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신문이나 TV뉴스에 부부 사기단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오르내렸습니다만 2021년 이 한여름에 저희는 부부 사기단 대신 '부부 리뷰단'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출판그룹 메디치미디어가 저와 아내 윤혜자에게 정기적으로 책 리뷰를 연재할 것을 권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달에는 첫 달이라 서로 다른 책을 읽고 리뷰를 썼지만 (저는 권은중의 『볼로냐, 붉은 길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아내 윤혜자는 리처드 J, 라자루스의 『지구를 살린 위대한 판결』) 다음 달부터는 같은 책을 읽고 각자 리뷰를 쓰기로 했습니다.

메디치미디어로서도 새로운 시도겠지만 저희도 덕분에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한 달에 두 권 이상 꼼꼼히 읽게 되었습니다. 재밌고 즐거운 프로젝트가 될 것 같습니다.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부 사기단보다 백 배 낫잖아요, 부부 리뷰단. 

https://brunch.co.kr/@medicibooks/40 ​이게 두 번째. 

https://brunch.co.kr/@medicibooks/37 이게 첫 번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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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제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티셔츠를 걷어 올린 뒤 제 가슴을 감시카메라 앞에 들이대는 소녀가 있다. 이게 무슨 또라이 같은 짓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오른쪽에 핑크색으로 꽥 채운 카피가 보인다. 'SMART MAY HAVE THE BRAINS, BUT STUPID HAS THE BALLS.' 똑똑한 사람들은 두뇌를 가지고 있지만 멍청한 애들은 배짱이 있다는 뜻이다. 가뜩이나 그림도 도발적인데 카피에서 배짱을 뜻하는 속어 'Balls'를 여자 아이 사진에 붙인 건 더 짓꿏은 대목이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를 보면 BE STUPID, 즉 멍청해지라는 브랜드 슬로건이 보인다. 청바지의 품질이나 만듦새보다는 그 옷에 들어 있는 반항정신을 전파하는 데 힘쓰는 이탈리아의 패션 브랜드 디젤(DIESEL)의 광고 캠페인이다.

광고회사에서 카피를 쓰고 아이디어를 내는 동안 정말 많은 광고들을 봐왔겠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거 딱 하나만 꼽아보라고 하면 나는 국내외를 통틀어 이 캠페인이다. 다들 스마트를 외치는 시대에 도리어 멍청해지자고 외치는 청개구리들이라니. 이 광고를 처음 보는 순간 나는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떠올렸다. 뉴욕 월가에서 필경사로 일하다가 어느 날부턴가 모든 업무를 거부하고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던 어이없는 남자. 영문과를 다니는 동안 전공과목에 별 흥미를 느끼지 멋했던 나도 이 소설을 공부할 때만큼은 너무나 재밌고 가슴이 찡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우리를 가르쳤던 채수환 교수님은 정말 이 소설의 광팬이라서 한 학기 내내 바틀비 얘기만 했다. 히피들도 바틀비의 추종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주어지는 음식조차 거부하고 외롭게 죽어갔지만 수동적인 반항아 바틀비는 지금도 아웃사이더들의 가슴속에 살아서 커다란 울림을 주고 있으니까.

생각해 보면 나도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계속 다니는 게 백 번 현명한 일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대학원도 다니고 경력 관리도 좀 더 신경 써서 남들처럼 승진을 꿈꾸거나 야심 차게 독립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성공이란 '인정받는 광고인'이 되는 것인가 여러 차례 자문해 보았지만 그때마다 내 속에선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마음이 시키지 않는 일을 계속하며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두렵지만 다른 길을 택했다. 부부가 둘 다 회사를 그만두고 놀면서 한옥이나 고치고 있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무모하고 어리석게 비칠까 봐 겁이 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직은 모른다. 요기 베라의 그 유명한 말처럼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지금 밖에는 엄청난 장맛비가 내리고 있다. 코로나 19 때문에 누구나 상상하지  못하던 어려움을 똑같이 겪는 시대가 되었다. 어차피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니 조금 더 이런저런  궁리를 해보며 즐겁게 버텨볼 생각이다. 아내와 나는 이미 스마트를 끄고 '스튜피드' 스위치를 올린 사람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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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산 

내가 아직 광고 프로덕션에 다니던 때였다. 화재 예방 공익광고 아이디어로 가져온 카피라이터 박수의 안이 좋았다. 담배꽁초 버리기, 비상구 짐으로 막기, 소방도로에 주차하기 등 대형 화재를 유발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화재>라는 영화가 곧 개봉한다는 '가짜 예고편'이 광고의 테마였는데 마지막에 "영화에는 예고편이 있지만  화재에는 예고편이 없습니다"라는 카피로 뒤통수를 치는 아이디어였다. 우리는 회의실에서 영화 예고편이니까 진짜 영화배우가 출연하면 당선 확률이 더 높아질 것 같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누군가 "실장님, 박호산하고 친하다면서요? 한 번 부탁해 봐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동네 선후배 사이라는 다소 싱거운 인연으로 친하게 된 배우 박호산에게 카톡 메시지를 넣었다. 화재예방 공익광고 아이디어를 냈는데 너를 모델로 해도 되겠냐고. 혹시 우리 시안이 당선되어 광고를 찍게 되면 모델비도 좀 싸게 해 줄 수 있겠냐고. 곧 호산에게서 좋다는 답장이 왔다. 공익광고의 취지에 동감한다는 것이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이라는 드라마로 한창 잘 나가던 시절인데도 선뜻 내 부탁을 들어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일이 잘 되려고 그랬는지 내가 프리젠터로 나서 설명한 시안은 그 어느 때보다 코바코 심사위원들에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고 결국 당선작으로 결정이 되어버렸다. 나는 퇴근을 하는 길에 기쁜 마음으로 호산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호산은 너무 잘됐다고 하면서 방금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에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이 왔다는 말을 했다. 경사가 겹친 것이다. 그런데 호산은 "오늘은 너무 좋은 날이지만 너무 미안한 날이기도 해서 마음 놓고 기뻐할 수가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호산이 맡은 역은 원래 다른 배우가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촬영 직전에 '미투 논란'이 터지는 바람에 캐스팅이 전격 취소된 것이었다. 선배에게 생긴 불미스러운 일을 딛고 들어가게 된 자리라 너무 면목이 없다는 호산의 말에 나도 더 이상 흥분할 수는 없었다.  

