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일이지만 가끔 마주치게 되는 광고 동료 중에 “큰일이야. 나 요즘 TV 연속극 뭐 하는지 하나도 몰라.”라는 말을 자랑처럼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자긴 요즘 TV를 너무 안 봐서 도대체 어떤 드라마가 유행하는지, 어떤 쇼 프로의 어떤 캐릭터가 인기를 끄는지 잘 모르고 한참 화제가 된 다음에야 뒤늦게 인터넷으로 겨우 확인을 한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만난 후배도 그랬습니다. 자긴 요즘 드라마 ‘신의’와 ‘마의’를 구분하지 못하고 천만 관객이 들었다는 ‘광해’도 시간이 없어 못 봤으며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 아직도 방영되고 있는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자랑인가요? 그렇습니다. 알고 보면 지독한 자기 자랑입니다. ‘난 세속의 일엔 별 관심이 없이 고고하게 살고 있어’ 라고 말하고 싶은, (그러면서 집에 가서는 일본드라마에 심취해있는) 고달픈 내면의 투영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고등학생이 와서 “아, 난 요즘 교과서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는지 하나도 몰라요. 시험범위는 왜 맨날 그렇게 자주 바뀌는지. 헷갈려. 하하.”라고 한다면 과연 무슨 생각이 들까요? 아마 정신줄 놓고 사는 싹수가 노란 인생이라고 혀를 차게 될 것입니다. 광고인들에게 TV는, 인터넷과 신문과 잡지 같은 각종 매체는 매일매일이 교과서이고 참고서입니다. ‘좋아, 싫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걸 다 챙겨 봐야 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적어도 안 본다고 자랑질은 하지 말라는 것이죠.
정치나 선거도 마찬가지입니다. ‘난 정치에 관심이 없어.’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일단 정치 얘기가 나올 때마다 ‘정신 산란하고 골치 아프다’고 고개부터 내젓습니다. 자긴 박근혜와 문재인과 안철수가 하는 얘기가 다 거기서 거기고 다 똑 같은 거 같다고도 합니다. 어떻게 박근혜와 문재인과 안철수가 똑 같을까요? 그러면서 자세한 건 모른다고 단서를 답니다.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비겁하고 쪼잔한 직무유기입니다.
유권자라면 당연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해서 남 주나’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공부를 하고 열심히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정치인을 뽑는 건 자기와 자기 주변인들의 미래에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죠.
‘민주주의’라는 이 허점 많은 제도 아래 살고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정치 행위는 몇 년에 한 번 하는 투표뿐입니다. 그래서 우린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투표는 나의 미래를 이롭게 하는 ‘이기적인’ 행위입니다. 그런데 ‘나라의 미래를 망치고 자신들의 욕심 채우기 급급한 나쁜 정치인’들일수록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유권자들을 몹시 사랑합니다. 오죽하면 ‘말 많으면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던 우리나라입니다. 우리가 후보자들을 보고 ‘그 놈이 그 놈’이라고 자포자기하는 순간, 그 놈도 그 놈이 되고 그 놈이 아닌 놈도 그 놈이 됩니다. 가치체계가 뒤죽박죽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 입이 찢어질까요? 뒤가 구리고 비전이 불분명한 정치인이 가장 반길 상황입니다. 그리고 유권자에겐 판단 근거가 없어지니 모든 게 허무한 ‘일 대 일’ 상황이 됩니다. (로또 1등의 당첨 확률은 1/8,145,060이지만 되느냐 안 되냐만 놓고 보면 1/2 확률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코미디언이자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기타노 다케시는 “민주주의는 졸라 불완전한 체제야. 제대로 하려면 대학생에겐 두 표씩 주고 아줌마들은 두세 집 묶어서 한 표씩 줘야 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웃자고 한 말이지만 투표의 맹점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 투표라는 게 옛날 아테네에서처럼 단란한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선량한 아빠에게만 주어지는 권리라면 얼마나 쉬울까요? 그러나 단란한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선량한 아빠에게 한 표가 주어진다면 ‘오늘 또 누구를 속여먹을까’ 궁리하는 사기꾼에게도, ‘은행이나 털어 외국에 가서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몽상가에게도 한 표가 주어지는 게 국민투표의 룰인 것입니다. 진정 자기의 미래를 위해 일할 사람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도 한 표, 난 아무 것도 모르겠고 그 놈이 그 놈 같으니 아무나 찍을래, 라고 하는 이에게도 한 표입니다.
TV뉴스에서 정치 얘기 나온다고 고개 돌리지 마십시오. 인터넷에서 연예인이나 요리법 모아놓은 파워 블로거만 찾아 다니지 마십시오. 정치에 관심을 갖는 건 우리의 미래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나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선거에서 이긴 사람이 5년 동안 우리의 월급과 집값과 세금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귀찮더라도 우리 일에 관심을 가집시다. 괜히 고상한 척 허무한 척 말고, 좀 이기적인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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