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이 책은 '독하다 토요일'에 어울리지 않는 작품일 수도 있겠다, 는 생각을 약간 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한 편으로는 '독하다 토요일'이 시작된 이래로 가장 흥미진진한 장편소설을 선정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김언수의 [뜨거운 피]는 그런 소설이었습니다. 1990년대 노태우 정부 시절 부산 바닥에서 활동하던 건달 희수의 얘기. 대학로 책책에서 열린 '독하다 토요일' 네 번째 모임은 이 책을 읽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사실은 지난 모임 직후 바로 후기를 써서 올렸어야 했는데 제가 게으름을 피우는 바람에 계속 미루다가 이제라도 써야지 하고 수첩을 뒤적이고 있습니다)  

그날 모임엔 오랜만에 참석한 손영연 씨, 그리고 윤혜자 씨, 김하늬 씨, 임기홍 씨, 서동현 씨, 임재섭 씨 등이 왔습니다. 재미있긴 하지만 소설이 워낙 두껍다 보니 미처 다 읽지 못하고 온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두 시부터 세 시 넘어서까지 묵묵히 책을 마저 읽는 분위기였습니다. 느와르 영화 같은 소설이라 여자분들보다는 남성들이 더 열광하는 눈치였습니다.  임기홍 씨는 학교 선생님이라 정말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비참한 상황에서 사는 학생들을 대할  때가 많은데 막상 그 어떤 것도 해줄 수가 없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많이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세상이 참 지저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죠.  

제가 소설을 읽고 건진 교훈 중 하나가 '더러운 걸 참아야 싸움에서 이긴다'라고 했더니 윤혜자 씨가 자기는 평소에 그런 걸 잘 못해서 안 되는 모양이라고 하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임재섭 씨는 얼마 전 일을 지지부진하게 만들었던 실제 인물 얘기를 하며 그때 후배가 했던 말, '형, 비즈니스는 그게 **전자 안이라고 해도 다 개새끼에요!'를 기억했습니다. 신사적이고 점잖은 사람은 꿈속에서나 존재하는 법인가 봅니다.  

그러자 김하늬 씨가 얼마 전 직업여성이 쓴 책을 읽었는데 그게 소설에 나오는 인숙과 비슷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불행의 모습은 어딘가 비슷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다가 영화 [변산] 얘기가 나와 전라도 사투리 애기를 하다가 잠깐 각자 알고 있는 충청도 사투리에 대한 유머를 털기도 했습니다('너만 안 지치면 되어야~', '출튜?' 등등). 

저는 어쩌면 이 소설이 '이야기의 원형'에 충실한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부영화처럼 왕년에 잘 나갔지만 지금은 쇠락한 주인공이 등장한다든지 탁구 치듯 재기발랄한 대사들을 주고받는 건달들이 나온다든지 하는 모양새가 그랬습니다. 윤혜자 씨는 일단 자기 취향이 아닌 소설을 읽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하면서도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언제 자기가 이런 소설을 읽어보겠냐며 '페이지 터너'스러운 이 소설의 흡입력에 감탄했고 만약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게 되면 희수 역을 누가 하면 좋을까를 상상해 보았다고도 했습니다(일단 희수 역은 황정민). 

손영연 씨는 요즘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실화는 감정이입이 잘 안 되는 편인데 오히려 이 작품은 자신이 사는 세상과는 너무 다른 얘기이기도 하고 완전한 픽션이라 더 재미있게 읽혔다고 했습니다.  물론 앞부분의 길고 오밀조밀한 설정은 좀 버거웠다고 했습니다. 감하늬 씨도 앞부분을 너무 깔아놓는 게 지겹고 힘들었다며 그런 점이 이 소설의 '진입장벽'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요즘 소설들은 그런 설정 없이 막 치고 들어오는 느낌이라는 것이죠. 그러면서도 친구들과 글 쓰는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쓰는 도중에 심각해지고 그렇게 쓴 걸 나중에 읽다보면  '삶도 힘든데 이런 걸 왜 읽어야 해?'라는 자괴감에 빠진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고전은 예전 작품인데도 오히려 처음부터 그냥 막 치고 들어오는 느낌이라 신기하다고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주인공 희수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김하늬 씨는 빨래공장 관련 에피소드에서 정배와 나누는 대사들과 그 처리 방법 등에 대해 얘기하면서, 사람들이 바라는 이미지 대로 살아가는 희수의 캐릭터가 다지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과 겹치기도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윤혜자 씨는 도대체 작가가 이 이야기들의 취재를 어떻게 했을까 궁금해 했습니다. 손연영 씨는 90년대 장현수 감독의 영화 [게임의 법칙]이 생각난다고 했습니다. 

서동현 씨도 건달들 얘기를 글로 설명하려다 보니 앞부분이 좀 길어진 것 같다고 하면서도 여러가지 한국 느와르 영화들이 생각나는 이야기라고 했습니다([비열한 거리], [해바라기], [넘버쓰리] 등등). 살면서는 결코 만나기 힘든 인물들이지만 영화나 소설에서는 매력적인 캐릭터들 말입니다. 매번 모임 때마다 질문을 하는 김하늬 씨가 이번에도 사건을 제안하는 친구 양동과 용강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했는데 너무 시간이 지나서 질문 내용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가 메모를 띄엄띄엄 한 결과겠지요. 죄송합니다. 

저는 [형사 매드독]의 제임스 벨루시나 [분노의 주먹]의 로버트 드 니로 등 보스들이 나중에 나이가 들어 클럽에서 스탠딩 코미디를 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깡패의 미덕은 주먹만큼이나 '구라'에 있다고 말했더니 윤혜자 씨도 '칼로 죽이든 말로 죽이든 상대를 제압해야 하는 게 그 세계'라고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희수 역에 박호산을 쓰면 어떨까 애기를 하는 바람에 다시 장진영, 장신영, 전도연 등 일급 배우들이 인숙 역으로 다시 한 번 물망에 오르기도 했습니다(어차피 돈 안 드는 캐스팅이라 생사여부도 상관이 없는 게 특징). 

임재섭 씨는 '여기서 뒷부분 얘기 하면 안 되냐?'며 스포일러로서의 욕망을 토로했지만 아직 끝까 안 읽은 사람들이 많아서 뜻을 이루진 못했습니다. 이  소설은 뒷부분에 몇번이나 뒤집어지는 '반전'이 읽는 맛을 더해주는 바람에 한 번 잡으면 밤을 새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임기홍 씨는 이 소설조차도 성장소설로 읽혔다고 토로했습니다. 나이 서른에도 마흔에도 쉬흔에도 사람은 자란다는 것이죠. 희수의 인생역정을 보면 확실히 그런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그러면서 '소맥'에 대한 멋진 비유를 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역시 죄송합니다). 

책에 대한 수다를 마치고 모두 일어나 을지로에 있는 '영락골뱅이'에 가서 골뱅이를 안주로 맥주를 마시며 '아무말 대잔치'를 이어갔습니다. 이차는 '태성골뱅이'였는데 역시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다음엔 SF소설을 쓰는 배명훈의 소설집 [안녕, 인공존재!]인데 역시 제가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벌써 8월 11일이 기다려집니다. 모두들 무더위에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사족으로 제가 쓴 세 줄 평을 첨가합니다 : 

인생의 진리는 고매한 지위나 인격을 가진 사람들 틈에서 나오지 않는다. 시궁창에서 딩굴며 악에 받친 인간들끼리 목숨 걸고 싸우거나 한편이 될 때 기름기 쏙 빠진 금언들이 하나씩 튀어나온다. [뜨거운 피]가 그런 소설이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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