[나의 아저씨]에서 이선균과 송새벽의 형으로 나온 박호산은 어리숙하면서도 인간적인 면을 가진 '박상훈' 역에 딱 맞는 배우였다. 박호산은 정말 '후계동'에서 조기축구를 할 것처럼 생겼고 사업 실패로 이혼을 당하고 '형제청소방'을 운영할 것 같은 표정의 남자가 되었고 저녁이면 동네 술집 '정희네'에 가서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박호산은 주인공이 아니면서도 드라마 안에서 펄펄 날았다. 촬영 초기에 아이유와 악수를 했다고 인스타그램에 자랑을 하던 박호산은 드라마가 끝난 뒤엔 어느덧 같은 같은 연예인들이 악수를 하고 싶어 하는 배우가 되었다. 

박호산은 주인공이 아니면서도 드라마 안에서 펄펄 날았다.

아이유 

평론가 신형철은 자신의 책 [느낌의 공동체] 서문에 “삶의 어느 법정에서든 김민정 시인을 위해 증언할 것이다”라는 글을 썼다. 자신의 책을 만들어준 편집자이자 문학적 동료 김민정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찬사가 아닐까 한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나오는 가수 아이유, 아니 연기자 이지은을 지켜본 사람들도 아마 이와 비슷한 심정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우리 집에서는 오래된 농담이 있다. "아이유가 싸가지가 없다고? 없으면 어때? 저렇게 노래를 잘하는데!" 물론 그 '싸가지 없음'이라는 게 연예인 특유의 방어기제 덕분에 생긴 아주 편파적인 평판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이유의 광팬인 아내는 아마도 이제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아이유가 무슨 잘못을 해도 나는 아이유 편이 될 거야. 저렇게 연기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는데, 어떻게 착한 것까지 바라?" 

비록 정당방위이긴 하지만 살인자였다는 과거를 가지고 있고, 자신에게 남은 것은 병든 할머니와 부담스러운 사채빚뿐인 스물한 살의 여자 아이 이지안. 그녀는 건설회사 계약직 사원으로 일하며 번 돈을 모두 사채업자에게 바치느라 저녁이면 다른 아르바이트를 또 뛰어야 할 정도로 퍽퍽한 인생을 살아간다. 입사지원서 특기란에 '달리기'라고 쓸 정도로 내세울 것 하나 없는 계약직이기에 다른 직원들과 말을 섞지도 않고 같이 밥을 먹지도 않는다. 그런데 어떤 사건을 계기로 박동훈이 그녀를 알아보고 손을 내민다. 그리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잘해준다. 평생 처음으로 사심 없는 친절과 관심을 받게 된 이지안은 어리둥절하다. 빚 갚을 기회를 잡느라 박동훈에게 도청장치를 심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데도 그에겐 불온한 기운이 감지되지 않는다. 대신 무능한 형제들 틈에서 멀쩡한 척해야 하고 아내에게 배신당하고 학교 후배인 사장 측으로부터 누명을 써 축출당할 위기에 놓인 피곤한 사십 대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많이 울었는데 대부분 이지안 때문이었다. 그녀가 "밥 좀 사주죠. 배고픈데."라고 박동훈에게 손을 내밀 때, 자신이 한 짓이 들통난 걸 다 알고 미안하다며 울부짖을 때, 인사평가회에 증인으로 나가서 사람 좋아하는 걸 왜 비웃냐고 따질 때 나는 하릴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이유는 열연을 하지 않음으로써 열연을 하는 아이러니를 완성했는데, 이는 그녀가 드라마의 '맥락'을 이해하지 않으면 부라능한 연기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그냥 대사만 달달 외워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인간의 쓸쓸함에 대하여, 따뜻함이 주는 에너지에 대해여, 인생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는 것을 그녀는 어떻게 한 방에 다 알았을까 궁금했지만 결국 두 손을 들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알고 있는 게 분명했으니까. 그렇지 않고는 그런 억양, 눈빛, 몸짓이 나올 수 없으니까. 노래 잘하고 곡도 잘 만들던 가수 아이유는 그렇게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를 통해 연기자가 되었다. 

아이유는 열연을 하지 않음으로써 열연을 하는 아이러니를 완성했다.

