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노는 토요일이다. 목요일에 정원, 혜원 자매, 그리고 한상과 함께 북악터널 근처에 있는 ‘절벽’에서 술을 마셨으므로 금요일엔 집으로 곧장 귀가했다. 오랜만에 놀토를 맞아 늦잠을 즐긴 뒤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 길에 낮술 한잔 걸치기에는 거의 완벽한 조건이다.
집에서 가까운 청계산에 한번 가보자고 한 게 벌써 몇 달 전이다. 한상이, 양진홍씨 등과 함께 갈 생각이었지만 게으른 양진홍씨가 등산에 관심을 보일 리가 없다. 우리가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전화해주면, 그때 버스를 타고 청계산 입구로 달려와서 술만 마시겠다고 한다. 놀라운 발상이다. 남들이 ‘산이 거기 있으니 오른다’라면 이 사나이는 ‘산이 거기 있는데 그냥 쳐다보면 되지 왜 올라가냐’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청소를 하고 있는데 한상이가 차를 몰고 강남에 도착한다.(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 당연히 집에서 밀린 가사일에 매진하거나 어린 딸을 돌봐야겠지만 오늘은 희진씨에게 ‘광고주 중에 등산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라는 씨도 안먹히는 거짓말을 하고 나왔단다) 어차피 술을 마실 생각이므로 차를 집 앞에 대고 버스를 탄다. 78-1번을 타고 30분쯤 가니 금방 청계산 입구다. 입구부터 도토리묵과 파전, 닭도리탕 등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어느 지역이든 유원지나 산에 가면 천편일률적으로 도토리묵을 판다. 도대체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이렇게 도토리묵에 목을 매게 된 것일까. 조금 올라가다 보니 ‘매봉’과 ‘옥녀봉’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안내판을 보니까 옥녀봉이 매봉보다 조금 더 낮고 코스도 짧다. 당연히 옥녀봉을 택한다.
역시 우리가 잠든 사이에도 많은 사람들은 꾸준히 산에 오르거나 도토리묵을 먹어왔다는 걸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날이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젊고 늙은 등산객들이 꽤 많다. 지나가는 아저씨들끼리 ‘어제하고 오늘은 또 다르네…’라고 하는 말을 우연히 엿듣고 둘 다 전율한다. 아니, 저 사람들은 여길 매일 올라온단 말야?
“우리가 청계산을 너무 우습게 봤나 봐...헉헉”
한상이가 숨을 몰아쉬며 자연에 경외심을 표한다. 나한테 좀 천천히 가라고 짜증도 낸다. 중간 정도 올라갔는데 벌써 숨이 차고 땀이 솟는다. 산은 올라갈수록 경사가 심해지고 아직 옥녀는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발걸음이 이상해지길래 등산화를 내려다 보니 밑창이 거의 떨어져 개혓바닥처럼 너덜너덜 한다. 한 십년 전에 사서 약수터 다닐 때 신다가 처박아 두었던 트래킹화인데 드디어 오늘 수명이 다한 모양이다. 졸지에 절름발이처럼 절뚝거리며 산에 오른다. 한상이는 아까부터 발뒤꿈치가 아프다고 한다. 내가 중년에 나타나는 ‘통풍’ 아니냐고 놀렸더니 매우 불안해 하는 표정이다.
많은 땀을 흘리고 애쓴 보람 끝에 정상에 도착한다. 옥녀봉 정상엔 먼저 올라온 사람들은 물론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줌마까지 있어 우리가 힘들게 올라왔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다. 시원한 경치와 함께 경마장이 보이는 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려 했으나 너무나 많은 아줌마 아저씨들이 프레임을 침범하고 계셔서 결국 반대편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라는 푯말 옆에 앉아서 사진을 찍는다. 얼른 내려가 막걸리나 마시자며 한상이가 양진홍씨에게 전화를 한다.
“아니, 거기까지 올라가다니…대단한데!”
수화기 너머로 양진홍씨의 목소리가 들린다. 시간 맞춰 서둘러 오라고 얘기하고 산을 내려가는 도중에 다른쪽 등산화마저 밑창이 떨어져 나간다. 내리막길이라 위험하므로 할 수 없이 잠깐 앉아 등산화 끈을 푼 뒤 발에 칭칭 감고 내려간다.
