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책꽂이에서 J.D 샐린저의 단편집 [아홉 가지 이야기]를 꺼내 <웃는 남자>라는 단편을 읽었다. 1920년대 맨해튼에 살던 꼬마의 이야기다. 소년은 '코만치 클럽'이라는 어린이 야구단에 소속되어 주말마다 낡은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시합을 하러 갔는데 이 팀의 코치 겸 운전사가 '추장'역할을 맡고 있었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는 젊은 추장은 버스를 운전하고 가다가 어느 순간 멈춰서서 이야기 보따리를 꺼내 아이들을 매료시킨다. 그 주에 하던 얘기는 '웃는 남자' 였다. 어렸을 때 중국인들에게 납치를 당해서 얼굴이 망가진 남자의 복수극인데 매번 클라이막스에서 끝나고 다음 주를 기약하는 방식이라 아이들의 원성이 대단했다.

버스 운전석에는 어떤 여자의 사진 액자가 매달려 있었는데 그녀는 추장의 애인인 메리 허드슨이라고 했다. 정말인가 아닌가 궁금해 하던 차에 어느날 추장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길에서 여자를 태우고 야구장으로 갔다. 그녀가 바로 메리 허드슨이었다. 그녀는 포수 그러브를 끼고 그날 감기에 걸려 시합에 빠진 친구 대신 이루수를 맡아 경기를 하며 소년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웃는 남자와 메리 허드슨. 소년은 아마도 이 두 가지 때문에 매주 코만치 클럽 시간을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메리 허드슨은 추장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소년의 행복한 시절은 추억이 되었다.

이 짧은 소설을 읽으면서 추억의 드라마 <캐빈은 열두 살>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저녁 TV에서 들려오던 캐빈의 목소리. 캐빈의 형이 월남전에 나갔다가 죽었으니 이 소설과는 연대가 안 맞지만 그래도 이 단편을 각색해서 그때처럼 드라마로 만들고 배한성이 더빙을 하면 그 느낌이 얼마나 애잔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노란 석양을 배경으로 버스가 흙먼지를 날리며 떠난 뒤 힘없이 현관문을 들어서는 소년의 뒷모습이 꽤나 쓸쓸할 텐데.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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