3

나 

TV의 예고편은 물론 동네 사는 배우 박호산을 통해서도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가 방영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작가가 [또! 오해영]을 쓴 사람이라 볼 만할 것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그런데 회사가 너무 바빴다. 허구한 날 야근을 하느라 TV드라마를 챙길 시간이 없었는데도 어쩌다 일찍 들어오는 날이면 아내와 함께 드라마를 지켜보다가 가슴이 철렁하는 대사들이 나올 때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박호산이 청소하다가 무릎 꿇는 장면에서 울었고 정희가 유라에게 '불행 배틀'엔 자신이 있다고 하며 술잔을 높이 들 때도 눈물이 났고 이지안이 박동훈에게 "아저씨가 정말로 행복했으면 했어요."라고 흐느낄 때도 같이 울었다. 그 중에도 아이유의 무미건조한 대사는 백미였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나의 아저씨 아이유 사이다 대사들'이라 검색하면 그녀가 얼마나 극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연기를 하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존댓말을 잘 하지 않는 이지안이 마치 혼잣말로 묻듯 "다들 그렇지 않나...?" 식으로 상대방에게 던지는 대사 처리가 너무 좋았다. 이지안이 가진 총기와 비뚤어짐과 두려움이 동시다발로 느껴지는 이 대사 구사 방식은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여직원이 "너 짤리고 싶냐?"라고 묻자 회의실 의자에 등을 기대며 "같이 짤리자."고 일갈하고는 여직원의 사내 불륜 사실을 들이미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드라마 마지막 회가 방영되는 날 배탈이 나서 저녁도 못 먹고 들어온 나를 보고 아내는 "나의 아저씨 마지막 회는 소주를 한 잔 하며 봐야 하는데 남편이 저 모양이니. 아이고, 내가 못 산다." 라면서 화를 냈다. 그렇게 나의 아저씨가 끝나고 여전힌 나날들이 계속되던 어느 날 나는 대책 없이 퇴직을 했고, 제주도에 내려가서 한 달을 혼자 살아보기도 했고, 느닷없이 한옥집을 사서 고치고 이사하느라 몇 달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가 되었다. 한옥으로 이사를 와 집안 정리를 하고 있던 때쯤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에 '나의 아저씨'가 올라와 뒤늦게 정주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가끔 보면서도 가슴이 뭉클뭉클했는데 이걸 처음부터 다시 보면 또 얼마나 울어야 하나, 하고 망설이고 있다가 이사 비용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심란해하던 어느 날 밤에 '나의 아저씨 정주행'을 시작했다. 처음엔 시큰둥하던 아내도 나를 따라 밤을 새 가면서 드라마에 몰두했다. 우리는 넋을 읽고 TV를 들여다보며 웃다가 한숨을 쉬다가 눈물을 글썽이다가 서로를 쳐다보고 멋쩍게 웃었다. 

우리가 [나의 아저씨]를 보면서 눈물을 흘린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당연한 일의 소중함을 너무 오래 잊고 있었는데 박동훈과 이지안이 그걸 일깨워주었기 때문 아닐까.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사랑은 불꽃처럼 타오르다가도 금방 식을 수도 있지만 좋아하는 것은 누군가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보고 그 사람의 마음을 가슴속에 묻어둔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묻어둔 사람이나 누군가의 가슴에 묻힌 경험이 잇는 사람은 결코 약하지 않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엔 황량한 바람과 먼지가 남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흐뭇한 기억으로 남아 남은 시간을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가 된다. "인생도 내력과 외력의 싸움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버티는 거야."라는 박동훈의 대사는 이지안이 아니라 자신에게 했던 말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내력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혼자가 아니라 자신을 좋아하는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이 드라마는 인생의 의미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셸부르의 우산] 이후로 가장 쿨했던 마지막 동훈과 지안의 만남은 이지안 같은 애도 잘 살아가는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 같아서 또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드라마는 인생의 의미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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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요즘 아프다. 중이염에 이어 감기까지 낫질 않아서 며칠째 고생이다. 어제도 낮 공연을 본 뒤 이른 저녁을 함께 먹고 들어와 자리에 누운 아내가 여덟 시도 안 돼 그냥 잠이 들었길래 쓰고 있던 안경을 벗겨주고 불을 껐다. 아내가 잠든 걸 확인하고 혼자 서재에서 책을 좀 읽다가 열 시쯤 나도 잠이 들었는데 새벽 두 시에 오줌이 마려워서 깼다. 아내는 이미 깨서 깜깜한 데 누워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자리에 누운 내게 아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나랑 놀자." 

