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는 그가 올린 연극들이 오늘날처럼 전 세계를 풍미하는 고전이 되리라고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이야 전 세계의 대학에서 그의 극작만을 평생 연구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지만 당시에는 그도 그냥 연애하는 남녀가 나오고 고민하는 왕자나 고리대금업자, 권력을 쥐기 위해 이전투구하는 왕족들이 등장하는 '대중 연극'을 만드는 것이고 자신은 극단을 운영하기 위해 계속 대본을 쓰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니까. 그런데 결국 그 시대를 대변하는 작품들은 거창한 얘기보다는 이처럼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사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일 경우가 많지 않은가. 

물론 어제 대학로 아름다운 극장에서 본 [장군슈퍼]라는 작품을 셰익스피어의 작품들과 비할 생각은 없다. 다만 어느 시대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사이즈'가 아니라 '공감대'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얘기하고 싶은 것 뿐이다. 이 연극은 아들 장군이의 이름을 딴 슈퍼마켓에서 일어나는 잔잔하고 착한 이야기들을 담았다. 편의점과 마트가 판을 치는 세상에 왜 굳이 슈퍼마켓 이야기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모든 게 커지고 자동화된 공간보다는 조금 뒤쳐져도 그 덕분에 아직 '아날로그'가 남아있는 곳에 따뜻하고 정감있는 사연들이 피어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죽은 남편이 남기고 간 슈퍼가 마트에 밀리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엄마와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해 슈퍼 일을 보는 장군이, 그리고 동네에서 작은 술집을 운영하는 장군이의 이모 선희, 옆집에 사는 재수생 성환, 그리고 성환이 약사라고 얘기해서 그런 줄 알았던 미선, 슈퍼에 와서 혼자 맥주를 마시곤 하는 미남 등이 이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언제나 믿고 보는 배우 이승연과 이모 역의 박진호가 극의 중심을 잘 잡아주고 장군 역의 김상균과 성환 역을 맡은 오영윤이 웃음코드와 눈물이 나는 장면들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잔잔한 이야기지만 미선의 정체나 장군의 친모 이야기 등 극을 지루하지 않도록 하는 복선들도 있어 90분 간 전혀 지루할 틈 없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어제는 연극계의 아이돌이라는 오영윤의 팬들이 많이 온 모양이었다. 그가 나와 연기를 할 때마다 객석에 있는 여성 관객들의 반응이 대단했다. 

연극이 끝나고 나서 배우 이승연과 함께 간단하게 술자리를 가졌다. 그녀는 공연이 끝나고 배우, 연출 등과 함께 짧게 오늘 공연에 대한 리뷰와 보완점 등을 얘기하고 오느라 조금 늦었다며 미안해했으나 우리들은 오히려 이렇게 좋은 작품을 볼 수 있게 연기를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더블 캐스팅, 트리플 캐스팅 등으로 이루어져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들이 나오는 날을 체크해서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춘천거기]등을 쓴 작가 김한길(소설가이자 정치인인 그 김한길 말고)의 작품이라 이미 탄탄한 적품성을 인정 받았지만 이번에 극단 '가족의 탄생'이 새롭게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면서 더 좋은 작품을 선보이려 노력한 마음이 느껴진다. 9월 21일까지 대학로 '아름다운 극장'에서 상연한다. 시간 내서 보시길 추천한다. 우리는 인터파크로 티켓을 예매하서 봤는데 티켓값이 너무 싸서 미안할 지경이었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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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힘든 이유는 누구에게나 기쁜 날보다 힘든 날이 월등히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퇴근 후에 허름한 술집에 모여 직장 상사를 욕한다. 아니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시댁 사람들 흉을 본다. 휴가를 가서 멋진 여행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단골 바에 가서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 그런데 유난히 기분 나쁘고 우울한 날엔 어떤 음악을 듣는 게 좋을까. 얼핏 신나는 음악을 듣고 마구 춤이라도 추면 나아질 것 같지만 심리학자들은 오히려 그럴 땐 슬픈 음악을 듣는 게 더 낫다고 조언한다. 신나는 리듬과 볼륨으로 자신의 감정을 속이면 당장은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그런 ‘자기기만’은 현실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무엇 하나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파티가 끝나고 나면 다음날 더 쓸쓸해지는 ‘파티 증후군’을 생각하면 쉽게 수긍이 가는 얘기다.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물론 입시 준비나 직장 생활, 구직 생활 등등 무엇 하나 잘 풀리지 않는 답답한 현실에 시달리다 오랜만에 극장 나들이 한 번 하기로 한 사람들이라면 신나게 달리고 때려부수는 블록버스터나 샤방샤방한 로맨틱 코미디에 먼저 눈이 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당의정에 싸인 예쁜 알약은 잠깐의 진통효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끔은 입에 쓰지만 약효가 서서히 퍼지는 보약처럼 우리 마음에 자양분이 되는 영화들을 찾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지난 주에 개봉한 [산다]가 바로 그런 영화다.



