는 친구인데 이번 제주 여행에서도 우리에게 길안내와 캠핑을 도와주기로 했다. 상식 씨의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공항에서 아내의 친구 부부인 윤주 씨와 상완 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본격 투어의 시작이다.
아내가 제일 먼저 정한 곳은 국제학교 근처에 있는 이태리식당 ‘포르체타’였다. 여기 주방장이자 주인장인 김효중 씨는 서울에서도 요리를 꽤 잘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삼 년 전 제주도로 내려와 이태리식당을 여는 모험을 감행했다고 한다. 제주도 현지 음식을 사용하는 것으로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는 이 식당에서 리조또와 피자, 파스타 등을 주문했는데 모두 수준급 이상이었다. 특히 리조또의 맛에 아내는 혀를 내둘렀다. 보통 리조또를 시키면 너무 달거나 반죽이 질척질척하게 나오기 쉬운데 포르체타는 밥알이 고슬고슬하고 양념도 과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맛있었다. 요리를 들고 나온 주인장께 물어보니 드물게 제주에서 생산되는 쌀이 있는데 그걸 쓴다고 했다. 제주에 오면 돼지고기, 갈치, 생선회를 무시할 수가 없는데 그걸 피하고 이태리 음식을 하려다 보니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그가 택한 길은 자신의 메뉴를 고집하되 약간 싸게, 그리고 양도 약간 많이 내는 것이었다. 음식을 다 내고도 주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식탁 옆 벽난로에 한쪽 팔을 올리고 계속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가는 김효중 씨를 보니 사람 좋아하고 이야기하는 거 좋아하고 요리 좋아하는 그의 인품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아무튼 제주에 와서 뻔한 음식 대신 고급한 식사를 한 끼니 하고 싶다면 주저 않고 추천할 만한 식당이다.
점심을 먹고 영아리오름에 올랐다. 오를 땐 약간 숨이 찼지만 올라가 보니 바람이 엄청 시원하게 불었고 전망도 기가 막혔다. 와인 한 병을 들고 가 바람을 맞으며 마시면 정말 천국일 듯했다. 이타미 준 건축가의 바람미술관, 물미술관, 돌미술관, 두손미술관 등이 있는 ‘비오토피아’도 방문했다. 이 곳은 연예인이나 성공한 사업가들이 별장처럼 쓰는 회원제 타운하우스라 입장부터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비오토피아 레스토랑을 예약한 후 여기서 커피를 한잔씩 마시고 구경을 해야했다. 현대예술은 뭐든 컨셉이 중요하다. 이곳 역시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물론 건축물을 자연과 결합시킨 머리 좋은 건축물들이 그 가치를 드높이는 것 같았다. 근처에 있는 방주교회도 가서 잠깐 구경한 후 월드컵경기장 근처에 있는 ‘수모루국수’에 갔는데 여기가 완전 대박이다. 좁은 가게에서 직접 뽑아 내는 국수도 흘륭하지만 수육은 정말 최고였다. 자신있게 강추한다. 서귀포 올래시장에서 회를 조금 사고 이마트에서 와인을 산 후 하도리 해변으로 이동 후 해변에서 캠핑을 했다.
3일차
아침에 일어났더니 온몸이 쑤신다. 좀은 텐트 안에서 낡은 슬리핑백을 깔고 덮고 자서 그렇기도 하지만 바닥이 좀 고르지 못해 더 잠을 설쳤던 것 같다. 상식 씨가 준비해준 커피와 빵을 먹으며 해변의 정취를 천천히 즐긴 우리는 아침 식사를 위해 이동했다. 그러나 너무 형편없는(?) 식당이라 언급하지 않겠다. 식재료 좋기로 이름난 제주에서 아침부터 고춧가루 듬뿍 들어간 조림을 먹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된다. 물론 그동안 여러 고객에게서 괜찮은 평가를 받은 식당이었겠지만 아침 메뉴를 옥돔조림(분명 중국산 냉동옥돔였을 것이다)으로 선택한 것은 분명 우리의 실수였다.
식사 후 재작년도 갔던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에 다시 갔다. 마침 그날이 김영갑 선생이 돌아가신 지 10주년 되는 날이었다. 김영갑은 제주의 산천에 반한 후 오직 제주의 오름 사진을 찍기 위해 부모형제도 애인도 모두 버리고 제주로 이주한 기인이다. 그리고 필름을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돈을 모으는 일 말고는 아무 것에도 눈을 돌리지 않고 오직 사진을 찍는 일에만 구도자처럼 매달린 예술인이었다. 루게릭병에 걸려 죽기 전까지 이 갤러리를 만들기 위해 그가 기울인 노력을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평범한 사람이 뭔가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얼마나 자신에게 엄격해지고 고독해져야하는지 알려주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주는 결혼 기념일 선물로 김영갑 선생의 작품이 담긴 액자를 하나 샀다. 물결치는 억새밭을 찍은 사진이다. 3만 원밖에 안 하는 저렴한 사진액자다. 그러나 앞으로도 결혼기념일 선물은 이런 식으로 서로에게 뜻깊은 것을 주는 것을 구입하기로 했다.
