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떠난 많은 사람들이 길 끝에 이르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대단한 감동이 있든지 아니면 대단한 허무라도 있든지. 영화 <황해>로 남우주연상을 이 년 연속 타게 된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무심코 내뱉었던 다짐 때문에 졸지에 577킬로미터 국토 대장정을 하게 된 배우 하정우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대장정을 마치고 나서 그의 생각이 좀 바뀌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길 끝에서 느낀 거대한 허무가 아니라 길 위의 나를 곱씹어보게 되었다. 다시 오지 않을 그 소중한 시간에 나는 왜 사람들과 더 웃고 떠들고 농담하며 신나게 즐기지 못했을까. 어처피 끝에 가서는 결국 아무것도 없을 텐데."
우리는 마음이 심란하고 소란할 때 그 마음을 어떻게 하기보다는 몸을 어떻게 해보는 경우가 더 많다. '나'라는 작은 우주 안에서의 '성동격서'라고나 할까. 몸을 괴롭히다 보면 뜻밖에 마음이 맑아지기도 하니 말이다. 그런 몸의 움직임 중 가장 쉬운 것은 걷기, 즉 산책이다. 걸으면서 생각이 정리되고 마음이 가라앉는 경험을 많이 해서 나도 매일 오후 산책을 즐기는 편이다. 그런데 하정우의 경우는 그 산책의 강도가 남다르다. <아가씨> 촬영 때는 출근길 편도 1만6천보를 매일 걸어놓고는 '이 정도면 상쾌하다'라고 할 정도이니.
연예인이나정치인이 쓴 책을 잘 읽지 않는 편이다. 대부분 남들이 써준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하정우의 책은 읽어보고 싶었다. '어차피 길 끝에 가면 아무 것도 없을 텐데, 왜 걷는 동안 나는 웃고 떠들며 즐길 수 없었을까?' 같은 통찰은 걷는 자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매일매일 꾸준히 걸어다는 사람이라면 알록달록하고 재치있는 글을 여기저기 깔아놓기 보다는 인생의 본질을 바라보는 지긋한 시선이 있을 거라는 기대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집으로 오는 길에 이 책을 샀다. 이제 50페이지쯤 읽었다. 매일매일 '걷는 마음으로' 천천히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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