강원도 건설현장에서 잡부로 일하는 주인공 정철은 매순간 벼랑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정도로 위기와 고통의 연속을 사는 인물이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이 대한민국 지방도시에서 정규 직장 없이 살고 있는 30대 남자. 부모는 산사태로 집이 무너질 때 흙더미에 깔려 돌아가셨고 옆에는 정신이 좀 온전치 못하고 행실도 헤픈 누나와 그녀가 낳은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어린 조카, 그리고 착하긴 한데 약간 모자라 보이는 친구 명훈이 있을 뿐이다.


기댈 언덕 하나 없는 척박한 세상에서 하루하루 밥을 벌기 위한 정철의 고군분투는 우직하고 눈물겹다. 첫장면에서 정철 혼자 가시덤불을 자르고 나무를 베는 장면이 한참 나온다. 대사는 한 마디도 없다. 그저 계속 일을 할 뿐이다. 그 장면이 지나간 다음에도 왜 그 일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조차 없다. 박정범 감독은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로케이션 헌팅을 하다가 그 장소를 발견하고 즉흥적으로 그 장면을 찍었다고 한다. 이 첫 장면은 그 후로 계속되는 공사장, 벌목장, 메주공장(그리고 메주공장 사장집에서의 가사노동까지!) 등에서 펼쳐지는 고된 노동현장을 압축해서 보여준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박정범 감독은 놀라운 사람이다. 혼자 영화를 기획하고 시나리오도 쓰고 연기도 한다. 전작인 [무산일기]를 보면 그가 얼마나 연기를 잘 하는 '배우'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영화의 경우는 시나리오를 무려 50번이나 고쳤다고 하니 영화에 대한 그의 집념이 놀랍다. 신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젊은 여자 아이 이야기를 다뤘던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처럼 현실적인 주제의 이야기를 고안하고 그 위에 실제로 메주공장을 운영했던 자신의 가족사를 얹으니 영화가 씨줄날줄로 튼튼해질 수밖에 없다. 흔히 독립영화라고 하면 습작처럼 어둡고 거친 화면과 녹음, 허술한 내러티브 등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선입견을 가볍게 배신한다. 물론 돈이 없어서 조명을 거의 쓰지 못한 듯한 촬영 상태는 좀 아쉽지만 능수능란한 화술과 시제를 적절히 뒤섞은 편집은 165분 동안 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대사들도 훌륭하다.



