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제가 카피라이팅 실습 강의를 하는 한림대 학생들과 함께 하이쿠를 지어본 적이 있다고 했었죠? 하이쿠는 일본에서 생겨난 문학의 한 형태인데요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라는 표현이 제일 적절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세계적인 시의 형식으로 인정을 받고 있고 특히 유럽에는 하이쿠 시인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지금도 매년 영어로 쓰여진 하이쿠 시집들이 계속 출간되고 있다고 합니다. 뉴욕 타임즈는 어느 해 일 년 동안 뉴욕 시민을 대상으로 교통과 계절을 주제로 한 하이쿠 공모전을 실시해 날마다 신문 한구석에 싣기도 했다고 하고요.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타다토모
아마 하이쿠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시가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시커멓게 타버린 숯을 보고도 흰 눈이 얹힌 푸른 나뭇가지였던 시절을 상상하는 시인의 눈은 위대합니다.
얼마나 운이 좋은가
올해에도
모기에 물리다니!
이싸
이 시도 굉장합니다. 하이쿠를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방랑시인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건강도 좋지 않았을 테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들이었겠죠. 여름에 모기한테 한 방 물리고 “아, 올해도 안 죽고 또 한 계절을 맞는구나” 라고 기뻐하는 것에서 소탈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시인의 심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하이쿠는 이것입니다.
‘난 혼자요’라고 말하자
여인숙 주인이 숙박부에 그렇게 적었다
이 추운 겨울밤
이싸
정말 쓸쓸하지요? 몇 글자 안 되는데도 순식간에 북풍한설처럼 쓸쓸한 정조가 공간을 가득 채우는 멋진 시입니다.
말이 길어졌군요. 우리 학생들에게 수업시간에 하이쿠를 써보라고 했습니다. 되도록 짧게 세 줄 안에 내용을 담고 자연이나 계절, 시간적 요소를 집어넣으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들이 쓴 작품들을 몇 편 소개해 보겠습니다.
밖에 풀벌레 운다
이 새벽,
나만 잠들지 못하는 게 아니로구나
조유X
흘러가는 시간아
저 물처럼
좀 얼어봐라
장유X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잤더니
모기가 발만 무네
양말도 신고 자라고
박진X
과제가 너무 많다
이불 뒤집어쓰고 무한도전 보면서
귤이나 까먹고 싶다
방슬X
집에서 보내준 김치가
딱 맛있게 익었다
엄마 보고싶다
방슬X
눈이 오는 날엔
경춘선 끝칸으로 간다
혹시라도 너가 있을까
안기X
전우여 기억하오?
이 눈을 쓰레기라 부르며
넉가래 행진을 하던 날들을
안기X
가을 정취에 이끌려
홀린 듯이 한참을 떠돌았다
아이고 옷을 거꾸로 입고 다녔네
이은X
잔여 무료통화 350분
잔여 무료문자 220건
안 생겨요
강지X
작년 겨울 내내 입었던 코트에
무심코 손을 넣었다가
네가 준 감기약을 발견했다
강지X
잉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샤프심이 모자란 것도 아니다
쓸 말이 없다
김선X
매일 밤마다
심장소리가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다
김선X
짜장면 먹을까 짬뽕 먹을까
고민하다 볶음밥을 시켰다
짬짜면 시킬 걸
손아X
다들 잘 하지요? 미친 감성들이 춤을 춥니다.
수업시간에 저도 몇 편을 써보았습니다.
저녁 내내 화난 척을 했는데
사실은
술을 마시고 싶어서였다
편성X
신호등이 바뀌어도
급할 것이 없다
갈 곳이 없기에
편성X
TV를 끄고
책을 펼치니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는구나
편성X
신문을 펼치니
마음이 어지럽구나
예전엔 밑씻개로 썼는데
편성X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또 쳐다본다
눈이 오는 날 아침에
편성X
길고양이가
자동차 밑으로 들어간다
서리 내린 이 아침에
편성X
거꾸로 타는
보일러도 있는데
인생은 왜
편성X
형광등이 깜빡인다
요즘 나도 그렇다
나이가 들었다
편성X
저도 처음 써보는 거라 마음대로 잘 안 되네요.
여러분들은 어떤 하이쿠가 제일 마음에 드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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