등산로 입구에 즐비한 술집 중 좀 넓은 곳으로 들어가 앉아 해물파전과 도토리묵, 막걸리 두통을 시킨다. 오랜만에 맑은 공기를 쐬며 운동을 했다는 자부심에 막걸리를 벌컥 벌컥 마신다. 파전과 도토리묵도 맛있다. 주변엔 등산조끼, 등산바지, 등산화에 배낭까지 지나치게 완벽하게 갖추고 온 등산객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닭도리탕이나 도토리묵을 먹고 있다. ‘히말라야도 아니고 겨우 청계산에 오면서 너무 갖춘 거 아니니?’ ‘저 배낭엔 뭐가 들었을까, 혹시 도토리묵 아냐?’ 등등의 하찮은 농을 하며 술을 마시고 있는데 양진홍씨가 도착한다. 좀 이따가 승완씨도 청계산으로 오기로 했단다. 진홍씨와 승완씨는 이년 전에 이혼을 했다. 비록 같이 살다가 이혼은 했지만 지금도 서로 친구처럼 오누이처럼 지낸다. 이런 말 하긴 싫지만 약간은 ‘쿨’한 인간들이다. 승완씨와는 두사람이 신혼일 때부터 친하게 지내서 지금도 가끔 같이 술을 마신다.
일차로 막걸리 네통을 비우고 나니 배도 부르고 해서 잠깐 나가 쉬면서 이차를 가기로 했다.가게 밖으로 나오다 보니 입구에서 사람들이 비지를 공짜로 퍼간다. 한상이가 눈을 반짝이며 다가가서 비닐봉지에 비지를 한 바가지 퍼 담는다. 진홍씨와 나도 번갈아 바가지로 퍼 담다가 내친 김에 승완씨 몫까지 또 한 바가지를 퍼 담는다. 세 놈이 비지 네 봉지를 들고 술집을 기웃거리고 다니려니 좀 쑥쓰럽다. 눈에 띄는 술집으로 들어가 승완씨가 좋아한다는 닭도리탕과 소주를 시킨다. 네이버카페 전여옥 반대 싸이트의 열혈회원인 진홍씨와 내가 전여옥을 열라 씹으며 탄핵정국 얘기를 하고 있는데 마침 승완씨가 도착한다.
한상이는 이혼 후에 승완씨를 처음 보는 거라 더 반가워한다. 서로의 생활 애기를 하고, 한상이의 딸 얘기를 하고, 돈 얘기, 집 애기를 하다가 섹스 얘기까지 나온다. 출산 이후에 육아에 바빠 아직 부부관계를 하지 않았다는 한상이 얘기에 모두들 안타까워 한다. 총각보다 섹스 빈도가 적어서야 되겠냐고 하며 나를 쳐다보지만, 괜한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 싫은 난 노코멘트로 일관한다. 결혼 생활에서 섹스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전 부부 둘이 열심히 설파한다. 평소에 ‘그거’라도 열심히 잘 해줬으면 이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었다는 승완씨의 공격에 진홍씨가 약간 밀리는 형세다. 진홍씨는 ‘평소엔 너무 안하다가 어쩌다 한번 하면 엄청 잘해주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어떤 분야에서든 역시 벼락치기는 좋지 않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다.
날이 어둑해지자 저마다의 비지 봉다리를 들고 버스를 탄다. 강남역에서 내려 우리집에서 한잔 더 하기로 한다. 소주 몇 병을 사들고 들어가 술상을 차린다. 승완씨가 냉장고의 묵은 김치를 꺼내 비지찌게를 끓였다. 맛이 되게 이상하지만, 그냥 참고 먹기로 한다. 얼마 전에 산 에릭 클랩튼의 언플러그드 뮤직DVD를 보며 술을 마신다. 진홍씨가 핑크 플로이드를 틀라고 성화였지만 그건 너무 시끄럽다고 판단, 코어스 언플러그드를 데크에 올린다. 진홍씨와 승완씨에게 둘이 그렇게 혼자 살고 있는니 다시 합치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서로 손을 내저으며 싫다고 난리다. 아무튼 이상한 인간들이다. 너무 오랫동안 술을 마셔서 모두 지친다. 한상이가 부른 대리운전 기사가 도착함으로써 긴 술자리도 끝이 난다.
산행을 핑계로 오랜만에 대낮부터 술을 마셨다. 내친 김에 길고 달콤한 잠을 자려 했으나, 역시 일요일 새벽부터 깨어나 신문지 휘날리는 강남역 주변을 돌아다니다 공사장 인부들이 먹는 음식점에 들어가 아침을 먹었다. 그래도 일요일을 하루 종일 쉴 수 있다니, 좀 살만 하다.
(2004.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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