정철은 자신과 동료들의 돈을 떼어먹고 서울로 도망간 공사장 십장의 집을 찾아간다. 밖에서 두드려도 문을 열어주지 않고 아이 혼자 라면을 끓여먹으려 하고 있던 집 창문을 부수고 들어간 정철 일행은 그 집 현관 철문을 떼어들고 나온다. “현관문 다시 찾으려면 아빠한테 돈 들고 오라고 해.”라는 말을 어린 아이에게 남기고. 잔인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영화는 정철을 멋진 남자나 정의로운 사람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저 살아가기 위해 뭐든 다 하는 무색무취한 사람으로 보여줄 뿐이다. 툭하면 가출을 하고 고속터미널에서 아무 남자나 끌고 가 섹스를 한 뒤 돌아와서는 자해를 하는 누나를 어쩔 것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빠를 찾고 싶다며 교회 헌금통에서 훔친 돈과 명훈이 알려준 쪽지만 들고 무작정 서울의 공장까지 올라간 조카 하나를 어쩔 것인가. 돈 떼어먹은 십장과 내통했다고 자신을 찾아와 린치를 가하는 동료들이나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된장공장 기존 노동자들의 질시를 어쩔 것인가.



이런 이야기일수록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관건인데, 마침 이 영화는 정철을 연기하는 박정범은 물론 그의 바보 친구을 연기하는 박명훈의 연기도 믿음직하다. 연극판에서 이미 검증된 배우 이승연의 열연 또한 눈이 부시다. 나는 동생에게 붙잡혀 트럭을 타고 가다가 갑자기 트럭문을 열고 그냥 도로로 굴러떨어지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아마 정철의 누나가 대학로에서 오디션 보는 장면에서는 거의 모든 관객들이 전율을 느껐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연기가 처음이라는 하나 역의 신햇빛과 메주공장 사장딸 역의 박희본까지 모두 제 역할에 충실하고도 남는다. 다만 메주공장 사장의 연기만 조금 어색했는데, 알고보니 그 분은 감독의 친아버지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시종일관 무겁고 답답한 것만은 아니다. 간간히 유머코드도 있고(‘우리 같이 잤잖아’,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공장에서 함께 밥을 나눠먹는 메주공장 노동자들의 인간적인 면모들도 눈물겹지만 트로트적인 감성이 깔려있다. 난 특히 뭐든 곁에서 도움이 되고싶다는 명훈에게 “그럼 수퍼에 들어가서 저 무우 하나 훔쳐봐”라고 말한 뒤 그렇게 못하겠다는 명훈에게 시범을 보이려 일부러 무우를 훔쳐나와 땅바닥에 패대기 치던 정철의 모습과, 술에 취해 버스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여자친구 진영을 찾아가 행패부리던 장면이 특히 좋았다. 해가 진 저녁, 터미널에 멈춰있는 고속버스 안에서 손님들과 함께 조하문의 ‘이밤을 다시 한 번’을 부르던 진영은 갑자기 버스 안으로 들어온 정철 때문에 당황한다. 그리고 곧 손님들에게 린치를 당하는 정철. 취해서 저항도 제대로 못한다. 그리고 그런 정철을 감싸는 진영. 너무 가난하고 힘들면 사랑하기도 힘들다. 가슴 아픈 장면이지만 따스한 장면이기도 하다.



버스 안에서 주인공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정류장이 다가오자 좌석으로 허리를 낮추어 몸을 숨기던 [무산일기]의 마지막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툭하면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던 절실한 대사가 잊혀지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도 메주공장 사장이 “자네, 닭 잡을 수 있나?”라고 물었을 때 박정범의 “할 수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장면은 기시감처럼 튀어나와 나의 뇌리에 박혔다. 이것은 뭐든 할 수 있다고 얘기하지 않으면 당장 밥을 굶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남들의 일자리라도 빼앗지 않으면 가족들을 건사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답이 보이지 않는 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비참한 이야기 속에서도 희망의 빛은 피어난다. 가출한 누나를 위해 조카 하나와 함께 집앞에 가로등을 설치하는 장면이 그렇고 한밤중에 철문을 짊어지고 가서 다시 아이에게 현관문을 달아주는 정철의 전기드라이버 소리가 그렇다. 165분 내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던 영화였고 불이 켜지고 일어나면서 꼭 다시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영화였다. 지금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강추한다. 놓치지 마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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