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곡성]을 두 번 보았다. 우리 부부는 시간이 안 맞아서 이 영화를 따로따로 보았는데 어느 날 다시 극장에서 함께 보고 작품에 대해 서로 얘기해 보자는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조조를 봄으로써 그 약속을 이루게 되었다. 


한 마디로 곡성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에 대한 이야기이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가는 마을이 있다. 얼마 전 마을로 들어온 외지인의 짓이라는 소리도 있고 귀신의 짓이라는 소리도 있다. 그러다가 마을 경찰인 종구의 딸 효진이가 병에 걸려 이상한 짓을 하게 된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걸까? 이상하게도 왜, 라고 묻는 순간 할 말이 없어진다. 그냥 재수가 없어서? 아니, 그걸 설명하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이 영화는 세상 모든 일 중 ‘왜?’ 라는 질문에 딱 부러지게 대답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음을 얘기하는 듯하다. 대신 ‘어떻게’에 대한 얘기가 끊임없이 펼쳐진다. 왜 효진인가, 가 아니라 효진이가 선택된 이후에 종구는 딸을 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고 일광은 어떻게 어떤 굿을 했으며 무명은 마을을 지키려고 어떻게 노력했는지가 이 영화를 보는 재미의 포인트다.

어떤 사람은 이 영화가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어떤 이는 종교와 샤머니즘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고도 한다. 다 맞는 말 같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를 보고나서 이건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왜?’라는 전자의 질문이 그럴듯한 담론들을 만들어낸다면 후자의 ‘어떻게?’라는 질문은 옳고 그름을 떠나 어디로 뻗어나갈지 모르는 무궁무진한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외지인이 왜 곡성에 들어왔는지는 모른다. 왜 사람들을 죽이는지도 모른다. 일광이 외지인과 얼마나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최선을 다했나,에 이르면 스토리와 디테일들은 단박에 날개를 달고 끝없이 달려 나간다. 


나홍진 감독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주된 이야기는 치열하고 치밀하게 침입을 방어하고자 하는 어느 가장에 대한 이야기다. 2시간 내내 전력을 다해 방어하는데 들어오려고 하는 존재가 우리 편인지 남의 편인지 모르는 상황이 가장 무섭다.”라고 했다. 영화는 일광이나 무명이 우리 편인지 남의 편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야기의 끝까지 간다는 데 진짜 묘미가 있다. 심지어 끝나고 나서도 좋은 편과 나쁜 편의 구별이 희미하다. 어쩌면 사건의 중심에 있으며 동시에 최대 피해자인 종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맨 마지막 장면에 도달해서도 “걱정 마, 아빠가 다 해결 할게.”라는 하나마나 한 맥빠진 소리나 중얼거리고 있다. 난 이렇게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열려있는 결말’이 좋았다. 

그래서 이건 일종의 거대한 ‘ 사기극’이라고 생각했다. 포스터나 예고편에도 나오고 일광도 얘기하던 그 ‘낚시질’ 말이다(미국에도 있다.J.J. 에이브람스라고, 거대한 '떡밥'의 일인자). 만약 당신이 사기꾼을 만났다면 그가 왜 사기꾼이 되었는지를 묻는 건 별 의미가 없다. 대신 어떤 사기를 어떻게 쳤는지 물어보는 게 옳다. 아마 그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질문에 더 신이 나서 자신의 이야기 보따리를 양껏 풀어놓을 것이다. 물론 진짜 사기꾼이라면 나중에 당신까지 속여먹고 튈지 모르니까 그 전에 얼른 차버려야겠지만, 그게 나홍진 같은 영화감독이라면 기분 좋게 한 번 속아줘도 좋지 않겠는가. 가뜩이나 재미 없는 세상인데.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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