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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9.04 토요일 오후의 독서 - 김훈의 <바다의 기별>



토요일. 낮잠에서 깨어난 나는 오디오를 켜 말로의 앨범을 틀어놓고 현관앞에 앉아 책꽂이에서 충동적으로 꺼내온 김훈의 <바다의 기별>을 펼쳐들었다. 책을 열자 여기저기 파란색 볼펜으로 쳐놓은 밑줄과 메모들이 보였다.

딸이 첫 월급을 받아 휴대폰을 사주고 용돈으로 15만 원을 주었을 때 김훈은 '노동과 임금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딸'을 쳐다보며  ‘그때 나는, 이 진부한 삶의 끝없는 순환에 안도하였다’라고 썼고 나는 그 귀퉁이에다 “좀 대견했다고 쓰면 어디가 덧나냐”라고 끼적이고 있었다. 김훈이 친구들과 술 마시는 자리에서 엉뚱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소방장비들의 기능과 작동방식에 대해 늘어놓다가 핀잔을 받는 장면에다가는 “데뷔작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얘기는 왜 안 하냐”라고 또 시비를 걸고 있었다. 

‘70년대의 기라성 같은 청년작가 김승옥이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발표했을 때, 아버지는 문인 친구들과 함께 우리 집에 모여서 술을 마셨다. 그들은 모두 김승옥이라는 벼락에 맞아서 넋이 빠진 상태였다…새벽에 아버지는 “이제 우린들 시대는 이미 갔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라는 문단을 읽으면서 문단에서 김승옥이라는 작가의 등장이 얼마나 대단한 사건이었는지를 새삼 느꼈고 그게 가능했던 매체 환경과 감수성을 부러워했다. 


그러다가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라는 글을 읽게 되었다.

아직 김지하의 정신이 말짱하다 못해 푸른 대나무처럼 빛나고 있을 때였고 스물일곱 살의 청춘인 김훈이 신문기자로 발령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영등포 교도소에서 김지하와 백기완 등 정치범들의 출소를 기다리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다들 교도소문이 언제 열릴지 알 수 없었으므로 자리를 뜨지 못하고 중국집에서 배달 온 식은 짬뽕국물을 마시며 교도소 안으로 전화를 걸어 “야, 풀어주려면 제발 지방판에 맞춰서 풀어주라. 지방 독자는 사람이 아니냐”라고 욕설을 퍼붓던, 그 스산하고 춥고도 지루한 풍경. 

그때 김훈은 교도소 정문 맞은편 야트막한 언덕에서 웬 허름한 여인네가 포대기로 아이를 업은 채 추위 속에 웅크리고, 저물어가는 교도소 정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혹시 박경리가 아닐까 하고 다가가 훔쳐보니 김지하의 장모 박경리 선생이 맞았다. 대절한 택시를 옆에 세워놓고 태어난지 10개월 된 손자를 어르며 언제 나올지 모르는 김지하를 기다리고 있는 <토지>의 작가 박경리. 김훈은 운좋게도 혼자 박경리를 알아보았지만 그렇다고 기자들을 향해 “여기 박경리 왔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다. 

밤 아홉 시께 옥문이 열리고 머리를 박박 깎은 김지하가 나타났다. 고은, 천승세, 조태일, 김광협 들이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고, 학생들이 김지하를 무등 태워서 캄캄한 교도소 앞 광장을 미친 듯이 달리며 고함을 질렀다. 김지하는 장모가 와있는지도 몰랐으므로 아무 생각도 겨를도 없이 그들의 지지자들이 마련한 승용차를 타고 교도소 앞을 떠났다. 

다른 기자들은 대부분 김지하의 승용차를 따라 명동성당으로 가버린 뒤 김훈은 김지하 출감 기사를 먼저 신문사에 전화로 송고하고 백기완이 나오기를 또 기다렸다. 밤 열한 시쯤 드디어 백기완이 나오게 되었는데 교도소측에 의하면 6년 전 백기완이 국민투표법 위반으로 벌금을 선고받은 전과가 있어서, 그 벌금 십만 원을 납부하지 않으면 석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즉석에서 모금이 시작되었으나 이미 사람들이 대부분 떠난 후라서  제대로 모금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교도소 정문 앞 광장에 내려온 박경리가 포대기 앞섶을 뒤적거리더니 만 원짜리 몇 장을 내놓고 대학생에게 이 돈을 보태라 말하고는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기자의 신분으로 모금에 참가할 수 없어 주머니 속에 있는 만 원짜리 몇 장을 만져보고만 있었던 김훈은 마지막이 이렇게 썼다.

그날 밤 나는 신문사로 돌아가 마지막 기사를 작성했다. 나는 박경리에 관해서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나는 다만 백기완의 출소 모습만을 추가로 썼다. 나는 박경리에 관하여 쓸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쩐지 그것이 말해서는 안 될 일인 것만 같았다. 새벽 두 시께 집으로 돌아와 잠자다 일어난 아내에게 그날의 박경리에 대해 말해주었다. 아내는 울었다. 울면서 “아기가 추웠겠네요”라고 말했다. 춥고 또 추운 겨울이었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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