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처음 열리는 '독하다 토요일' 모임이지만(시즌2로는 세 번째) 감기나 독감, 과중한 업무 등으로 인해 멤버들의 결석이 많은 날이었습니다. 윤혜자 씨는 간밤의 격한 음주와 그에 따른 숙취로 인해 도저히 모임에 참석하지 못할 컨디션이었고 서동현 씨도 독감이 심해서 집에 누워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정아름 씨는 요즘 회사의 과중한 업무 때문에 토요일 오전 내내 기절하듯이 자고 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손영연 씨도 집안에 어려운 사정이 있어서 계속 참석을 못하는 형편이었구요. 아무튼 저조한 출석율을 예상하며 제가 1시 40분쯤 '청춘여가여연구소'에 도착했을 때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정은빈 대표는 물론 다른 회원 아무도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설상가상 저는 간밤에 금호동 '오남매곱창'이라는 술집에 스마트폰을 두고 왔는데 그 가게는 저녁에나 문을 열어서 아무런 커뮤니케이션 도구 없이 문 앞에 서 있어야 했던 상황이었구요. 노트북으로 카톡을 확인하고 싶어도 안으로 들어가 와이파이 번호를 알아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스마트폰이라는 도구에 매여 사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1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가서 사정을 하고 전화기를 빌려 윤혜자 씨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습니다. 다시 10층으로 올라가 출입문에 메모되어 있는 정은빈 대표의 전번을 노트에 메모하고 1층 커피숍에 와서 또 전화기를 빌려 정 대표와 통화를 하고 나서야 출입문 비밀번호가 이미 카톡 메시지로 공유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스마트폰을 잃어버려서 카톡창을 볼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고 비밀번호를 받아서 10층으로 올라오다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진주 씨를 만났습니다.
간밤에 파티를 열어서 조금 지저분하거나 음식 냄새가 날 수 있다고 했지만 올라와 보니 얘기 들은 것보다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곧 정 대표의 친구라는 분이 올라오시더니 주섬주섬 청소를 해주셨습니다. 진주 씨와 저는 이십 분 정도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 뒤 테이블 위에 있던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습니다. 김하늬 씨와 김성희 씨, 임기홍 씨가 속속 도착해서 세 시 정도에는 다섯 명의 인원으로 조촐한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읽을 책은 구병모 작가의 [네 이웃의 식탁]이라는 장편이었습니다. 저는 작가의 전작인 [파과]를 재미있게 읽었고 또 세간의 평도 좋은 것 같아서 이 책을 추천했지만 결과적으로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윤혜자 씨도 같은 느낌이었는지 시즌1과 달리 책을 미리 읽어보지도 않고 도서목록에 올린 것은 주최자로서의 직무유기라며 저를 맹비난했습니다. 독하다 토요일 멤버들의 수준을 존중하라는 경고이기도 하죠.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이라는 곳에 입주해 살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인 장편소설 [당신의 식탁]에 대해 제가 '공동생활과 공동육아의 어려움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는 성공했지만 그 의도가 성공하는 바람에 오히려 더 안 좋은 소설이 된 케이스'라고 했더니 김하늬 씨도 '용두사미 같은 소설'이라는 말을 꺼냈습니다. 시작은 매우 흥미로운데 서로의 성격이 부딪히고 사건이 생기는 과정에서 남은 것은 육아와 불륜에 대한 앙상한 이야기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부의 주도 하에 공동주택에 들어가게 된다는 점에서는 어쩌면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자들의 도시]와 비슷한데 노벨상을 받은 그 작품과 달리 이 소설은 그저 현상과 반동만을 다룬 피상적인 이야기로 끝나버렸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가 공동주택 담 밖으로 나가지 못한 것 같다'라고 아쉬워하면서 식탁이 들어가는 제목도 참 잘 지었는데 작품은 그렇제 못한 것 같다고 했고 김하늬 씨도 동의하면서 특히 마지막에 수미쌍관 식으로 보여준 에피소드는 작가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멋부림이 아닐까, 하는 제 대답에 편혜영의 [저녁의 구애]도 비슷한 플롯이 있는데 훨씬 세련되게 구현이 되었다며 역시 아쉬워했습니다.
캐릭터들의 역할이 너무 정확하게 정해져 있어서 공감하기 힘들었다는 불만도 나왔습니다. 진주 씨는 시간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처럼 세세한 분석까지 해가며 읽진 못했는데 아무튼 다 읽고나니 뭔가 허무하고 답답한 느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구병모 작가가 어디선가 공동체 생활을 경험하고 쓴 책이라는 얘기를 들었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렇다면 공동주택생활이라는 게 육아든 삶이든 인간에게 좋은 대안이 되지 못한다, 라는 통찰이라도 나와야 하는데 이건 그게 아니라 '내가 어쩌다보니 재수 없는 애들을 떼로 만났어' 식의 개인적 경험담을 들려주는 수준으로 주저앉는 느낌이었다는 얘기를 했더니 임기홍 씨가 '똥통에 빠졌다고 한거죠'라고 거들어서 모두들 웃었습니다.
