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한 시를 쓰기로 유명한 시인이 있었다. 그는 어느날 한 기자가 그의 어려운 시 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시 하나를 가리키며 도대체 무슨 의미로 이런 시를 썼느냐고 묻자 ‘이 시를 쓸 때는 나와 신만이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오로지 신만이 아신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자신도 무슨 뜻인지 까먹었다는 얘기다. ‘시계태엽오렌지’라는 제목을 단 소설가 앤서니 버지스도 죽기 전까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시계태엽오렌지(A Clockwork Orange)는 대학 시절 '비짜 비디오'로 처름 본 이래 DVD로, 시네마테크에서, 그리고 또 얼마 전 '스탠리 큐브릭전'에서도 반복해서 보았던 영화였다. 하지만 영화 전편을 이토록 몰입된 환경에서 큰 스크린으로 보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오늘 오후 2시, 전날의 격한 음주로 인한 숙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매를 강행한 나는 압구정CGC에서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와 정식으로 조우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정말 제목의 의미가 궁금해져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더니
버지스는 1972년 한 잡지와 인터뷰하며 “런던 동부 사람들이 흔히 쓰는 ‘시계태엽 오렌지처럼 괴상한’(as queer as a clockwork orange)이라는 말에서 따왔다”고 밝혔다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레이어 ‘orang’을 이용한 말장난이라고 말했다. 또 얼마 뒤 그는 이 제목이 “즙이 많고 달콤하며 향이 좋은 한 유기적 독립체가 기계장치로 바뀌는 것”에 대한 은유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언어유희에서 시작했든 은유효과를 노렸든 아무래도 버지스는 남들이 안 쓰는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내는 데 매혹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세상에서 새로운 것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기 싫어했던 스탠리 큐브릭도 당연히 이 단어의 특별함에 단박에 매혹된 것이리라.
1972년도에 발표된 작품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매우 연극적이고 감각적인 미장센을 고집하는 이 영화는 미술은 말 할 것도 없고 특히 음악의 배치와 쓰임새가 놀랍다. ‘Singing in the Rain'을 부르며 세련된 중산층 작가의 부인을 강간하는 장면은 너무도 매혹적으로 그려져 영국에서 청소년들이 이를 그대로 따라한 모방범죄가 발생했을 정도라고 한다. 덕분에 이 영화는 감독이 사망할 때까지 영국에서는 더 이상 상영을 하지 못했고.
틴토 브라스 감독의 지상 최대 포르노 <칼리큘라>에서 네로 역을 맡았을 때도 굉장했는데 말콤 맥도웰은 이 영화에서 완전 미친놈 그 자체다. 당장이라도 상대의 얼굴을 쇠막대로 내려칠 것만 같은 위악적이고 불안한 미소와 눈빛. 도대체 이십대에 이런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배우가 몇이나 있었던가.
그리고 얼마 전 스탠리 큐브릭전에 다녀온 뒤 남긴 짧은 포스팅에 내 친구 표문송 씨가 ‘큐브릭 예술의 핵심은 음악!!’이라는 댓글을 달았었는데 오늘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폭력장면들에 우아하게 흐르는 클래식이라니. 그것도 베토벤의 9번 교향곡. 그런데도 마치 그 장면을 위해 작곡을 한 것처럼 느껴지는 신선함이라니. 완벽주의자이자 천재였던 스탠리 큐브릭의 공력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한다.
영화의 이미지와 테크닉에 압도당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에 대해 새삼 거론하는 게 구차하게 느껴질 정도다. 하긴, 천재의 작품에 뭐 이런저런 토를 달겠는가. 그냥 감탄하다 잠드는 것도 행복한 리뷰의 한 가지 방법 아니겠는가.
(*영화를 보고 인터넷에서 찾은 평론가 김효선의 글을 많이 참조해서 썼습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73101&cid=42621&categoryId=44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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