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계속 바빠 아내와 함께 일찍 출근을 하다가 오늘은 좀 여유가 있길래 아내 먼저 출근시킨 후 혼자 침대에 누워 단편소설을 하나 읽고 회사로 갔다(광고 프로덕션 특성 상 일반 직장인보다 출근시간이 좀 늦다).
김연수의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이라는 짧은 단편이다. 전에 분명히 읽었는데 ‘읽었다는 기억’만 나고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런. 전엔 그래도 기억력이 좀 좋았는데 이젠 정말 바보가 되어간다. 2009년 3월, 소설가인 주인공이 세브란스병원 암병동 복도에서 정대원이라는 노인을 만나는 장면을 읽으니 어렴풋이 소설의 도입부를 읽은 기억이 났다. 노인이 쓴 소설 ‘24번 어금니로 남은 사랑’이라는 제목을 읽으니 그가 들려준 어금니의 비밀도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어금니를 뽑고 나와 기념사진을 찍다가 자살을 기도한 이야기. 자신의 이를 뽑아주고 사진을 찍어준 간호사와 몇 달 간 동거를 했던 이야기. 그녀가 어느날 볼펜 한 박스를 사다 주며 그 사연을 소설로 쓰게 했던 이야기. 그가 세브란스에서 작가와의 만남 이후 그 이야기를 빨간색 펜으로 써서 보내왔던 뒤늦은 원고. 그리고 마침내 그해 5월 23일 아침, 정대원이라는 원로 소설가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기사. 동시에 갑작스러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알리는 친구의 전화. 소설가가 찾아갔던 대한문 앞의 조문행렬. 그곳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모습.
검은색 빨간색 파란색 볼펜에 대한 이야기는 김연수가 쓴 다른 책 <소설가의 일>에서 주장하던 그의 창작론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책을 다시 펼치기 전까지는 이 모든 게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던 것은 아마 책을 ‘천천히’ 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어느덧 나는 책을 천천히 읽으며 곱씹는 즐거움을 읽어버리고 살게 된 것이다.
이 작품집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는 좋은 단편들이 많다. 김연수는 자신의 경험이나 실제 있었던 일을 소설에 녹이면서도 핍진성을 잃지 않는 작가다. 첫 번째 실린 소설 ‘벚꽃 새해’에 나오는 영화 <몽중인>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고 이 소설에 나오는 정대원이라는 소설가도 실제로 이름과 작품이 존재한다. 알면 알수록 재밌어지는 이 모든 이야기를 그냥 휘리릭 읽어버리고 곧바로 잊기엔 너무 아깝다.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을 다시 읽음으로써 비로소 김연수의 소설은 나의 것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 좀 천천히 읽자. 김연수처럼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은 못 누리더라도 책 읽는 이들의 한 가지 즐거움, 즉 천천히 음미하면서 내 것으로 만드는 순간의 기쁨은 좀 누리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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