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의 음식 산문집 [오늘 뭐 먹지?]에서 오이지무침 부분을 읽다가 난데없이 반성 아닌 반성을 해야 했다. 오이지무침은 소설가 권여선이 여름 내내 떨어뜨리지 않고 해먹는 밑반찬인데 탈수가 생명이란다. 그런데 여자의 악력으로는 꼬들꼬들한 오이지 식감이 나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손목을 보호하기 위해 오이지를 짜던 베보자기를 그대로 펼쳐 냉장고에 넣고 서너 시간 말렸다 무치는 꾀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평소 음식용 짤순이가 있는 작은어머니를 부러워하던 그녀가 그러다 어느 날 발견한 방법은...


"요즘은 한결 수월하게 애인을 불러 짤 것을 명한다. 애인이 인정사정없이 쥐어짠 오이지는 꼬들꼬들을 넘어 오독오독하다. 정말 내 애인이라서가 아니라 이 친구가 악력 하나는 타고났다. 그러니 날 놓치지 않고 잘 붙들고 사는 것이지 싶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그렇지. 애인이나 남편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지...'라고 중얼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악력이 약하다. 일단 손이 작기도 하고 요령도 없다. 태어날 때부터 손재주를 타고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집에서 와인을 딸 때도 늘 아내가 와인병을 잡는다. 내가 따면 따개 스프링이 코르크마개를 비뚤게 관통해 마개가 쪼개지기 일쑤라 늘 야단을 맞는다. 게다가 난 손목도 약하다. 군대 가서 오른쪽을 다쳤기 때문이다(군대 가서 다쳤다고 하면 다들 훈련하다 다친 것으로 오해해 줘서 약간 폼이 나긴 하는데 사실은 이등병 때 내무반에서 걸레질 하다가 손목에 너무 힘을 주고 미끄러져 크게 접지른 것이었다). 

아무튼 안 그래도 약한 게 많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그 항목에 '악력' 하나를 더 추가하게 되었다는 슬픈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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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복숭아말랑이 2018.10.05 15: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책 표지가 너무 마음에 듭니다!! 요리 입문하는데 괜찮겠죠?


드디어 어제 '독하다 토요일' 의 첫 모임이 있었습니다. 대학로에 있는 '책책'에서 모두 11명이 모였는데 한 곳에 모여서 똑같은 책을 읽는다는 게 과연 어떨까, 하는 약간의 걱정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생각보다 즐겁고 재미있는 모임이있습니다. 옆집 총각 서동현처럼 자주 보는 사람도 있었고 김인혜 씨나 김성희 씨처럼 처음 뵙는 분도 있었습니다. 특히 김인혜 씨는 멀리 청주에서 KTX를 타고 오셨다고 해서 더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우리가 모여서 한 시간 동안 읽은(각자 묵독) 책은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였습니다. 저는 맨 앞에 있는 단편 <봄밤>과 <이모>를 꼭 읽으라고 추천을 했는데 다들 만족스러워 하셔서 다행이었고 정아름 씨 같은 경우엔 <삼인행>이 가장 좋았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 행사를 기획한 윤혜자 씨는 작년에 일본에 연수를 가서 느낀 소회를 얘기하며 일본 사람들이 해외문학을 읽게 하려 노력하는 것을 보고 자기는 오히려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우리 문학을 읽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6개월간은 우리 문학만 읽고 그 후에 해외문학을 읽을지 시를 읽을지는 천천히 얘기해 보자고 했습니다. 가능하면 지금 활동하는 작가를 모임에 직접 초청하는 것도 고려해 보겠다는 계획도 귀뜸을 했습니다. 

제가 권여선의 이 작품집을 첫 책으로 선택한 이유를 묻길래 작년에 읽은 책 중 가장 인상 깊었고 전부터 이 작가의 작품을 좋아해서 그랬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술을 좋아하는 저는 알콜중독으로 인생이 망가지는 주인공의 이야기에 깊은 공감을 느꼈고 그 처연함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더니 김인혜 씨가 자기는 <봄밤>을 읽고 대성통곡을 했다고 하셔서 매우 신기하고 기뻤습니다. 

공무원으로 일하는 김성희 씨는 소설 속 주인공 수환이 영경을 만나기 전에 언제든지 자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단검처럼 지니고 살았다는 문장이 정말 기억에 남았다고 말씀하셨고 고등학교 영어교사인 임기홍 씨는 소설 속 인물들이 너무 치열하게 사는 것 같아 마음이 스산했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회사원 정아름 씨는 아름다운 커플처럼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특히 톨스토이의 [부활]에 나오는 분자 분모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다고 했습니다. 프리랜스 헤드헌터인 손연영 씨는 봄밤으로 시작해서 봄밤으로 끝나는 이 소설이 일상은 소소한 사건과 대화들이 이어져 결국 한 사람의 삶이 된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옆집 총각이자 화장품 회사 부장님인 서동현 씨는 봄밤이라는 제목과 달리 일상이 증발하듯 바짝 말라버린 주인공들의 삶이 너무 서글펐다고 했구요. 글을 쓰는 김하늬 씨는 한계에 부딪힌 사람들이 새로운 한계를 만났을 때 그걸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읽었다고 했습니다.  

<봄밤> 말고도 <이모>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한 시간동안 책을 읽고 이십 분 정도 시간을 내 각자 '세 줄평'을 써보기로 했는데 모두 다른 각도에서 작품들을 접근하는 게 재미있고 신기했습니다. 덕분에 작품을 더 깊이있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책책'에서의 모임이 끝나고 대학로 '문샤인'에 가서 와인과 요리를 조금씩 더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와인 두 병은 저희 부부가 냈고 나머지 요리값은 공평하게 N분의 1을 했습니다. 다음 달 두번째 토요일 2시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다음에 읽을 책은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입니다. 

우리는 문학청년도 아니고 열렬한 지식인도 아닙니다. 그러나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목적 없이 토요일 오후에 그런 사람들이 선의를 가지고 모인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습니다. 요즘은 책을 읽는 사람이 드물어서 그런지 드러내놓고 자랑하기도 멋쩍은 무슨 비밀 모임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계속해서 가볍고 사소한 모임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끝으로 오늘 제가 썼던 세줄 평을 덧붙여 봅니다. 

<봄밤 세 줄평> 
영경이 편의점에서 소맥부터 시작해 여관에 들어가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시는 장면들 묘사는 정말 압권이다. 슬프고 아픔답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프랑스와즈 사강의 법정 진술은 김영하의 데뷔작이 아니라 권여선의 <봄밤>에 와서야 비로소 육체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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