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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일기 51

음주일기 2012. 2. 29. 00:19



 
저는 우리 동기 애들이 정말 싫어요. 술도 너무 잘 마시고 또 체력이 좋아서 뻑하면 밤을 새고 노는 무서운 애들이거든요. 그래서 이번 송년회도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 안 가려고 노력했지만, 지난번 술자리에서 꼭 나가겠다고 하도 굳게 약속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없이 나가게 된 거예요. 믿어주세요. 그래요. 이번 일도 결국은 제가 불행을 자초한 거죠.
 
다사다난이란 말은 매년 연말만 되면 지겹도록 되풀이되는 사자성어지만 ‘다사’와 ‘다난’에 또다시 이렇게 새로운 항목을 추가하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은 차가 막히는 구산동 사거리의 택시 안에서부터 스멀스멀 온몸을 휘감더란 말이죠.

약속시간보다 거의 한 시간이나 늦게 도착한 서오능 열두마당이라는 고기집엔 벌써 아이들이 많이 모여있었어요. 연말이라 이런저런 약속도 많을 텐데, 얘들은 바쁘지도 않은가 봐요.

저는 입구에서 만난 한숙이가 주차를 하는 동안 담배를 피우는 척 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들어가면 그때부터 쉬지 않고 계속 술을 마셔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총무인 민석이가 바쁘게 돌아다니며 이 상 저 상 술과 고기를 챙기고 있었어요. 저는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아직 불판을 올리지 않은 상에 가서 앉았어요. 저쪽 상에 앉아서 술을 마시던 정노와 상엽이 준성이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어요. 오른쪽 상엔 명옥이 옥희 한숙이 미옥이 등이 모여 앉아 있었구요. 수염 난 여자애가 하나 끼어있길래 자세히 봤더니 계천이었어요.
 
술잔을 채 잡기도 전에 민석이가 회비를 거두러 샤일록처럼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오더군요. 종이가방엔 벌써 회비로 거둔 만 원짜리 지폐들이 그득했어요. 저는 회비를 내고 종원이와 함께 술을 마셨어요. 우리 옆에 있는 희선이에게도 익은 고기를 좀 집어주면서 말이죠. 정노가 한 박스나 가져왔다는 생굴도 좋은 안주였어요.
 
종원이는 어제 추운 날씨에 덜덜 떨면서 골프를 치고 새벽 네 시까지 술을 마셨다면서도 뭐가 그리 급한지 술을 벌컥벌컥 마셨어요. 서로의 위 속에 헬리코박터균과 간염 바이러스를 심는다는 그 무서운 ‘술잔 돌리기’까지 하면서 말이죠.
 
한참 술을 마시고 있는데 성규가 도착했어요. 이놈은 신도초등학교 동문도 아닌데 지난번 체육대회 때 협찬을 계기로 우리 모임의 특별회원이 된 놈이에요. 어차피 초등학교 친구 절반이 중학교나 고등학교 동창과 겹치니까 성규도 무리 없이 우리들과 어울리게 된 거죠.
 
정노 집들이 때 안면을 텄던 종원이와 성규는 새삼 반갑게 인사를 하고 술을 마셨어요. 그래요.여긴 누구든 술로 인사하고 술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알코홀리랜드’였던 거에요.
 

그러나 더 무서운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어요. 지난 일 년간 임원을 맡아 했던 한식이와 정현이 민석이가 마지막 인사를 하고 새 임원을 뽑는 자리기 시작된 거죠. 사회를 맡은 민석이는 ‘오래 끌면 술 마시는 데 방해된다’는 이유만으로 급하게 회의를 몰아가고 있었어요. 임원 선출이 아니라 인민재판에 가까운 통보 방식이었어요.
 
갑자기 제 이름이 불리는 걸 듣고 저는 마치 공회당 마당에 끌려 나온 반동분자처럼 엉거주춤 일어나 끝내 수락을 하고 말았어요. 술을 먹여 판단력이 흐려진 데다가 불법으로 법안을 통과시키는 여당의원들처럼 땅,땅,땅! 단숨에 해치워버린 솜씨에 꼼짝없이 걸려든 거죠. 그래서 전 졸지에 이 모임의 임원이 되었어요.
 