불을 켜고 TV를 켰다. <사랑의 불시착>이라는 손예진 현빈 주연의 드라마 재방송 1회가 끝나가고 있었다. 음, 이 정도면 술 마시며 욕하기 좋은 드라마인 것 같은데. 술 좀 사올게. 나는 갑자기 기운이 뻗쳐서 옷을 되는 대로 꿰입고 왕복 20분 거리인 세븐일레븐으로 달려갔다. 술 코너에 가서 조니워커와 화요를 쳐다보다가 일단 훈제닭다리와 즉석오뎅을 안주로 사서 카운터에 올려놓고 다시 술 코너의 조니워커 레드와 화요 사이에서 고민을 했다. 결국 두 병을 다 샀다. 술병을 카운터로 가져가자 "결정 하셨어요?"라고 물으며 편의점 사장님이 웃으셨다. 새벽에 별별 손님들이 다 오겠지, 라는 생각이 들어 "네."하고 짧게만 대답하고 얼른 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다시 집으로 올라오니 아내는 시금치와 방울토마토, 굴을 함께 볶은 안주를 해놓고 있었고  TV에서는 손예진이 북한 어딘가 산에서 낙하산줄에 매달려 무전기로 투덜대고 있었으며 밑에선 현빈이 권총을 들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드라마군. 나는 "조니워커와 화요 둘 다 마시고 싶어서 할 수 없이 두 병을 다 사왔어." 라는 한심한 변명을 지나가는 말처럼 흘리며 비닐봉투를 열었다. 아, 남북한을 소재로 한 로맨틱 코미디로구나, 하면서 휴대폰으로 작가 이름을 찾아보니 [별에서 온 그대]를 쓴 박지은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손예진의 연기를 싫어하는 우리는 괜히 드라마 욕을 마구 하면서 술을 마셨다. 아내는 반 잔씩 따르고 나는 한 잔씩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한꺼번에 마셔보니 조니워커 레드보다 화요가 더 나았다. 술을 마시고 싶어 마신 게 아니었다. 드라마 욕을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일요일 밤이 무서워서 그런 것이었다. 우린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엔 이토록 심란해하진 않는다. 아무래도 아내와 나는 조삼모사형 인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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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나사를 너무 조이고 살아왔다. 초등학교 때 남들과 똑같이 조여져 있던 나사를 중고등학교 때 시도 쓰고 소설도 읽고 하면서 조금씩 풀기 시작했는데  대학 들어가서는 술 담배를 너무 해서 그랬는지 나사가 계속 왼쪽으로만 돌아갔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되자 군대를 갔다. 군대에서는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선임과 간부들이 차례로 달려들어 십자드라이버로 몸과 마음의 나사를 꽉꽉 조여주었다. 지금도 그 분들의 친절함을 잊지 못한다.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한 뒤에도 '너는 현실감이 떨어진다'면서 선배와 동료, 경영진까지 시시때때로 기름을 치고 나사를 조이고 태엽을 감아 주었다. 나사를 꽉 조일수록 안정감이 생겨서 좋긴 한데 벽이나 바닥에 딱 붙어야 하기 때문에 시야가 좁아지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발이 아프고 몸이 갑갑했지만 세상이 그런 것이려니 하며 살았다. 

 

어느날 아침 일어나 보니 두 발이 땅에 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수십 년 넘게 착 달라붙어 살았는데 이젠 나사 좀 풀고 살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지난 5월 말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나사를 헐겁게 했더니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심신이 덜컹거렸다. 아내는 원래 그런 거니 너무 놀라지 말라며 웃었지만 그녀의 웃음을 순진하게 다 믿을 순 없었다. 바지 주머니에 몰래 넣어 두었던 십자드라이버 하나를 손으로 만지작거려 보았다. 아직은 이걸 꺼낼 때가 아니지. 그동안 박아 놓은 세월이 있으니 쉽게 나사못이 빠지진  않을 거야. 당분간은 이렇게 흔들흔들하며 가보자. 내일부터는 혼자 제주로 여행을 떠난다. 바닷바람이 세찰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나사를 조일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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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행복을 간절히 원한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면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아직 못 봤다. 남부러울 것 없는 엘리트가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는 것도 보았고 SNS에 시크한 척 멋진 일상을 올리거나 몇 달 간의 해외여행을 거의 실시간으로 중계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엄친아도 알고 보면 그 자랑이 허세로 밝혀지기도 한다. 나는 궁금했다. 행복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는데. 알고 보면 행복이야말로 소박한 일상에 있다던데. 그래서 파랑새라고 하지 않던가. 실컷 바깥에서 찾아 헤매다 지쳐 들어온 주인공이 집에서 발견한 파랑새. 그런데 그런 동서고금의 이야기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왜 사람들은 좀처럼 행복해지지 못하는 것일까.

결혼 초기부터 4년 간 살았던 전세 아파트를 떠나 성북동 꼭대기에 있는 아주 작은 집으로 들어오면서 드디어 나는 행복한 삶에 접어들게 되었다...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적어도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에 대해서는 좀 알게 된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행복해지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사람, 공간, 그리고 시간. 즉, 나를 이해해주고 무조건 응원하는 사람과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에서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때 행복은 시작된다. 물론 이건 완성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아내와 나는 아파트를 떠나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하기로 마음먹은 뒤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일단 우리가 가진 돈이 턱없이 부족했고 은행은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에 대해서는 몇 배나 까다로운 대출조건을 내세웠다. 워낙 주택금융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지만 요즘 사람들이 대부분 아파트에 살다 보니 아파트 이외의 집 거래는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출발부터 차별이 주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막막해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성북동 언덕 꼭대기 골목 끝에 있는 작은 집을 하나 발견했고 친한 친구들의 금전적 도움으로 며칠 만에 계약을 할 수 있었다. 집주인마저 너그러운 분을 만나 이사 전에 두 달간 낡은 집을 수리해서 들어올 수 있는 특전도 받았다. 대출금을 매우 많이 끼긴 했지만 뒷마당까지 있는 어엿한 단독주택의 소유자가 된 것이었다.

이사를 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아내는 내게 집 이름을 하나 지어보라고 했다. 광고회사에서 평생 남의 회사 걱정이나 하고 살았으니 이젠 자신을 위해서도 뭔가 아이디어를 내보라는 것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성북동소행성이라는 이름을 생각해냈다. '작지만 행복한 별'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당장 행복해질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삶의 방향성이 좀 분명해지는 것 같아서 기뻤다.