김성희 씨는 새로운 부서로 발령이 나고 개인적으로도 부산한 일들이 많아서 책을 읽지 못하고 왔는데 오면서 앞부분을 조금 들춰보았다고 하면서 제목만으로는 우리가 비판하는 내요을 상상하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그만큼 제목을 잘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진주 씨가 결론이 너무 허무하다고 얘기하자 김하늬 씨는 작가들은 문제 제기만 잘 해도 그 의미가 있는데 이 작품은 문제 제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결책을 주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라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임기홍 씨는 이게 과연 소설인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어다고도 했습니다. [82년생 김지영]처럼 아예 르뽀 형식을 깆춘 작품도 아니면서 작가는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민낯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은데 읽다보면 소설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겠고 정말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지경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정부가 주도한 공동주택사업이라는 게 처음엔 거창한 의도로 시작했는데 잘 안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벌려놓은 사업이므로 꾸역꾸역 그것을 지속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고, 거기서 갈등이 나와 사건이 만들어진다든지 하는 게 올바른 작법인 것 같은데 이 소설은 그런 인과관계를 파고들지 않고 그냥 그 내부에서 각각의 캐릭터들이 개인적 사연만 밀고 나가는 느낌이라는 것이죠.
좋은 소재를 놓고 이 정도밖에 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큰 작품이었습니다. 김하늬 씨는 김탁환 작가에게 들었던 '소설 특강'을 회상하며 사건이 일어나면 끝을 봐야지 도망가지 마라, 라는 얘기에 매우 공감을 했는데 이 소설은 그런 사건들을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후일담 식으로 처리한 것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지적이었습니다. 김성희 씨는 시간이 없어서 앞부분에 나오는 효내 얘기만 좀 읽었는데 예전에 읽은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 같은 경우도 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사는 이야기였지만 굉장히 인간미 있었는데 여기 모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너무 어렵다는 얘기도 했는데 저도 동감이었습니다. 재강, 단희, 여산, 교원, 상낙, 효내, 은오, 요진 등의 이름이 하나같이 세련되어서 누가 누군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었으니까요.
아무튼 너무 비난 일색이라서 지금쯤 작가의 귀가 꽤 간지럽겠다, 라는 얘기까지 하면서도 캐릭터에 대한 불만이 또 터져나왔습니다. 그러다가 작가가 너무 착해서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색다른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뭔가 일을 제대로 해내려면 좀 독하고 못된 구석이 있어야 하고 특히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는 얘기를 제가 꺼냈더니 그게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서 이병헌, 홍상수, 잭 니콜슨 등 자기 분야에서는 눈부신 업적을 이뤘지만 개인생활에서는 '악동'으로 소문난 캐릭터들에 대한 얘기가 가십처럼 흘러나와 한참 수다를 떨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제목은 참 좋은데 참 아쉬워, 라고 말하는 김하늬 씨와 차라리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처럼 한 사람 한 사람 연작소설로 썼으면 더 나았을 것을, 이라 말하는 김성희 씨의 대안 제시가 이어졌고 제가 작가는 좀 못된 구석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의 연장선으로 예전에 광고대행사 다닐 때 술자리에서 늘 동료들과 늘 하던 얘기인 '같이 일하고 싶은 놈은 바보와 개새끼 중 누구를 고르겠냐?' 를 가지고 또 한참 수다를 떨었습니다. 배가 산으로 가서 급기야 제가 예전에 조폭 출신의 건설회사 대표와 회의 끝내고 점심 먹으러 갔다가 그 대표가 "아무거나 자유롭게 시켜요. 여긴 짬뽕을 잘 하지만. 난 짱뽕..."이라고 말씀하셔서 졸지에 여덟 명이 짬뽕 여덟 그릇 먹고 나온 이야기까지 하다가 허둥지둥 모임을 끝냈습니다.
이날은 뒷풀이 모임조차 참여가 저조해서 다른 분들은 가고 김성희 씨, 진주 씨,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이서 정동길 따라가다 있는 '장수회관'에 가서 국수전골에 소맥, 볶음밥까지 맛있게 먹고 마신 뒤 헤어졌습니다. 아마 읽은 책에 대해 비판적으로 얘기한 첫 번째 모임이 아니었나 합니다. 이런 날도 있는 거겠죠 뭐. 다음달에 읽을 책은 황석영이 [손님]입니다. 개인적으로 [무기의 그늘]과 함께 황석영의 역작이라고 생각하는 장편소설입니다. 다음엔 또 어떤 독후감들이 등장할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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