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과 레베카 솔닛의 저서 등등을 필두로 페미니즘 논쟁이 한참 달아 올랐을 때 나는 아내에게 '그 논쟁들이 이해는 되지만 저렇게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건 좀 과한 것 아니냐'는 얘기를 했다가 '밤에 혼자 택시를 타거나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걸어 집으로 가야 하는 여자들의 두려운 심정을 남자들은 모른다’라는 핀잔을 들었다. 맞는 말이다. 역사를 뜻하는 단어 ‘History’가 he+story, 즉 ‘그의 이야기’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남성 중심적 사고가 당연한 세상에서 살아온 내가 여자들의 근원적인 공포나 억울함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도 모른다. 물론 그래서 자꾸 공부하고 토론하고 해야하는 것이겠지만.

그런 면에서 이 영화 제목에 등장하는 ‘여배우’라는 단어는 좀 퇴행적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하게 된다. 일단 배우가 감독한 영화, 라는 선입견을 제거한 채 보기는 힘들었고 감독이 문소리라는 여성이지만 ‘여류 작가’라는 말이 사라졌듯이 배우면 배우지 앞에 꼭 젠더를 표시해야 한단 말인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되는데 이는 첫번째 단편 <여배우> 편을 보고 나면 이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떡끄떡 하게 된다.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나이 든 여배우로 산다는 게 얼마나 애매하고 힘든 일인지는 문소리가 친구들과 등산길에서 만난 천만 관객 감독과 그 동료들을 통해 뼈저리게, 질리도록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연기 잘 해서 탄 트로피들은 빛 좋은 개살구이고(야, 나 메릴 스트립 아냐) 현실은 젊고 이쁜 여배우들이 득세하는 세상이라 문소리가 할 역할은 ‘성격 센 정육점 여자’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 ‘야, 나 이뻐 안 이뻐?’라고 매니저에게 묻는 장면이나 남편인 장준환 감독의 ‘그럼 술이라도 줄이세요’ 등의 빵 터지는 대사는 페친인 성수선 작가 담벼락에서 이미 읽어서 새로울 게 없었고 여배우 문소리의 고충도 짤막한 영화 소개 기사들을 읽어보면 그리 짐작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혹시 영화 내내 그런 투정과 신세한탄만 들입다 쏟아지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있었다. 그러나 웬걸, 첫 단편 <여배우>를 지나 두 번째 <여배우는 오늘도>, 그리고 세 번째 <최고의 감독>으로 갈수록 영화의 시야는 넓어지고 시나리오의 유머와 공감대는 신랄하면서도 깊어진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진 걸까. 이 영화는 문소리가 중앙대 대학원 졸업작품으로 만든 단편에 새로 만든 단편들을 더 붙여서 옴니버스로 구성한 독립영화다. 당연히 문소리라는 개인의 이야기로 시작했으며 그가 매니저와 함께 타고 다니는 밴 안에서의 일상이 주를 이룬다. 등산길, 주점, 노래방, 일식집, 은행 등의 장소에서 여배우의 피곤한 일상들이 펼쳐지고 성병숙이 연기하는 엄마와의 실갱이나 요양원의 시어머니 같은 픽션들이 더해질 땐 살짝 스테레오타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마지막 장례식장에서 그 포텐이 터진다.

세 번째 작품 <최고의 감독>은 십사년 전에 문소리와 '햇빛 좋은 날’인가 하는 영화 한 편을 찍고 계속 방황하다가 갑자기 작고한 '이 감독님’의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얘기다. 예전의 의리를 생각해서 잠깐 문상만 하고 오려던 문소리는 장례식장에서 “어이, 문 스타!”라고 비아냥거리는 옛 동료 배우와 마주치게 된다. 인기도 없고 늙고 비루한, 예전엔 문소리 좋다고 따라다닌 적도 있지만 결국엔 이혼 당한 채 지금 아무도 없는 장례식장에서 술에 취해 문소리에게 주정을 해대는 남자. 서로 가치 돋친 대화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뒤늦게 도착해 대성통곡을 하는 신인배우 서연이와 함께 망자에 대한 엇갈린 평가와 예술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싸우게 된다.

처음엔 누가 저렇게 연기를 잘 하나 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화제의 연극 [미국인 아버지]로 이름을 날린 배우 윤상화였다. 그리고 철없으면서도 속이 빤히 보이는 신인 역은 전여빈이라는 배우였다. 전여빈은 학교 선배인 문소리의 첫 단편 <여배우>를 보고 SNS에 영화의 한 장면을 캡처한 뒤 ‘문소리 감독님, 저와 함께 작업해 주십시오’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마술처럼 세 번째 영화에 캐스팅이 돼서 마지막 단편을 같이 찍게 된 것이었다. 연기력 좋은 두 배우와 문소리의 케미에 마지막 불을 당기는 건 이 감독의 미망인으로 나오는 배우 이승연이다. “나가 주실래요?” 라는 대사가 순식간에 “나가라고, 이 썅년아!”로 변화되는 짧은 순간에 야무지게 전여빈의 머리채를 움켜쥐는 그의 연기는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뛰어나서 보는 이들에게 대단한 쾌감을 제공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일본 만화 [음주가무 연구소]가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음주가무연구소 소장 겸 술주정뱅이인 나노미냐에요”라고 도도하게 시작하다가 결국엔 망가지고 마는 그 유쾌한 만화처럼 이 영화에서도 문소리는 걸핏하면 썬글라스를 챙겨 쓰고 연예인인 척 하지만 결국엔 찌질하고 불안한 민낯을 드러내곤 한다. 그러나 마지막 장례식장 시퀀스에서는 고슴도치처럼 싸우던 상대들이 함께 ‘화해의 맞담배’를 피운 후 새벽 묘지를 지나 이차를 가는 모습은 사뭇 감동적이다. 

따지고 보면 아둥바둥 살 일이 뭐 있나. 이 감독의 예술 세계도, 이 감독이 서연이와 잤는지 안 잤는지도 뭐 그리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 결국 이 밤이 지나면 문소리는 또 한 명의 여배우로 살아갈 뿐이고, 그건 이 영화를 보는 다른 관객들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영화는 묻고 있는 듯하다. 문소리 개인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결국은 모든 사람들의 인생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설픈 교훈보다는 공감과 유머를 던질 줄 아는 이 넉넉한 시선이 감독 문소리의 다음 영화를 기대하게 한다. 극장에서 보기 바란다. 짧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걸 보면 당신도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될 것이라 장담한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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