우선 아침이 달라졌다. 전에는 거리를 통과하는 차 소리나 두런거리는 이웃 사람들이 내는 생활소음에 잠을 깼다면 성북동에서는 요란한 새소리와 함께 날이 밝았다. 비록 전철역에서 걸어 올라오려면(아내와 나는 차가 없다) 땀을 뻘뻘 흘려야 하는 언덕 꼭대기에 살지만 그 덕분에 차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 장점을 가지게 되었다. 새소리, 바람소리처럼 자연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스트레스가 없었다. 가끔 아내가 "저놈의 새가 미쳤나. 왜 새벽부터 울어대고 난리야?"라고 투덜대는 경우는 있지만 그게 진짜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뿌듯해하는 마음의 굴곡된 표현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회사가 끝나면 대부분은 곧장 집으로 왔다. 집에서 아내와 보내는 시간이 밖에서 직장 동료나 친구들과 놀거나 술 마시는 시간보다 좋았다. 사람들이 보고 싶으면 집으로 초대를 했다. 집은 작지만 옥상에 올라가면 가깝게는 광화문빌딩부터 멀게는 남산타워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야경이 펼쳐졌다. 자주 열지는 못하지만 옥상파티는 어느덧 성북동소행성의 '계절 인기 품목'이 되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건 집에서 한적하게 음악을 켜놓고 책을 읽거나 작은 볼륨으로 TV를 틀어놓고 아내와 같이 술을 마시는 시간이었다. 그중에서도 새벽에 혼자 일어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시간을 갖는 건 내가 가진 행복의 크기를 늘리는 일이었다.

그런 내가 어느 날 오후에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아무래도 회사를 그만두어야겠어."라고 말했다. 물론 아무런 대책 없이 한 소리였고 그녀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그래. 잘 생각했어. 당신이 오죽하면 이러겠어. 당신 회사 오래 다녔잖아."라고 말해주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아내와 통화를 끝낸 후 나는 정식으로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밝혔고 사람들은 회사를 그만 두면 당장 뭘 할 거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나는 "아직 나도 잘 모르겠어.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대답해서 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저 자식, 참 속 편한 소리 하고 있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면 바보라고 생각했거나. 바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어차피 그들이 내 인생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닌데.

그리고 다행히 우리 집엔 바보가 또 하나 있다. 혼자서 바보라면 외롭겠지만 같이 사는 집에 바보가 하나 더 있으면 무서운 게 별로 없다. 더구나 그 바보는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고 내 이야기에 무조건 동의하는 사람이니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그래도 뭔가 바보 같지만 신나는 일을 해보고 싶다. 세상에는 아직 사람들이 모르는 두 개의 소행성이 있다. 생떽쥐베리가 발견한 소행성 B612 엔 어린 왕자가 살고 서울에 있는 성북동소행성엔 대책 없이 즐거운 바보 커플이 산다는 점이 조금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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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없습니다)

영화제 특수'라는 말이 있다. 깐느나 베니스영화제 등지에서 큰 상을 타고나면 국내에서 반짝, 하고 흥행이 되었다가 바로 꺼지는 현상을 일컫는 용어다. 그런데 그런 영화들은 대부분 흥행에 크게 성공하지는 못한다. 상을 탄 영화들은 대부분 심각한 주제의식이나 난해한 미장센을 가지고 있어서 일반 관객들에겐 지루하게 느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어제 개봉한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의 [기생충]도 그런 영화일까? 결론적으로,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가족 구성원 전원이 백수인 집이 있다. 반지하에 살면서 휴대폰 와이파이마저도 윗집 것을 몰래 따서 쓰는 기택과 기우, 기정(이 집은 이상하게도 아버지와 아들 딸이 다 기 자 돌림이다) 가족은 어떻게 남을 속여서라도 돈을 좀 벌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생각에 온 가족이 똘똘 뭉쳐 모종의 사기극을 꾸민다. 이 과정에서 아들 딸들은 말끝마다 육두문자를 남발하지만 그걸 듣는 부모들은 태연하다. 자기들도 똑같이 숨쉬듯 쌍욕을 입에 달고 사니까. 그러나 박 사장이 사는 집을 공략하기 위해 캐릭터들을 만들고 거기에 맞는 연극 대사 연습을 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슬며시 웃음이 나오다가 결국은 이 사람들이 거사에 성공했으면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관객이 주인공들에게 자연스럽게 동화가 되는 것이다.

스토리 누설은 여기까지다. 이 영화는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전반부를 제외하면 가는 곳마다 스포일러가 터지는 부비트랩 같은 영화니까. 대신 배우들 얘기를 해보자. 송강호야 새삼 말하면 입만 아픈 '연기의 신'이지만 조여정이 이렇게 연기를 잘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감독의 조련에 의해 연기력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나 하는 건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 이후 참 오랜만인 것 같다. 그리고 젊은 박소담이 이렇게 연기를 잘 하는 배우였는지 누가 알았단 말인가. 대사를 구사하는 호흡이나 목소리는 물론 순간을 제압하는 카리스마도 장난이 아니다. 최우식, 이정은의 연기도 시종일관 너무나 뛰어나다. 결국 어느 정도 선의 연기를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박 사장 역의 이선균이 가장 처진다.

