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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9.17 웰 메이드 추리소설 - [13.67]



홍콩에도 추리소설이 있다는 걸 몰랐다. 그런데 우연히 어떤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찬호께이라는 직가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의 작품 [13.67]이라는 책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 마디로 매우 뛰어난 추리소설이라는 것이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휴대폰에 제목과 작가 이름을 메모해 놨다가 서점에 가게 된 어느날 드디어 사서 읽게 되었다. 한창 일이 바쁜 때라서 일과시간엔 읽지 못하고 자기 직전이나 출퇴근하는 전철에서 주로 읽었는데 내용이 흥미진진해서 그런지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며칠 만에 다 읽어버렸다. 

이 소설은 탁월한 추리력과 기억력을 가진 관전둬라는 홍콩 경찰이 사건을 해결해가는 여섯 개의 이야기다. 첫 번째 이야기인 <흑과 백 사이의 진실>은 놀랍게도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에 누워있는 관전둬가 등장한다. 관전둬의 후배인 뤄샤오밍 독찰은 ‘Yes’또는 ‘No’만 할 수 있는 그의 두뇌 반응을 이용해서 살인사건의 진범을 밝혀낸다. 처음부터 독자의 예상을 벗어나는 전개다. 그게 2013년의 일이고 그 다음 작품부터 시간을 거슬러 점점 젊어지는 관전둬의 활약성이 펼쳐지는데 맨 마지막 작품인 <빌려온 시간>에서는 이제 막 경찰이 된 관전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게 1967년이다. 즉 이 책의 제목 ‘ 13.67’은 은 2013년과 1967년에서 따온 것이다. 책을 다 읽고나서 생각해보니 시간을 거꾸로 흐르게 한 것은 독자들의 흥미를 돋구는 것은 물론 주인공의 숨은 사연이나 캐릭터의 입체성을 구축하는 데에도 매우 효과적인 장치였다고 생각된다. 작가인 찬호께이는 홍콩에서 태어난 공학도였는데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취미로 추리소설을 쓰다가 작가가 된 케이스다. 그러나 취미로 시작했다고 하기엔 믿기 힘들 정도로 완벽한 필력을 자랑한다.  

그는 원래 현장에 나가지 않고 셜록 홈즈처럼 추리력만으로 범인을 찾아내는 ‘소파탐정소설’을 구상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원고가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원하는 공모전에 낼 수가 없게 되어버리자 아예 다른 이야기를 덧붙여 장편소설을 쓰기로 마음을 바꾸었다고 한다. 다행이다. 그의 열려있는 사고 덕분에 ‘관전둬’라는 멋진 경찰이 탄생하게 된 것이니까. 찬호께이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홍콩이라는 도시에 대한 애정과 어렸을 때부터 흠모했던 용감하고 정직한 경찰의 모습을 소설 속에 함께 녹여냈다. 원해 추리소설을 좋아했던 사람이라 그런지 촘촘한 트릭과 정교한 플롯들이 이야기 하나하나를 빛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건이 해결된 후에도 완벽한 반전이 하나씩 등장해 독자들의 뒤통수를 친다. 놀라운 것은 그러면서도 사회파 추리소설적인 면모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경찰 내부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과 이해관계에도 밝은 편이다. 마치 수십 년 동안 경찰에서 근무한 사람이 나와서 회고록을 쓴 게 아닐까싶을 정도로 사실성이 넘친다. 

홍콩 반환 이전과 이후 얘기가 공존하는 이 소설들은 점점 서구화되는 홍콩 사람들, 그리고 홍콩에 와서 점차 홍콩사람들처럼 변모하는 영국 사람들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홍콩이라는 작고 복잡한 도시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은 ‘홍콩 느와르’라 불리는 많은 영화들을 통해서도 언뜻언뜻 비춰졌었는데 이 소설에서도 범죄조직을 소탕하는 이야기는 두기봉이나 오우삼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다가 사건의 피해자들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 들어가면 홍콩이라는 도시를 관통하는 어떤 슬픈 정서와 만나게 된다. 이런 식의 사회파 추리소설 속에 경찰 내부의 내막에 얽힌 이야기까지 고루 담는 걸 보면 작가의 역량이 참 대단하다 아니할 수가 없다. 

이 소설엔 유머가 거의 없다. 대신 정직하고 진지하고 어른스러운 주인공들의 면면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즉 잔재주 없이 선명한 사건과 캐릭터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고전소설의 틀 안에서도 얼마든지 현대성과 함께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찬호께이는 안정된 필력을 통해 증명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타이페이 국제 도서전 대상을 수상했고 곧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이야기의 뼈대만 남고 디테일들은 새롭게 변할 것이다. 오랜만에 소설 읽는 재미를 만끽하게 해줬던 ‘웰메이드’ 추리소설이라 웬만하면 책으로 먼저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그의 데뷔작이자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상'을 받은 [기억나지 않음, 형사]도 찾아 읽어봐야겠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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