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의7일]을 읽으면서 맨 처음 드는 생각은 '뭐 이런 우수한 소설가가 다 있나' 였다. 개성 강한 캐릭터가 떡하니 받쳐주니 웬만한 일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플롯이 좋으니 극의 흐름에 치우침이 없다. 게다가 적당한 교양과 블랙 유머까지 골고루 갖추고 있다. 이 정도면 정말 장인의 경지 아닌가. 이사카 코타로는 '사신 치바'라는 쿨한 캐릭터를 단편집에서 탄생시킨 뒤 8년 만에 장편으로 그 폭을 넓힘으로써 자신의 소설이 '엔터테인먼트'로서 모자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치바는 정해진 대상을 일주일 동안 관찰한 뒤 그가 죽어 저승으로 가야 하는지 아니면 보류할 것인지 결정하는 사신이다. 즉, 저승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나 보험조사원 같은 신분인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조사 대상 야마노베는 젊어서 데뷰하고 TV에도 자주 출연하는 소설가인데 일 년 전 이웃에 사는 사이코패스에게 딸을 살해당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들 부부를 비웃기라도 하듯 살해용의자는 무혐의로 풀려나게 되고 이에 격분한 야마노베 부부는 개인적인 복수를 결심하게 된다. 당연히 인간에 대해서는 중립적일 수밖에 없는 치바지만 이번엔 그들의 삶에 개입해서 함께 움직이기로 한다. 물론 복수를 도와주거나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치바는 다른 사신들이 이승에 와서 일주일 중 딱 하루만 일하고 나머지 엿새를 빈둥대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축이라 '나라도 일을 열심히 하자'는 취지에서 그러는 것이다.
사신 치바가 일을 하는 동안 그 주변은 늘 비가 온다는 설정이다. 업무를 위해 사람들 앞에서 인간인 척하는 사신들은 사실 아프지도 않고 배가 고프거나 졸립지도 않다. 그런데 자신이 사신이라는 걸 밝히면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이 생기므로 적당히 배고픈 척, 졸린 척을 하는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스멀스멀 재미가 피어난다. 더구나 치바는 교통체증을 싫어하고 음악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특이한 취향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음악을 들으려 노력하고 실제로 인간이 만든 것 중 음악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인간들을 도와주는 경우에도 사실은 큰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일을 빨리 해결하고 음악을 듣고 싶어서'인 것이다. 인간의 말을 잘 이해하지만 때로는 '데스크'가 편집장인지 책상인지 헷갈리는 치바. 그는 결국 저수지에서 야마노베 부부를 끝까지 돕게 되지만 자신은 한 일이 없고 '그건 부력이 한 일'이라고 눙을 친다(그래서 이 책의 원제도 '死神の浮力'이다). 치바의 이런 시종일관 엉뚱하면서도 쿨한 태도는 딸이 살해당한 뒤 웃을 일이 전혀 없었던 작가 부부에게 의외의 웃음을 선물하는 포인트가 된다.
나는 이상하게도 이사카 코타로라는 작가와 인연이 잘 이어지지 않았는데 그건 [집오리와 야생오리의 코인로커]라는 소설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소설은 읽으려고 하면 무슨 일이 생겨서 그냥 책장을 덮게 되고 그 다음에 수십 페이지 읽었는데 또 무슨 이유에서인지 잘 읽히지 않아서 집어던지고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책도 인연이란 게 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 작가의 책을 읽는 걸 포기(?)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이원흥CD라는 분이 '최인아책방'에 추천도서들을 제시할 때 좋은 책이라고 강력하게 권하는 글을 읽고 사서 읽게 된 것이다. 물론 이제 나도 이사카 코타로의 팬이 되었으므로 [명랑한 갱이 지구를 움직인다]나 [중력 삐에로], [마왕] 같은 소설들을 계속 사서 읽을 것이다.
살인사건이 있고, 죽음을 앞둔 작가가 있고 그를 데려가야 하는 사신이 있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다. 거기에 싸이코패스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함께 그로 인해 역설적으로 도드라지는 '인간의 길'도 따뜻한 국물처럼 담겨져 있다. 어떤가. 한 번 연휴에 한 번 읽어볼 만 하지 않은가. 물론 우리나라 소설 중에도 비슷한 소설이 있다.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이다. 그 책도 이사카 코타로 작품 못지 않게 재미 있다. 양심을 걸고 둘 다 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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