첫 장면에 등장하는 반지하 창에서 바라 본 1층 거리 풍경은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기에 손색이 없다. '기생충'이라는 제목이나 해외에서의 반응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 영화는 계급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은 켄 로치가 아니고 봉준호다. 어떤 심각한 얘기를 하더라도 유머와 재미를 놓치지 않는 그가 이번이라고 그 미덕을 포기할 리가 없다. 박 사장과 그의 부인 연교에게 접근하는 기태 가족의 속임수들은 아이디어와 능청이 넘치고 계급 간의 경멸을 표현하는 데는 '반지하'보다도 '냄새'가 가장 치욕적이라는 통찰도 놓치지 않는다. 박 사장의 집으로 들어간 후에도 봉준호는 놀라운 구성과 연출로 관객이 딴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는다. '봉테일'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디테일에서도 감탄을 금할 수 없다(단 몇 장면밖에 나오지 않는 체육관 씬의 정교함을 보라!). 카메라, 음악 등등 모두 베테랑의 숨결이 느껴지는데 특히 정재일의 클래식 음악은 영화의 품격을 더욱 높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와 함께 옆자리에서 영화를 본 아내는 영화가 너무 슬프다고 하며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박사장 가족과 그의 집에 들러붙어 생활을 영위하려는 기택의 가족 중 진짜 기생충은 누구일까, 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사운드가 좋은 극장에서 한 번 더 봐야겠다고 했다. 물론 나도 한 번 더 보고 싶어졌다. 이렇게 분명한 주제의식을 가지고도 유머와 공포와 비극미를 고르게 가지고 있는 영화는 전체 내용을 다 파악하고 보는 재미 또한 각별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기자는 [기생충]의 황금종려사 수상은 한국 영화 백년의 쾌거라고도 하지만 내 생각에 이건 한국 영화 뿐 아니라 세계 영화의 쾌거다. 이런 걸작은 우리나라는 물론 지구촌 어디에서도 쉽게 나온지 못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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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마지막 퇴근하는 저의 뒷모습을 도촬했습니다. 

 


첫 차는 아반떼였다.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광고대행사를 다니던 시절에 만기가 된 작은 적금을  찾아 그 차를 샀다. 이유는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서'였지만 차를 꾸미는 데에 도통 관심이 없고 카오디오도 시쿤둥한데다가 길눈도 엄청 어두운 나는 출퇴근 이외의 용도로 차를 쓰는 일이 드물었고 술을 좋아하는 바람에 차는 늘 주차장에 혼자 서 있는 일이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데이트할 때 차가 필수라고 하는데 나는 유독 술과 담배를 좋아하는 여자애들만 좋아해서 그런지 도통 내 차에 여자를 태워본 기억이 없다. 나만의 공간은커녕 아침에 일어나면 '가만, 내가 어젯밤에 차를 어디다 뒀더라?'라고 기억을 떠올리기 바쁘기에 결국 2년 만에 차를 팔아버리고 다시 뚜벅이가 되었다.

대행사를 그만두고 작은 크리에이티브 브띠끄에 다니던 시절, 차를 몹시 좋아해서 별명이 '차돌이'인 친구가 차를 바꾸면서 자신이 타던 차를 나에게 넘겼는데 차종은 랜드로버 프리랜더였다. 졸지에 남들이 타고 싶어한다는 외제차를 갖게 된 것이다. 당시에 네비게이션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던 시기였는데 내 차엔 무슨 전자장치가 숨어있는 바람에 수신 방해를 심하게 받았다. 길치에 가까운 방향감각을 타고난 나는 결정적일 때마다 내비게이션 작동이 멈추는 바람에 길바닥에서 곤욕을 치르곤 했다. 차를 정비하는 것도 서툴러서 이전에 내 차를 타던 친구가 가끔 찾아와 혀를 끌끌 차며 정비소에 데려다주곤 했다. 결국 그 친구와 함께 운영하던 사무실을 접으며 차를 팔아버리고 나는 다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자동차 없이 지냈다. 뒤늦게 만난 아내도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고 또 걷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우리 집에 자가용 없는 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운전을 전혀 하지 않는 건 좀 아쉽다고 말했다. 나는 운전을 쉰지 십 년이 훨씬 넘었고 이전에도 남의 차는 거의 운전하지 않았으므로 렌트카를 덥썩 빌려 운전하는 게 왠지 생소하고 겁이 났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 시내 주행 연수를 나흘 정도 받아보았다. 생각보다 운전이 어렵지 않았고 예전에 운전하던 감각도 되살아났다. 자신감이 붙은 나는 아내가 없던 어느 주말, 쏘카를 불러서 빨랫감을 싣고 아리랑씨네센터 맞은편에 있는 빨래방으로 가서 빨래를 했다. 평소엔 버스를 타고 가던 곳이었는데 빨래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이럴 땐 정말 차가 있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쏘카를 이용하게 된 시기와 회사를 그만두게 된 시기가 우연히 겹쳤다.

