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얼마 전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고싶다는 얘기를 한 게 기억나서 광복절 낮에 명동CGV 씨네라이브러리에 예약을 하고(내가 하려고 했는데 아내가 포인트가 많다고 자신이 한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가서 그 영화를 봤다. 나는 2008년도에 무슨 국가대표전 축구경기가 있던 날 저녁에 청담CGV에 가서 혼자 이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난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단발머리 연쇄 살인마 안톤 쉬거. 거의 십 년만에 극장에서 다시 만나는 작품이라 가슴이 설레었다.
주인이 안톤 쉬거에게 어디서 왔냐고 무심코 물었다가 졸지에 목숨을 걸고 동전 던지기를 하게 되는 수퍼마켓 장면은 대사, 연기, 호흡까지 지금 봐도 역시 끝내준다. 이건 코맥 맥카시의 원작소설이 있지만(소설도 사서 읽었다) 역시 이건 코엔 형제표 영화라고 말하는 게 어울린다. 이백만 달러가 든 돈가방과 연쇄살인마를 먼지바람 횡횡 부는 텍사스로 불러내 인간사 전체를 차갑게 비틀며 조롱하는 이야기를 이 형제만큼 잘 할 사람이 또 있을까. 원래 조엘 코엔은 형 에단 코엔이 쓴 시나리오를 타이핑 해주다가 자기도 얼떨결에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고 겸손을 떨지만 사실은 비트켄슈타인에 대한 논문을 쓴 적이 있을 정도로 철학과 인문학에 조예가 깊다고 한다.
영화 시작한지 120분쯤 지나면 안톤 쉬거는 교통사고를 당해 기진맥진한 상태로 어디론가 사라지고, 돈가방도 사라지고 화면이 바뀌어 늙은 보안관 토미 리 존스가 아내에게 지난 밤 꿈 얘기를 하다가 영화는 갑자기 맥없이 끝이 난다. 팽팽하던 122분의 러닝타임이 다 지나고 불이 켜졌다. 아, 어려워. 아내가 말했다. 그러게. 나도 어려워. 내가 말했다. 왜 나한테 이 영화 보자고 했어? 하하. 그러게. 근데 되게 재밌지 않아? 도대체 감독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글쎄...인생은 절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아니면 인생은 누구든 잘 안 풀리게 되어 있으니 희망을 버려라...? 나, 참.
적어도 두 가지는 분명한데, 첫 번째는 다시 봐도 무척 재미 있고 동시에 어렵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매력이 철철 넘치는 작품이라는 것. 하비에르 바르뎀처럼 센 캐릭터가 나와 진지하고 섬뜩하게 굴면서도 가끔 뻔뻔하게 웃기는 것까지 잊지 않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얼마 전 [시카리오2]에서 무시무시한 카리스마를 뿜어냈던 조슈 브롤린은 또 어떤가. 번번히 살인마를 놓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보안관 토미 리 존스는 또 어떤가. 처음 이 영화를 기획할 때 코엔 형제가 쓴 시나리오를 먼저 읽은 토미 리 존스는 어디서 단발머리를 한 기괴한 사내의 사진을 가져왔다고 한다. 안톤 쉬거의 헤어스타일로는 이게 딱이라고. 사진을 본 하비에르 바르뎀은 '아, 씨발...'이라고 뇌까린 뒤 조용히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희대의 살인마 캐릭터인 안톤 쉬거가 탄생했다.
누구든 돈가방을 보고 그냥 지나갈 순 없다. 르웰린도 마찬가지였다. 황량한 텍사스 사막 한복판에서 마약상들이 자기들끼리 총질을 하다가 죄다 죽어버린 현장을 발견했다. 다 죽었고 언덕에 있는 시체 옆에 놓인 가방엔 이백만 달러가 들어 있다. 안 가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르웰린은 생각한다. 어떡하든 이 돈을 가져야겠어. 그러나 안 그러는 게 좋았다. 이 돈가방을 추척하는 사람이 다름아닌 안톤 쉬거니까. 아, 그냥 잘 걸. 괜히 죽어가는 놈 물을 떠다 준다고 거길 간 게 잘못이었어. 아니면 우디 해럴슨의 제안처럼 적당히 나눠 가질걸. 그러나 이 또한 소용 없다. 어떤 선택을 했더라도 결과는 별로 달라지진 않았을 테니까. 코엔 형제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러하다.
커다란 산소통을 들고 다니다가 사람 머리에 공기 구멍을 내서 죽이는 안톤 쉬거. 그도 돈가방을 쫓긴 하지만 돈을 원하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죽이기로 정한 사람을 꼭 죽이는 게 더 중요하다. 왜? 어차피 죽거나 죽이는 것 말고는 확실한 게 없으니까. 그런데 돈가방은 어디로 간 걸까.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들 만도 한데, 이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그 느리고 무시무시한 편집감에 취해 아무 생각도 못하게 된다.
재미 있는 이야기 하나 더. 폴 토머스 앤더슨이 [데어 윌 비 블러드]를 찍으러 텍사스에 갔다가 아침에 여관에서 나오는데 마침 코엔 형제가 지나가고 있었다고 한다. 여긴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를 찍는 중이라고 했다나. 그 넓은 텍사스에서 그런 대가들끼리 그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참 신기한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보다 더 신기한 일은 그 해에 [데어 윌 비 블러드], [주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같은 걸작들이 다 개봉을 했다는 사실이다. 우리 같은 관객들에게 그건 우연을 넘어 행운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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