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미국 작가가 쓴 것 같은 프랑스 소설을 한 권 읽었다. 레일라 슬리마니의 두 번째 장편 소설 [달콤한 노래]다. 물론 이 작품은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콩쿠르상을 받은 작품인 만큼 당연히 정통 프랑스 소설이 틀림 없지만 '아기가 죽었다. 단 몇 초 만에. 고통은 없었다고 의사가 분명하게 말했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부터 소설이 끝나는 장면의 "얘들아, 이리 와. 목욕할 거야."라는 대사에 이르기까지 이전에 똑 같은 상을 탔던 선배 작가 에밀 아자르나 파트릭 모디아노의 몽환적인 글들에 비하면 한결 선명하고 단호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음악 비즈니스에서 일하는 폴과 법조계에서 새롭게 두각을 나타내고 싶어하던 미리암이 등 두 젊은 중산층 부부가 아이들을 돌봐줄 보모를 구하는 에피소드로 시작해서 너무나 일 잘 하고 나무랄 데 없었던 보모 루이즈가 어느날 갑자기 돌변해 두 아이를 살해한 뒤 자신도 자살을 기도한 사건을 다룬 짧은 소설이다. 레일라 슬리마니는 뉴욕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을 파리로 가져와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내가 이렇게 소설의 내용을 거침없이 밝힐 수 있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첫 챕터에 모두 나오기 때문이다. 살인이 벌어지긴 하지만 함정이나 서스펜스가 없는 이야기.
그렇다면 이건 무슨 소설일까. 소설가에겐 어떤 스토리를 던지고 그 시퀀스들을 흥미진진하게 이끌어 가는 것도 주요하지만 등장인물들에게 왜 그런 스토리가 생겨나게 되었을까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리고 문학성이 높거나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일수록 등장인물에 대한 묘사나 전후 설명이 더 밀도 높고 입체적으로 이루어진다. 아기가 죽었다는 사실만 밝히고 제대로 된 살해 방법조차 언급되지 않는 첫 챕터를 단숨에 읽은 후 나는 레일라 슬리마니의 소설 [달콤한 노래]는 명백하게 후자에 해당하는 작품임을 직감했다.
누가 죽였느냐,가 초반에 이렇게 밝혀진다면 이제 남은 건 왜 죽였느냐 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서도 왜 루이즈가 아이들을 죽이게 되었는지 직접적인 동기는 쉽사리 알 수가 없다. 다만 이 집으로 들어와 처음에는 요정이라는 찬사까지 받던 루이즈라는 여자가 어느 순간부터 폴과 미리엄의 경계를 받는 처지가 되고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일련의 에피소드들을 하나 하나 읽어나가다보면 마지막엔 그녀의 심리상태가 가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이르렀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런 팩트들은 레일라 슬리마니라는 뛰어난 작가에 의해 마치 가장 잘 아는 사람에게 그 사람 얘기를 시시콜콜 듣는 것처럼 내밀한 부분까지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이는 루이즈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노동계층인 루이즈에게 공정하게 대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선량한 부부이면서 동시에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교양 있는 직장인인 폴과 미리암을 묘사한 대목을 잠깐 읽어보자.
삶은 이런전런 책무와 완수해야 할 계약, 잊으면 안 될 약속의 연속이 되었다. 미리암과 폴은 일로 정신이 없다. 그들은 그렇게 일에 치인다는 것이 곧 성공을 알리는 징표이기라도 한 듯, 끊임없이 정신이 없다는 말을 한다. 그들의 삶은 용량을 초과해서, 남은 자리는 겨우 잠을 자기 위한 것일 뿐, 무언가를 응시할 자리는 전혀 없다.
살고 있는 도시만 다를 뿐 성공을 바라보며 일에 치여 허덕이는 것은 우리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아이들이 생기기 전 폴이 언젠가 미리엄에게 했다는 "우리 여행도 많이 하고, 아이는 팔 밑에 끼고 다니자. 당신은 대단한 변호사가 될 거고, 나는 잘나가는 아티스트들을 프로듀싱할 거야. 아무것도 달라질 건 없어"라는 말은 오래 전 읽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마스터 키튼]의 한 에피소드 중 "난 서른다섯 살에 중역, 마흔엔 사장이 될 거야. 그럼 은퇴를 하고 세계 여행을 떠나자. 당신은 사교계에 데뷔를 하고 난 그레이엄 그린 같은 소설가가 될 거야...당신이 청혼하면서 내게 한 말이야." 라는 어느 주인공 여자의 대사로 겹쳐진다. 어느 것 하나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기댈 언덕이 있었던 폴이나 미리암과 달리 루이즈에겐 아무 것도 없었다. 난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 폴 가족이 근교에 있는 친구 농장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시내에서 루이즈를 목격했을 때다. 루이즈는 그들을 보지 못하고 쇼윈도 사이를 허정허정 걸어다니고 있었는데 이는 미리암이 자기 집에 있지 않은 상태의 루이즈를 처음 보는 것이었다. 미리암이 차 안에서 루이즈를 멍하니 쳐다보며 '이야기를 착각하고 낯선 세상에 와 있는, 영원히 떠돌아야 할 운명을 선고받은 인물 같아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어린 아들이 "루이즈 아줌마 어디 가는 거야?"라고 묻고 미리암은 "집에 가는 거지. 자기 집으로." 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루이즈는 그때 이미 세든 집에서도 쫓겨날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씬이다.
루이즈가 원래는 착한 여자였는지 악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인간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나라에 왔던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는 "나는 살인에 대해 설명하기보다는 모욕의 순간들을 자세히 묘사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모욕이 있고 모순과 소외가 존재한다. 그리고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 프랑스의 젊은 소설가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사건을 수사하던 경감의 현장검증을 앞두고 끝나는 이 소설은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건 단지 보모의 살인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커다란 질문부터 시작해 관계의 문제, 내가 속한 세상에서 밀려나는 것에 대한 공포,영원히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실존적 절망...그래서 이 이야기는 파리에 사는 루이즈나 미리암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뉴욕에서 실제로 아이들을 살해했던 보모의 범행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작가도 몰랐을 것이다. 사실에 대한 단서가 적을수록 '돌아갈 곳 없는 외로운 사람의 절망적 선택'이라는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은 더 큰 힘을 얻는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뛰어난 소설가들은 아주 작은 기사 한 줄만 읽고도 훌륭한 소설을 써낸다는 사실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신문 귀퉁이 1단 기사에서 전당포 노파 살해사건을 접하고 구원과 심판에 대한 걸작 [죄와 벌]을 썼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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