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탈영병 얘기가 뉴스에 나오면 사람들은 한숨부터 내쉰다. 아니 어쩌자고 탈영을 해? 도대체 쟤는 무슨 생각에 저랬을까. 이해를 할 수가 없네. 물론 나도 똑같은 소리를 한다.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총을 들고 탈영을 하면 잘해야 다시 끌려가 징역을 오래 살거나 아니면 검거현장에서 사살되는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 물론 본인에게는 절박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애인이 변심을 했거나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고참 새끼가 있거나. 그러나 제3자는 죽었다 깨나도 그 이유를 모르고 이해도 못한다. 그게 세상의 이치니까.
그런데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심정을 헤아려 보는 방법이 뭐 없을까. 기자 또는 학자가 나와서 그 사실을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때 우리는 소설로, 영화로, 또는 연극으로 그 현장에 다시 들어가 보는 경험을 선택한다. 그러면 몇 줄로 요약될 수도 있었던 앙상한 ‘사실’은 픽션이라는 드라마 장치를 통해 육화되고 비로소 사람들에게 사건 밑에 깔려있던 입체적인 ‘진실’을 들려준다.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라는 이 직설적인 제목의 연극은 탈영병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2015년 현재 모 군부대에서 소총을 들고 탈영한 말년병장. 그 놈은 제대 한 달을 남겨두고 왜 탈영을 한 것일까. 연극은 현재의 탈영병 이야기로 시작해 2004년 이라크 무장단체의 반군들, 그리고 1944년 일본 오키나와의 가미카제 특공대로 지원했던(사실은 끌려간 것이지만) 조선의 젊은이들 얘기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2010년 서해 백령도의 초계함 안으로 들어간다.
명백히 천안함 침몰사건을 연상시키는 백령도 초계함 챕터는 생일을 맞아 동료들로부터 초코파이를 선물 받았던 병사 이야기, 돌 지난 육지의 아들이 자꾸 눈에 밟히는 취사병 이야기, 매번 지각을 해서 매를 맞던 고문관 이야기 등등 병사 한 명 한 명의 사연을 통해 그들이 군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이었음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이라크 병사들이나 탈영병, 가미카제 병사들의 이야기를 돌아 다시 이들의 이야기로 돌아왔을 때 아까 관객에게 들려주었던 각자의 대사들을 똑같이 한 번 더 반복하게 한다. 물론 그냥 반복은 아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초계함 안에서 사망한 그들은 자신의 대사가 끝날 때쯤 나타난 의사와 간호사들에 의해 머리 위에 검은색 직사각형 삼베봉투를 쓰고 그대로 서 있게 된다. 그렇게 저마다의 분분했던 사연들은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앞에서 일제히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 저마다의 사연을 얘기하다가 갑자기 검은 봉투가 씌어지는 순간 로봇처럼 멈추어 설 때 코를 훌쩍이던 관객들은 여기저기서 눈물을 뿌린다. 나도 눈물이 나서 손수건을 꺼냈다.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간 젊은 영혼들의 심정이 가슴으로 뜨겁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공감할 수 없었던 그들의 사연이 잘 짜여진 연극의 플롯과 대사, 그리고 절제되면서도 정확하고 열성적인 연기들을 통해 되살아 나면서 이것은 연극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곁에서 일어났던 일임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에게 반복해서 일어날 일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현재 대학로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배우 이원재를 비롯해 캐스팅 일순위에 들어간다는 명배우들이 열 일을 제쳐두고 이 연극에 몰려든 것은 극을 쓰고 연출한 예술감독 박근형에 대한 믿음 때문일 것이다. 나도 박근형이라는 이름 때문에 금요일의 바쁜 일정을 가까스로 소화한 뒤 저녁을 굶은 채 남산예술센터까지 달려 왔으니까. 박근형은 전작 [개구리]에서 전직 대통령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창작지원사업에서 탈락한 경험이 있다. 이 작품도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다루는 바람에 정부에서 주는 창작자원금 후보에서 밀렸다는 뉴스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좋은 작품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결국 그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다. 관객들은 ‘전회 매진’이라는 뜨거운 성원과 집단지성을 통해 이 연극의 의의와 작품성을 인정해 주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인간종인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 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호모 사피엔스만이 가지는 고유한 기능인 ‘픽션을 만들어내고 믿는 능력’ 때문이라고 했다. 픽션은 거짓말이지만 진실을 밑천으로 하는 핍진성 있는 거짓말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끌려가 비행기 안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며 자폭했다’라거나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인해 초계함에 타고 있던 46명의 병사들 전원이 사망했다’는 건조한 문장으로는 도저히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진실들은 픽션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우리들의 지성과 구체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연극을 보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안타깝게도 이번 주말까지만 상연한다. 그러나 다시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때는 놓치지 말고 꼭 예매를 하시기 바란다. 올 10월에는 일본 도쿄에서도 무대를 올릴 계획이라고 한다. 놓치기 너무 아까운 연극이라며 티켓을(그것도 배우할인 가격으로!) 확보해 준 배우 이승연 씨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로버트 파우저 교수님의 신작 발표 행사 때문에 아깝게 이 연극을 놓친 아내 윤혜자 여사에게도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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