저를 선출시킨 아이들은 마치 큰 껀을 하나 해치우고 나서 폭탄주 말아 돌리는 한나라당 의원들처럼 연방 희희낙낙 술을 마셨어요. 모든 걸 포기한 저도 대책 없이 술을 마시고 또 마셨어요. 정말 오랜만에 보는 원태랑 술을 마셨고 그보다 더 오랜만에 보는 재선이랑 술을 마셨어요. 마시고 또 마시니 못 마실 것도 없었어요.

재선이는 왜 그렇게 연락을 끊고 살았냐며 저를 야단쳤어요. “전에 ‘난 결혼 안 할거야’라고 하더니 진짜 안 했네?!” 하며 저를 놀려대기도 했어요. 저는 얼마 전 흥배형 만난 얘기를 했고 우리가 고등학교 때 중국집에서 낮술 마시고 곧장 명보극장에 들어가서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보기 전 그 형이 애국가를 따라 불러서 기립박수 받았던 얘기를 하며 웃었어요. 재선이가 옛 친구 인구의 전화번호를 알려줬어요. 경태랑 연락해서 한 번 보자는 거죠. 걔들도 정말 오래된 친구들이에요.

삼만 원이라는 저렴한 회비 치고는 좀 과하다 싶게 많은 술과 고기를 넉넉하게 해치운 우리들은 지난번처럼 또 이차로 노래방엘 갔어요.우리 친구들은 놀면 놀수록 힘이 솟는 어린이 체질인가 봐요. 노래방에서도 맥주를 마시면서 우리는 미친 듯이 노래를 불렀어요.
 
준성이와 저는 손님들에게 불려온 전속 밴드의 마스터처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종횡무진 활약을 했어요. 물론 다른 친구들도 열심히 춤 추고 마시며 노래를 불렀구요. 그래도 우린 참 건전한 모임이에요. 술 마시고 꼬장 부리는 아이 하나 없고 눈살 찌푸리게 하는 엉뚱한 스킨쉽이나 터치도 없으니까요. 아마 멤버 중에 눈에 확 띄는 미남 미녀가 없어서 더욱 건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나 봐요.
 

노래방에서 실컷 놀고 난 후라 어지간히 지치기도 했을 텐데 철없는 친구들은 또 용감하게 삼차를 외쳤어요. 실내 포장마차에 가서 해물에 소주를 마셨어요. 일찍 돌아간 몇몇 친구들 빼고는 다 참석한 엄청난 자리였어요. 플라스틱 테이블을 일렬로 길게 붙이고 앉은 우리들은 지치지도 않고 술을 마셨어요.저는 너무 지쳐서 잠깐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졸기도 했죠.

결국은 사차를 가고 말았어요. 자랑스러운 친구들이 아닐 수 없어요. 노래방에서 나올 때 누군가가 제게 목도리를 매줬는데 가방에 넣어놨다가 소주집에서 꺼냈더니 민석이가 주인을 찾아주겠다며 가져갔어요. 이미 우리들의 몸 속엔 피보다 알코올이 더 많이 돌고 있는 수준이었지만 술자리는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었어요. 민석이가 “어차피 늦은 거, 아침까지 계속 마시다가 지하철 타고 가.”라는 무서운 멘트를 날리더군요. 참으로 무모한 발언이었지만 그때는 술이 취해서 그런지 꽤 설득력 있게 들렸어요.
 

날이 훤하게 밝았어요. 어떻게 지하철을 탔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수서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자다가 일어나 버스로 갈아탔어요. 새벽 날씨가 매섭게 춥더군요.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니 졸음이 몰려왔어요. 아마 저를 본 주민들은 “일요일에 이렇게 일찍 일어나 돌아다니다니, 저 사람도 나처럼 부지런한 인간인가 보군.” 이라 생각했을 거예요. 저는 파리한 낯빛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고 집으로 들어갔어요.
 
저는 정말 우리 동기들이 무서워요. 요즘 일박 이일로 술을 마신 게 몇 차례 되는데, 다 얘네들하고 그런 거예요. 그런데 이젠 제가 그 모임의 임원까지 되었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오늘 오후에 일어나 제 홈피에 가보니 상조가 방명록에 글을 남겼더군요. 겉으로는 잘 들어갔냐는 안부인사였지만 ‘이제 임원이 됐으니 똑바로 해.’라는 은근한 압박이라는 걸 제가 모를 리가 있겠어요. 여러분들도 혹시 길을 가다가 우리 동기들이랑 마주치거든 아는 체 하지 말고 얼른 피하세요. 얘네들, 진짜 센 녀석들이거든요.

(2008.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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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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