나는 사회 생할을 시작할 때부터 카피라이터로 일했고 지금까지 계속 광고회사에만 다녔다. 작은 사무실도 운영해 보았고 프리랜서로도 일해 봤다. 광고는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를 쉽고 흥미롭게 표현해서 소비자들에게 전달하는 게 관건인데 결과물을 보면 쉬워보여도 막상 과정은 늘 어렵고 막막했다. 게다가 나는 성격상 일을 맡으면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루 종일 노심초사하는 편이다. 당연히 다른 개인적인 일엔 소홀할 수밖에 없고 저녁에 초주검이 되어 귀가하면 날카로워진 신경을 다스리느라 혼자라도 술을 마시고 잠드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아내는 안주 없이는 술을 못 마시는 나의 음주습관 덕분에 자신의 몸무게도 십 킬로그램이나 늘었다고 투덜댔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지적한 대로 자본주의는 '많이 벌었으니 이제 그만 하면 됐다'라고 말하는 법이 없었다. 업계는 늘 위기였고 다니는 회사마다 사정이 안 좋았다. 갑을관계가 분명한 업계의 속성 때문에 불합리한 일도 많았다.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야 하는 스트레스, 촉박한 스케줄, 원래 의도대로 나오지 않는 결과물 등 괴로운 일이 많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점점 자존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힘든 건 그 동안의 공력이 있어 그런대로 참을 만 했지만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들은 켜켜이 쌓여 그대로 마음 속 상처가 되었다. 전혀 행복하지 않았고 이대로 계속 회사를 다니면 계속 불행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한 달 전 회사를 그만 두겠다고 결심했다. 아내에게 제일 먼저 말했더니 '당신이 오죽했으면 이러겠어'라며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자신도 속으로는 무척 걱정이 되겠지만 나한테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고 했다. 마지막 출근을 하는 날 나의 뒷모습이 유난히 가벼워 보인다며 도촬을 하기도 했다. 마지막 출근을 하는 날 나의 뒷모습이 유난히 가벼워 보인다며 도촬을 하기도 했다.  사진에 얽힌 사연을 써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려도 되느냐고 묻길래 아직은  된다고 했다. 공식적으로 얘기를 하지 않은 상태라 대행사나 광고주 분들이 알면  되기 때문이었다. 퇴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리는 법이라고 했다. 손에 쥔 공을 놓아야 더 큰 공을 잡을 수 있다는 말도 했다. 어쩌면 비슷한 시기에 다시 시작하게 된 운전과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퇴직을 선언한 후 어느 일요일, 쏘카를 빌려 논현동에 있는 회사로 가서 개인짐을 챙겨오면서 '남이 운전하는 차만 타다가 내가 운전하는 게 이렇게 다르구나' 라는 걸 새삼 느꼈다. 앞으로의 삶도 그럴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이 나는 즐겁고 뿌듯했다. 비록 작은 차라도 내가 운전하는 삶이 시작되는 것이니까. 아내를 태우고 쏘카를 반납하러 가는 길에 내가 그 동안 운전을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운전이 워낙 미숙하다 보니 나 혼자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 죽으면 몰라도 같이 타고 가다가 당신까지 죽게 만들까봐 무서워서...그 소리를 듣던 아내는 '혼자 죽는 게 걱정이지 둘이 같이 죽는 건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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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딱 한 장

혜자 2019. 5. 25. 11:19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행사가 뭐 없을까 하다 생각해 낸 것이 '결혼기념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사진 찍기' 놀이였습니다. 첫 해는 우연히 일찍 눈을 떴으나 일어나기는 싫고 해서 무심코 사진을 찍었는데 전날 먹고 마신 술과 안주에 팅팅 부어터진 얼굴들이 재밌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해도 계속 찍다보니 어느덧 여섯 해가 지났습니다. 저희 부부는 해마다 이맘때면 여행을 하기 때문에 올해는 부산의 한 호텔에서 문제의 베드씬을 찍게 되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그 동안 일 년에 딱 한 장씩 찍어서 올린 사진들을 바라보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올해는 좀 근엄하게 찍어볼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결국 또 깔깔깔 웃으면서 찍게 되었습니다. 해마다 5월이면 주책 없는 커플사진을 목도하시느라 괴로워하실 만장하신 친구 여러분, 죄송합니다. 오늘 하루만 너그럽게 봐주세요. 내일부턴 정말 안 이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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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는 5월에 만나 이 년 후 5월에 결혼식을 했고 또 내 생일도 5월에 있는데 이들이 나란히 이어져 있는 까닭에 해마다 오월이면 함께 여행을 한다. 어떤 때는 제주도를 가기도 하고 태국처럼 가까운 해외로 나가기도 했다. 작년엔  일본 교토와 오사카에 갔었고 이번엔 부산에서 일주일을 보내기로 했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어디 가서 무엇을 꼭 보거나 먹어야지 하는 뚜렷한 목적은 없다. 그저 서울이 아닌 곳에서 두 사람이 온전히 24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토요일 정오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KTX를 탄 우리들은 열차 안에서 더 이상 커피나 간식을 팔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바람에 부산까지 커피를 마시지 못하고(자판기가 있었으나 현금도 없었고 캔커피를 마시기는 싫었으므로) 괴로워하다가 겨우 도착한 부산역에서는 커피 대신 어묵을 한 꼬치씩 사 먹고 호텔로 향했다. 밖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미리 예약한 중앙동의 한 호텔에 올라가 짐을 풀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 투썸플레이스에서 커피를 한 잔씩 마셨다. 창밖으로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내는 여행지에서 비를 만나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시 21층 객실로 올라온 우리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뒤 각자 침대에 누워 가져온 책들 - 나는 이명수 선생이 전에 보내준 [내 마음이 지옥일 때]와 서울역에서 산 김진영의 [마당이 있는 집], 아내는 서울역에서 산 김훈의 [연필로 쓰기] - 게으르게 뒤적이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비가 와서 그런지 이따금씩 네온이 반짝이는 중앙동과 광복동 거리는 더 이국적으로 보였다. 우리는 이명세 감독의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등장해 더 유명해진 40계단에 올라 '이곳은 6.25 때 내려온 피난민들의 애환이 담긴 곳'이었다는 설명문을 읽고 정말 거기 쓰여있는 대로 영도다리가 보이는지 바다쪽을 쳐다보았다. 계단 위 왼쪽으로 쭉 이어지는 인쇄골목을 지나 국제시장에도 잠깐 들러보았다. 몇 년 전 여기에 있는 '개미집'에 와서 왕창 먹고 마셨던 추억을 소환했다. 사실은 예약해 놓은 식당으로 사는 길이었는데 아직 예약시간이 되지 않았기에 시간을 떼울 겸 거리를 천천히 배회한 것이었다. 