아침이 좀 무거웠던지 아무도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해서 점심은 ‘자연속으로’라는 카페 겸 식당으로 가서 토마토 비빔국수와 콩국수를 먹었다. 이 집 역시 구태여 찾아가서 먹을 만한 집은 아니었다. 적당히 코스가 그 지역이고 거르기 애매한 점심식사를 해야 한다면 가보길 바란다.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용눈이오름, 숲길이 만들어내는 그늘과 햇빛에 비친 나뭇잎들이 너무나 아름다운 비자림을 거쳐 숙소인 구좌읍 ‘성산가는길’에 갔다. 2년 만에 찾은 성산가는길은 여전히 깨끗하고 정원은 더 아름다워졌다.
저녁은 숙소에서 가까운 세화리의 ‘천하일미’라는 고기집에서 먹었다. 돼지고기 모듬에 오리고기, 전복까지 포함된 세트 메뉴로 고기가 대단히 좋은 집은 아니었으나 그런대로 평균점은 줄 수 있다. 저녁을 마치고 성식 씨와 헤어진 뒤 숙소로 가서 어제 남은 와인과 소주 한 병을 마시며 늘어지게 수다를 끓여부었다. 우리도 닭살 부부지만 윤주 상완 부부도 장난이 아니다. 결혼한 지 이십 년이 된 커플이지만 여전히 이 사람들은 틈만 나면 ‘물고빨고’를 멈추지 않는다.
4일차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늘어지게 자다가 일어나 보니 온세상에 촉촉하게 비가 오고 있었다. 숙소 사장님께서 준비해 주신 반찬과 아내가 타이머를 맞춰놨던 전기밥솥이 지은 새 밥으로 천천히 아침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순한 쌀밥과 배추된장국에 우리를 금방 행복해졌다. 옆방의 부부는 아침도 안 먹고 더 자겠다고 했다고 한다. 아마 ‘아침 물빨’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비가 오는 숙소의 정원은 아름다웠다. 사모님이 월정리까지 태워주시겠다고 해서 염치불구하고 두 부부가 그 차를 타고 바닷가를 달렸다. 자고 일어나면 땅값이 오르고 있다는 제주에서도 요즘 가장 핫한 곳 중 하나가 월정리라고 했다. 우리는 이 년 사이 몰라보게 번화한 월정리 해변을 조금 구경하고 이 동네 기인께서 운영한다는 ‘빌레못카페’에서 차도 한 잔 마셨다. 주인은 서울로 놀러 갔다는데도 3층에 있는 카페 문은 열려 있었고 사모님이 전화를 해보니 그냥 올라와서 차 마시고 놀다 가도 된다고 허락을 했다고 한다. 주인이 수작업으로 제작했다는 음악 CD까지 얻은 뒤 시간이 남은 친구 부부는 그 주변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내기로 했고 우리는 사모님과 작별한 뒤 시외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공항 오는 길엔 제주시내 제일교사거리에서 내려 사거리에 있는 ‘맛짱김밥집’에 들어가 급한대로 김밥을 먹었다. 간판에 ‘1200원 김밥의 위용’이라고 써있었던가. 김밥이 무척 맛있었다. 배가 고파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김밥집인데 의외로 김밥 맛이 아주 좋았다. 내용물보다 밥의 간이 아주 잘 맞아 기분이 좋았다. 심지어 김밥이 한줄에 1200원. 택시기사분 말씀이 ‘찾아와서 먹는 집’이란다. 운이 좋았다.
결론
5월에 두 사람만의 ‘애니버서리 주간’ 휴가를 내기로 한 것은 잘한 결정이었다. 중요한 일은 중요하게 여기고, 행복을 누릴 수 있을 때 그것을 추구하는 것.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내년엔 일본 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다만 이번 여행처럼 여러 곳을 돌아다니지는 얺을 것 같다. 우리 둘은 평상시도 그렇지만 여행지에서는 특히 더 게으른 커플이니까.
(* 이 글은 아내 윤혜자가 공항에서 핸드폰으로 틈틈히 메모한 것을 받아 남편 편성준이 정리한 글입니다. 아래에 저희들이 다녔던 맛집과 숙소 중 추천할 만한 곳을 몇 군데 적어놓았으니 참고하시길)
_추천 맛집 : 월드컵공원 근처 수모루국수 / 한림 칠돈가 / 이태리식당 ‘포르체타’
_추천 명소 ;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 영아리오름 / 비오토피아
_추천숙소 : 성산가는길(제주시 구좌읍 상도리657 010-5549-9908) / 추의작은집(010-8878-5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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