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인 박연준과 시인이자 인문학 저술가인 장석주는 이십오 년 정도 나이 차이가 나는 커플이다. 따로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그냥 동거에 들어갔던 이 커플이 며칠 전인 2015년 크리스마스 이브를 결혼기념일로 정하고 결혼 서약 대신 냈다는 책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를 읽었다.
이 책은 작년에 호주 시드니에 사는 지인이 한 달 간 집을 비우게 되었으니 두 시람에게 와서 살아보라고 했던 제안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리집이 한 달간 비니 그동안 와서 우리가 쓰던 집과 방과 이불과 숟가락 젓가락을 마음대로 써도 무방하다고 한 사람도 대단하지만, 지인이 살러 오랬다고 냅다 서교동 집을 한 달이나 비우고 날아갈 수 있는 두 남녀도 대단히 부러운 인생이다. 그리고 이걸 책으로 엮어 결혼 서약 대신 내게 한 기획자이자 시인인 김민정 역시 멋진 사람이다.
제목인 '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라는 문장은 박연준이 쓴 앞부분의 챕터 ‘첫날’이라는 글 속에 들어 있다. 이 책은 반쯤 나눠서 앞 부분은 박연준이 쓰고 뒷부분은 장석주가 쓰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인이지만 평이하고 살뜰한 문장을 구사하는 박연준의 글이 미셀러니에 가깝다면 보다 개념적이고 인문학적인 글쓰기를 지향하는 장석주의 글은 에세이스럽다.
나는 두 주인공이 시드니에서 마주친 월요일의 운동장 모습에서 눈이 멈췄다. 장 본 물건들을 들고 걸어오던 두 사람은 잔디가 깔린 넓은 운동장 벤치에 짐을 부리고 앉아서 쉬고 있었는데 운동장엔 한 남자가 부메랑을 던지며 놀고 있었고 그 옆엔 여자 아이가 혼자서 농구공을 튕기며 놀고 있었던 것이다. 혼자 부메랑을 던지며 놀던 남자는 타인과 눈이 마주치자 아무 의심 없이 미소를 지어보였는데 ‘월요일인데 저렇게 평화로워도 되는 것일까?’ 라고 놀라는 두 사람의 모습은 오히려 바쁘게 살아야만 정당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표상이기도 하다.
애초에 장석주는 오랫동안 혼자 잠들고, 혼지 잠 깨고, 혼자 걸어다니는 '1인분의 고독'에 피가 길들여 있던 사람이었는데, 박연준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삶에 들어옴으로써 ‘2인분의 고독’을 덥썩 받아 품기로 한 사람이라 고백한다.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사는 과정을 '고독이라는 공통분모로 묶다니, 이는 기본적으로 남들보다 더 게으르고 더 형이상학적인 취향을 누리고 살았던 사람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 사람조차도 시드니 교외 주택에서 보낸 한 달의 시간은 '심심함을 품은 시간들'이라며 그 소중함을 다시 반추하고 있다. 요즘 세상에 심심함을 품은 시간들이라니. 베란다에 의자를 내놓고 햇볕을 쬐고 책을 읽으며 한가롭게 보낸 시간들.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부러웠던 것은 바로 이 장면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결혼서약을 대신하는 의미로 두 남녀가 쓴 에세이라는 멋진 포장을 하고 있지만 내용은 한 달 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햇볕을 쬐고 포도주를 마시며 논 이야기다. 심심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뒤쳐짐에 대한 염려나 늙음에 대한 안달도 내려놓은 채 진짜 ‘심심하게’ 지낸 부러운 시간의 기록들. 에필로그에서 장석주는 그가 누렸던 심심함을 이렇게 찬양한다.
심심한 시간은 그냥 심심하기만 한 게 아니다. 심심함 속에서 잊었던 것들이 되살아나고, 사라진 것들이 부활한다. 심심한 시간들은 죽은 것들을 되살리고, 잃었던 것들을 다시 돌려주며 감미로운 감각들을 맛보도록 했다. 시드니의 유칼리투스 숲과 공원들, 푸르름에 물든 하늘과 바다, 청명한 날씨들, 롱블랙 커피, 달링 하버를 걷던 시간들, 우리를 환대했던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하자.
나는 겨울이면 가끔 눈 쌓인 산장에 갖혀 지내는 상상을 한다. 마치 아가사 크리스티의 <쥐덫>에 나오는 그런 산장처럼 아무도 오지 못하는 그 곳. 거기서 무얼 할까. 핸드폰도 TV도 단절이다. 오늘 내일이 지나야 사람들이 쌓힌 눈을 뚫고 나타날 것이다. 긴긴 겨울밤. 밖엔 옅은 눈보라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벽난로 안의 장작불은 타닥 소리를 내며 타고 있다...아, 회의를 하러 가야 할 시간이다. 여기는 회사. 화요일 밤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죄다 자리에 앉아 회의를 준비하거나 일을 하고 있다. 논현동에 눈내리는 산장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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