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만나 보는 나이 든 홍상수 - [클레어의 카메라]
영화제 때문에 깐느에 왔던 영화감독 소가 술에 취해 영화사 직원인 만희와 하룻밤 자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런데 같이 온 영화사 사장이 그걸 알고 만희를 현지에서 전격 해고한다. 이유는 정직하지 않아서, 라고 하지만 사실은 질투심 때문이다(사장과 소 감독은 오랜 연인 사이다). 만희는 자기가 왜 잘렸는지도 명확하게 알지도 못한 채(비행기표가 워낙 싼 거라 일정 변경이 불가능해서) 깐느 해변을 배회하다가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다니는 클레어라는 프랑스 여자를 알게된다. 그 여자는 우연히 소 감독도 만나게 된다. 소 감독과 영화사 사장이 있는 자리에 합석하게 된 클레어는 자신이 며칠 동안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들을 보여주다가 이 사람들이 만희와 아는 사이임을 알게 된다. 만희는 김민희이고 소 감독은 정진영, 영화사 사장은 장미희이다.
이것은 홍상수 감독이 내놓은 69분짜리 짤막한 장편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다. 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한 편의 단편소설 같다. 그것도 1,2,3 챕터로 구성된 단편소설 중에서 두 번째 챕터만 떼어내 영화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몇 명 나오지 않는 등장 인물로 봐도도 그렇고 백 분이 채 안 되는 길이로 봐도 그렇다. 제목에 등장하는 클레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거의 정보도 없고 인간적인 고뇌도 없어 보인다. 아마도 클레어 역을 맡은 이자벨 위페르에 대해 알고 싶으면 1이나 3챕터를 따로 찾와봐야 할 것이다.
아다시피 홍상수는 몇 줄의 시놉으로 구성된 아주 사소한 얘기만으로도 뚝딱뚝딱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관객이 흥미를 불러 일으킬 만한 영화적 소재를 찾는 것엔 관심이 없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라고 오해받을 수 있는 소재나 배우를 쓰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그럼 내가 이런 얘기 말고 무슨 다른 얘기를 하란 말인가, 라고 매번 묻는 듯하다. 이번에도 프랑스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몇날 며칠 간의 소소한 사건들이 앙상한 배경의 전부다. 그런 미시적인 세계 속에서 '정직, '판단', '변화' 같은 중요하지만 너무 빛이 바래 이젠 우스워진 단어들을 배우들의 입에 담게 한다. 그러다 보면 또 한 번 홍상수만 가능한 영화가 완성된다. 찌질한 연애나 삼각관계, 허영심에 휘둘리는 남자들 등 아주 시시한 세계 속에서 보편적 인간의 속성을 발견하는 것. 아마도 홍상수를 세계적인 영화감독으로 만든 것은 이런 통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도 홍상수는 변함이 없다. 일상의 미세한 반복을 포착하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유치찬란한 면을 천재적인 방법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던 술자리나 섹스 장면이 점점 적어진다. 그게 나쁜 건 아니라고 본다. 굳이 술이나 섹스 장면이 나오지 않아도 얘기가 충분히 전달된다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번엔 그 생략의 빈도가 더 잦아지다 보니 러닝타임도 짧아지고 카타르시스도 적어졌다. 언젠가 홍상수는 영화를 찍을 수 없을 정도로 나이가 들면 그땐 아주 짧은 단편소설 같은 걸 쓰고 있지 않을까, 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어쩌면 이 영화는 그런 그의 예언을 미리 엿본 거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이가 든다고 홍상수가 힘이 빠지거나 너그러워지지야 않겠지만, 적어도 덜 수다스럽고 덜 그악스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고 또 당연한 일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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