 

드디어 여섯 시가 되어  아내가 인스타그램에서 만나 전부터 눈여겨 봤다던 <유노우>라는 일식요리집으로 갔다. 처음엔 사장님 혼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기에 우리는 우리는 카운터 자리에 앉아서 음식이 준비되기를 기다렸다. 곧 아름다운 여직원도 나타났다. 이 분은 식당의 첫 스텝인데 5살 때 고열로 청력을 잃었다고 한다. 지금은 수술도 하고 보청기를 끼고 있어서 소통을 할 수 있지만 작은 소리는 잘 못 듣는다는 얘기를 인스타그램에서 읽었다. 사장님이 어렸을 때 친구나 동네 형 등 장애인들과의 좋은 추억이 있어서 얼굴도 보지 않고 청해서 이 분을 뽑았다는데 결과적으로 너무 예쁘고 손님들을 세심하게 살피는 성실한 직원이었다.

 

우리는 생선회 모듬과 키조개튀김 등을 시키고 술은 사케를 주전자에 담아달라고 했더니 정말 날렵한 주석주전자가 나왔다. 주석이 차가운 기운을 오래 지켜준다는 설명도 들었다. 일식집은 카운터에 앉으면 주방장이 생선을 요리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특전이 주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오이를 얇게 저며 우리를 놀라게 하던 사장님은 생선을 가져와 날렵하게 회를 치기도 하고 젖은 천에 감쌌던 오징어를 풀어 가볍게 칼집을 낸 뒤 썰어 접시 위에 담기도 했다. 꼬챙이에 생선을 샤샤샥 꿴 뒤 오른쪽 가스레인지로 달려가 굽기도 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 흡사 묘기대행진을 보는 것 같았다. 

 

세 테이블에 갈 모듬회를 함께 만들어 한 그릇씩 담아 냈는데 우리에게 온 건 분재처럼 작은 나무들 사이로 각종 회가 누워 있어서 마치 '숲을 지나 회를 먹으러 바다로 가는 느낌이 들었다. 회도 맛있고 술도 좋아서 아내와 나는 그 만족스러움에 거의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사장님인 유병찬 요리사가 나온 '츠지요리학교'(가게 앞 명판에 표시가 되어 있다)는 커리큘럼도 빡세고 되게 힘든 곳이라고 한다. 

 

키조개튀김튀김이 나왔는데 정말 바삭하고 맛이 좋았다.어느덧 사케 주전자 하나가 다 비워졌다 . 원래는 한 주전자 마시고 나면 소주로 바꾸기로 했는데(사케는 비싸니까) 아내가 사케 한 주전자만 더 마시면 안 되냐고 묻기에 망설이지 않고 사케 한 주전자를 더 시켰다. 오늘 같은 날 안 마시면 도대체 언제 이렇게 맛있는 안주에 사케를 마신다는 말인가. 죽순튀김과 표고새우튀김 등 다양한 음식이 서비스로 나왔고 마지막으로 대선소주를 한 병 시키니 마침 금태구이까지 나왔다.  우리는 금태 두 마리의 크기가 서울보다 30%는 더 큰 것 같다고 하며 엄지 두 개를 세워 보였다. 

 

 

"가게를 연 지 한 일 년 되셨죠?"라고 아내가 물으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장님은 원래 충청도가 고향인데 부인이 부산 사람이라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고 곧 둘째딸이 태어난다고 했다. 처음엔 좀 외진 곳이라 선배들이 여기 가게 여는 걸 말렸는데 마침 부산에서 유명한 블로거 한 분이 오셔서 가게를 포스팅해준 뒤부터는 전화를 받느라 일을 못할 정도로 손님이 몰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 얘기를 하면서 마침 오늘 그 블로거 커플이 오셨다고 하는데 가르키는 손을 보니 바로 우리 옆자리 커플 손님이었다. 그 블로거는 술과 음식이 너무 맛있는데 마침 자기가 임신 중이라 지금 술을 못 마신다고 아쉬워했다. 

 

배가 너무 불렀다. 남은 소주는 내가 마시고 사케는 아내가 해치우기로 했는데 결국은 소주와 안주를 아주 조금 남겼다. 부산 여행 첫 날의 첫 식사는 완벽했다. 모든 식재료는 훌륭했고 유병찬 요리사의 요리는 노련했다. 식기 하나하나에도 공을 들인 태가 역력했다. 너무 뿌듯하고 고마운 마음에(사실은 아내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 계산할 때 10퍼센트를 더 얹어달리고 했더니 처음엔 사양하다가 곧 받겠다고 하고는 직원에게 고생했다며 바로 현금으로 바꾸어 주었다. 음식 가격이 서울의 70% 수준이라고 아내가 귀뜸을 했다. 다시 밖으로 나와 비그친 거리를 천천히 걸어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여행을 한다는 것은 일상을 벗어나는 즐거움도 있지만 이렇게 새로운 사람과 장소를 만나는 기쁨도 있다. 국제시장 근처다. 부산 중구 광복중앙로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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