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이나 영화는 전체에 대해 말하기보다 한 부분만 발췌해서 소개하는 게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가 그런 경우 아닐까. 소설 중간쯤 나오는 노래 ‘칠갑산’에 대한 부분이 그렇다.
노래할까요.
무재 씨가 말했다.
은교 씨는 무슨 노래 좋아하나요.
나는 칠갑산을 좋아해요.
나는 그건 부를 수 없어요.
칠갑산을 모르나요?
알지만 부를 수 없어요.
왜요.
콩밭,에서 목이 메서요.
목이 메나요?
콩밭 매는 아낙네는 베적삼이 젖도록 울고 있는 데다, 포기마다 눈물을 심으며 밭을 매고 있다고 하고, 새만 우는 산마루에 홀어머니를 두고 시집와 버렸다고 하고….
그렇군요.
어찌보면 연인끼리 하기엔 너무 싱거운 얘기를 진지하게 주고받는 두 사람이 우습기도 하지만 가만히 왜 그럴까 하고 천천히 읽어나가다 보면 어떤 기이한 진정성이나 순결함이 느껴지는 게 [百의 그림자]의 작가 황정은의 문체이고 작법인 것이다. 목이 멘다는 것은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공감하여 마음이 움직인다는 뜻일 것이다.
나는 ‘철거되기 전의 세운상가쯤’으로 짐작되는 소설 공간과 등장인물들을 묘사하는 작가의 섬세하면서도 짐짓 무심한 척하는 시각에 매료되었고, 그런 배경이나 시간 묘사와는 달리 감각적인 구어체를 포기한 채 느릿느릿한 문어체로 진행되는 두 사람의 대화가 단연 이 소설의 백미라고 느꼈다.
나중에 무재는 ‘하얀 눈 위에 구두 발자국’이라는 노래를 불러달라는 은교의 청도 거절한다. 이것도 ‘새벽에 떠나는데 강아지만 같이 갔다고 하고, 발자국만 남았다고 하고’ 해서 목이 멘다는 것이다. 구어체로 썼다면 말도 안 되게 싱거울 대화가 문어체라는 옷을 입자 뭔가 자신만의 개성과 조심성을 확보하는 느낌이다. 그러니 이건 내가 평소에 애써 피하려고만 들었던 문어체의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이상한 방법으로 일깨워주는 소설인 것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무재가 은교에게 ‘노래할까요’라고 다시 묻는 장면으로 끝난다. 아마 그들은 또 어떤 노래 하나를 가지고 이건 목이 메네 안 메네 하고 싱거운 소리를 늘어놓으며 가만가만 둘만의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의 이런 결말이 참 좋았다. 다시 노래하는 두 사람 덕분에 나는 전자상가에서 일하던 여 씨 아저씨도, 가끔 복권 살 돈을 꾸러 오던 유곤 씨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오무사의 할아버지도 더 이상 안부를 궁금해 하거나 걱정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뒤를 따르던 그림자가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서 벗어나 조금 뒤에서 일어나 쫓아오더라도 더 이상 이상하지 않은 그림이 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뭔가 좋은 소설을 읽었다는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이 소설에 대해 무언가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급한 의무감 같은 걸 느끼고 출판사에 연락을 취했다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책 말미에 붙은 해설에 이런 글을 썼다.
“이 소설을 몇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도심 한복판에 사십 년 된 전자상가가 있다. 상가가 철거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곳을 터전 삼아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내력이 하나씩 소개된다. 그 와중에 이 소설은 시스템의 비정함과 등장인물들의 선량함을 대조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과연 살 만한 곳인지를 묻는다. 이 소설을 두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이 소설은 우선 은교와 무재의 사랑 이야기로 읽힌다. 그러나 이 사랑은 선량한 사람들의 그 선량함이 낳은 사랑이고 이제는 그 선량함을 지켜 나갈 희망이 될 사랑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윤리적인 사랑의 서사가 되었다.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이 소설은 사려 깊은 상징들과 잊을 수 없는 문장들이 만들어낸, 일곱 개의 절(節)로 된 장시(長時)다. 이 소설을 한 단어로 정리하면 이렇다. 고맙다. 이 소설이 나온 것이 그냥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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