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일’이란 말을 아십니까? 예전엔 토요일을 반공일이라고 불렀죠. 제가 어렸을 땐 토요일에도 학교나 직장에 평일처럼 나가 오전에 공부나 일을 하는 척 하다가 점심 시간 전에 집으로 돌아오는 싱겁기 짝이 없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래서 ‘월차’라는 말은 있어도 ‘반월차’라는 말은 없을 겁니다. 아, 월차란 말도 사라졌나요? 아무튼 저도 직장 다닐 때 홍상수의 데뷔작이 너무 보고 싶어서 ‘반월차’를 내고 종로2가의 ‘씨네코아’에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조조로 본 적이 있습니다. 아, 이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지금은 주말 2회가 당연하지만 예전엔 토요일은 TV에서 주말연속극을 틀어주지 않았습니다. 즉 일요일 저녁에만 주말연속극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규칙을 바꾸고 토/일 방송을 시작한 게 바로 TBC의 주말드라마 [결혼행진곡]부터였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너무 재밌어서’였구요.
[결혼행진곡]은 정말 대단한 드라마였습니다. 당시의 청춘 스타였던 장미희, 유지인, 한진희가 모두 출현했고 한진희의 “죽갔네”라는 대사는 전국적인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청춘 스타들만 나온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 TV 드라마에서 이 사람 없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싶었던 김세윤이 홍세미와 커플로 나왔고, 잘 기억이 안 나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아보니 김동훈과 서우림도 커플로 나왔더군요. 안옥희도 나왔구요. 안옥희라는 이지적인 탤런트는 나중에 소설가인가 극작가로 변신을 하기도 했죠. 김동훈은 안국동에 있던 실험극단과 실험극장의 대표이기도 했었는데요, 저도 어렸을 때 거기서 [에쿠우스]니 [신의 아그네스] 같은 화제작을 보았고 대학생일 때도 [스티밍, 욕탕 속의 여인들] 같은 연극을 보러 다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욕탕 속의 여인들은 번역극이었는데 영화배우 최민식의 전 부인 등 실력 있는 유명 여배우들이 모두 가슴을 벗고 나와서…음.음. 그리고 김동훈은 가수 김세환의 아버지일 걸요 아마.
[결혼행진곡]은 정말 유행어도 많은 드라마였습니다. 한진희의 “죽같네” 말고도 얄개 이승현의 “인생무상” 그리고 김순철의 “바쁘다 바빠”가 있었습니다. 김순철은 투박하게 생겼지만 전천후로 연기를 참 잘 하던 ‘한국의 잭 니콜슨’같은 배우였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했던 [여보 정선달]이란 드라마에선 정선달 역의 김성원과 콤비를 오래 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이 장사 해서 떼돈 버는 것도 아니고, 세금 꼬박꼬박 내고…”도 분명 김순철의 유행어였는데 어느 드라마인지 도대체 생각이 나질 않네요. 무슨 호스티스들이 떼로 나오는, 지금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파격적인 드라마였던 거 같은데. 지금은 고인이 된 미남 배우 임성민이 말 더듬는 남자로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만)
우리나라에서 난데없이 ‘비목’이란 가곡이 전국을 뒤흔든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결혼행진곡]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레스토랑에서 얘기를 하고 일어서려다가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녁에~” 라고 ‘비목’이 흘러나오면 “아! 조금만 더 있다 가자. 내가 좋아하는 곡 나오네.”라고 말하던 장미희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비목’의 유행은 나중에 작가 임성한이 [보고 또보고] 같은 드라마에서 조랭이 떡국이나 유행시키던 것과는 정말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인터넷도 있고 게임도 있고 멀티플렉스도 있지만 그 시절엔 오로지 TV뿐이었습니다. 김수현의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엔 수돗물 사용량이 줄고 도둑이 들어와도 몰랐다는 전설 같은 우리나라의 TV시청 역사엔 이미 이런 막강한 콘텐츠들이 이미 시범을 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얘기는 여기서 끝. 자려고 누웠다가 갑자기 얘기들이 떠올라서 주책스럽게 마구 지껄여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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