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시나리오 작가 심산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대부]라고 썼을 때 그 밑에 “깡패영화 좋아하셔서 참 남자다우시겠습니다”라고 비아냥거리는 댓글이 달린 것을 보고 마음이 언짢았던 기억이 난다. 심산은 깡패영화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대부]가 얼마나 훌륭한 영화인지를 얘기하고 싶은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는 힘이 세다. 거의 모든 ‘어른영화’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을 효과적으로 소개하는 법, 주인공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 하는 법, 가슴에 남는 대사를 쓰는 법, 적재적소에서 캐릭터들이 복무하게 하는 법…한마디로 [대부]는 바보같은 깡패영화가 아니다.
그건 그렇고 우린 왜 자꾸 ‘깡패영화’를 보는 걸까? [신세계]를 보는 동안에도 온통 그 생각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다. 나아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무섭기 때문이다. 왜 단란한 가족이 휴일에 대공원에 가서 일부러 무서운 청룡열차를 타고 소리를 지르는가. 왜 귀신의 집에 들르는가. 왜 다정한 연인들이 손에 손잡고 극장에 가서 귀한 돈을 써가며 주인공이 불치병에 걸려 죽는 걸 보고 질질 짜는가. 그러면 좀 낫기 때문이다. 아, 그래도 내가 저놈들보다는 덜 힘들구나. 적어도 나는 지금 당장 영화보고 나가다가 칼에 찔리거나 나이롱줄에 목이 콱 졸려 죽진 않겠구나.
이자성은 강과장이 오래 전에 ‘골드문’이라는 폭력조직에 심어놓은 스파이다. 경찰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조직의 중간 보스급이다. 이건 뭐 [무간도]를 비껴가기 힘든 설정이다. ‘적의 내부에 침투해 활약하다가 점점 그들에게 동화되어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주인공’이란 공식이 딱 나오지 않는가. 경찰이 폭력조직의 후계자 문제에 적극 개입한다는 설정은 두기봉 감독의 [흑사회] 시리즈와 흡사하다.
그런데도 박훈정 감독은 비껴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강력한 캐릭터와 상황들로 기존 작품들의 흔적을 지우려 한다. 그래서 틈만 나면 이자성을 다그치는 강과장은 [무간도]의 황반장보다 다섯 배는 더 싸늘하고 피를 나누지 않은 ‘브라더’ 정청은 [도니 브레스코]의 알 파치노보다 더 잔정이 많다. 그렇더라도 감독이 수많은 오해를 무릅쓰고 그런 야심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출연 배우들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영화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을 때 [베를린]을 보러 나갔다가 극장에서 포스터를 보고 깜짝 놀랐다. 최민식 황정민 이정재라는 셀러브리티들이 나란히 등장하는 ‘신종 듣보잡’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박훈정이라는 이름을 보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이미 시나리오 작가로 충분히 이름이 알려진 감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기대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역시!’로 변했다.
황정민은 그야말로 미친듯이 연기를 잘 한다. 달라져 봐야 [달콤한 인생]의 백사장에서 얼마나 멀어지겠냐 했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물을 만난 물고기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정청이 처음 등장할 때 비행기 일등석 슬리퍼를 신고 나오는 설정이나 이자성 대신 옆에 있던 부하 뺨을 때리는 장면 등이 모두 황정민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연기뿐 아니라 작품을 입체적으로 대하는 그의 열정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다.
혹자는 최민식의 연기가 황정민에 비해 좀 아쉬웠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경찰이 깡패들에게 카메라를 빼앗길 때 홀연히 등장해 능청스럽게 대사를 치는 최민식을 떠올려 보라. [넘버 쓰리]의 마동팔 검사 이후 그런 정확하고 적확한 발음과 억양들이 아무한테서나 나오는 게 아니다. 그리고 날고 기는 황정민에 비해 상대적으로 튀지 않음으로써 극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까지 충분히 해주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그림이 되는 배우 이정재. 연기력이 모자라던 [모래시계] 때처럼 정말로 ‘가만히’ 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젠 베테랑이다. 그리고 거울 효과라는 게 있다. 이런 귀신 같은 배우들과 함께 연기를 하면서 어떻게 연기가 좋아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연기자들이 또 있다. ‘연변거지들’이다. 인천국제공항에 처음 등장할 때는 좀 억지가 아닌가 싶었는데 이건 갈수록 존재감이 커지는 것이었다. 특히 송지효를 습격하다 한 명이 총에 맞아 쓰러지자 “소풍 왔넨?!” 이라 외치며 저돌적으로 쳐들어가던 무대뽀들이 장례식장에선 허겁지겁 음식을 집어먹다 이자성과 눈이 마주치자 쩔쩔매는 연기는 정말 압권이다. 연변 거지 삼인방의 이름은 김병옥 우정국 박인수. 미친 존재감이란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신선한 캐릭터들을 창조해 멋지게 써먹은 감독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영화엔 여자가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이자성의 아내도 나오고 송지효도 나온다. 그러나 그녀는 여자가 아니다. ‘빠져나갈 데가 없는’ 이자성의 처지를 설명해주기 위한 도구로 쓰일 뿐, 여성성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그리고 애초부터 이 영화엔 여자가 나오지 않아야 맞다. 마초 영화라서가 아니다.
정청은 오랜만에 이자성을 만나서는 “우리 어디 가서 떡이나 치자”고 조른다. 이건 명백히 파트너에게 섹스를 하러 가자고 조르는 남자의 멘트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 말미의 6년 전 에피소드에서도 첫 살인 임무를 힘겹게 완수한 정청은 이자성에게 “우리, 목욕탕 가서 깨끗이 씻고 영화나 한 편 보러 가자”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무슨 영화냐는 파트너의 질문에 “무슨 영화는. 떡영화지.”라고 대답한다. 실지로 섹스를 하진 않을 뿐 이보다 더 징그럽게 가까운 사이가 또 어디 있을까.
어제 본 인터넷 기사에서 박훈정 감독은 이 영화를 ‘넥타이 매고 정치하는 영화’라고 설명하더라. 그러나 그건 너무 점잖다.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강과장이 비루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피곤함을 대변해 주는 존재라면, “독하게 살아야 해”라고 죽어가는 순간까지 배신자를 감싸는 정청의 멘트는 존재의 본원적 외로움 때문에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늘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깡패 영화의 탈을 썼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연약하고 지친 남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탄생한 아주 ‘징헌’ 멜로드라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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