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PT 준비로 한참 바쁠 인터넷 서점을 통해 살만 루시디의 [한밤의 아이들] 샀다. 그의 [무어의 마지막 한숨]을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이다(라고 쓰면 매우 폼나겠으나, 사실은 하권까지 읽다가 말았다). 바빠서 책을 읽다가 마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런데 도중에 한 번 덮은 책은 다시 읽기가 참 힘들다. 그러면서 새 책에 대한 유혹은 끊임없이 들어온다. 사는 게 다 이렇다. 이 책도 사실은 여기저기서 워낙 제목을 많이 들어봤기 때문에 언젠가는 꼭 읽어보리라 오래 전부터 다짐하고 있던 작품이었다. 


소설 시작 전에 작가가 25년만에 다시 쓴 서문이 나오는데 거기서 작가는 제목을 정할 때 ‘자정의 아이들(Children of Midnight)’은 너무 진부했고 ‘한밤의 아이들(Midnight’s Children)이 좋은 제목이었다,라고 생각한 순간부터 글이 잘 써졌다고 고백한다. 나로서는 그 두 제목이 어떻게 진부하거나 그렇지 않은지 아직은 잘 모르겠으니 책을 완독한 후에 이유를 찾아봐야겠다. 지금 현재 110페이지를 조금 넘게 읽었다. 권당 500페이지에 가까우니 이제 한 십분의 일을 읽은 셈이다. 


젊은 시절 런던의 ‘오길비 앤 매더’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한 적도 있는 살만 루시디는 매력적인 작가다. 이 책 역시 [무어의 마지막 한숨처럼]처럼 거침없고 끈적끈적 유연한 말과 글의 향연이 ‘전설따라 삼천리’처럼 구비구비 펼쳐진다. 이야기의 시작은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하는 날 자정에 태어난 살림 시나이라는 남자애부터다. 일단은 그 이유로 ‘한밤의 아이들’이다. 


그런데 소설의 화자인 살림은 자기 얘기가 아니라 그 옛날 독일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인도로 돌아온 자신의 외할아버지 아담 아지즈 때로 돌아가 거기서부터 기나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어릴적부터 아담의 나이 많은 친구이자 수다장이인 뱃사공 타이를 등장시켜 시공간을 가르는 각종 ‘구라’들을 끝도 없이 펼치게 한다. 아담 할아버지가 구멍 뚫린 침대보를 사이에 두고 진찰(다 큰 여자가 남자에게 처녀가 함부로 몸을 보여줄 수 없으니까)을 계속 하던 부잣집 처녀와 결혼하게 되는 얘기를 시작으로 영국의 식민과 독립을 향한 인도의 정치상황까지 별의 별 이전 얘기를 붙들고 국을 끓이고 있으니까 옆에서 보고 있던 그의 아내 파드마가 와서 “이런 속도로 가다간 당신 탄생에 대해 얘기하기도 전에 이백 살이 돼버리겠어요.”라고 투덜대기까지 한다. 마치 밀란 쿤데라의 [불멸]에서 작자인 밀란 쿤데라가 나와 “내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제목을 잘못 정했어. 사실은 이 책의 제목으로 썼어야 하는 건데.”라고 투덜대는 것만큼 재미있다. 



이 책을 사기 전에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이라는 노르웨이의 추리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 600페이지가 넘는 작품인데 구성이 치밀하고 짧고 재빠른 대사들도 멋지다. 해리 홀레라는 연쇄살인 전문형사반장을 등장시켰는데 살인에 대한 묘사와 흥미로운 캐릭터 등등이 빛을 발하고 소설 곳곳에 영화나 음악에 대한 통찰력까지 번뜩인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데니스 호퍼의 [뒤로가는 남과 여]라는 영화에 대해 언급할 때는 너무 반가워 혼자 소리를 지를 지경이었다. 이 소설의 작가인 요네스 뵈는 노르웨이의 국민작가이자 뮤지션이고 저널리스트이며 경제학자란다. 도대체 잘난 놈들이 너무 많아서 살 수가 없다. 어쨌든 구정 시즌을 이용해 이 책에 대한 리뷰도 좀 써봐야겠다. 그러나 일단 살만 루시디의 책이 먼저다. 술과 TV, 잠, 영화 등등 여기저기 ‘치즈 인 더 트랩’처럼 유혹이 널려있는 연휴다. 과연 나는 이 역경을 딛고 [한밤의 아이들]이란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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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많은 글입니다. 


SNS와 모바일의 시대로 변하면서 ‘스포일러’에 대한 경각심은 어느 때보다 더 커지고 있습니다. 이젠 누구나 영화를 본 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사회적 관계망’에 감상평을 실시간으로 올리기 때문에 영화의 주요 내용이나 감상평도 미리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 것이죠. 그래서 영화를 보기 전에 그 영화에 대한 기사나 리뷰를 절대 보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스포일러는 그렇게 나쁜 것일까요? 아니, 그보다 먼저 스포일러가 정말 그렇게 흔한 걸까요? 스포일러는 스릴러나 추리물 등에서 반전이나 의외의 결말을 미리 알려 보는 이의 김을 빼는 행위를 말합니다. 종로3가 피카디리극장 앞에서 [유주얼 서스펙트]를 보려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남자가 버스 창문을 열고 “범인은 절름발이다!”라고 소리친 사건이 가장 유명한 스포일러 사례입니다. 물론 저도 어느날 저녁 [디 아더스]를 보러 간다고 했을 때 제 자리로 일부러 와서 “걔네들, 다 귀신이다?”라고 속삭였던 사악한 후배 카피라이터년의 만행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스포일러라는 단어는 스릴러나 추리물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 다 쓰이게 되었습니다. 이젠 영화에 대해 무슨 얘기만 좀 하면 다 스포일러라고 합니다.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러 갔을 때도 스포일러를 조심하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주인공인 파이가 마지막 부분에서 일본인 보험조사원들에게 두 개의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목이 이 영화의 반전이라는 것이죠. ‘두 개의 이야기’라는 반전, 맞습니다. 그런데 이걸 미리 알고 가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요? 감동의 폭이 줄어든다구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교롭게도 전 얀 마텔의 원작 소설을 읽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파이가 구출되는 장면까지만 읽고 (아마 바쁜 일이 생겨서 거기까지만 읽다가 팽개치고 다시 안 집어 든 거겠죠) 병원 부분부터는 읽지 않았더군요.

가장 중요한 장면을 빼먹은 덕에 저는 극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이 영화가 ‘리처드 파커라는 호랑이와 파이라는 소년이 작은 구명보트 위에서 227일간 표류하다가 결국 살아남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기’라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맨 마지막에 파이가 영화의 화자인 소설가에게 “두 가지 이야기 중 어느 게 더 마음에 드느냐?”라고 물었을 때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요. 이건 정말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소년과 호랑이의 믿을 수 없는 227일간의 표류기’에서 그쳤다면 이 이야기는 신기하고 감동적이지만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에 머물렀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의 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구요.

하지만 마지막에 또 한 가지의 이야기가 등장하면서 관객은 어떤 이야기를 선택해야 하는가, 라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에 도달하게 됩니다. 즉 [파이 오브 라이프]는 많은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거나 또는 믿고 싶은 이야기들도 그 껍질을 한 겹 벗겨냈을 때는 본질이 얼마만큼 달라질 수 있는가, 라는 깨달음으로 외연을 확장합니다. 소년의 성장담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단숨에 인식론의 사다리를 성큼성큼 걸어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집에 와 원작 소설을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파이가 일본 운수성 해양부 직원들의 과자를 빼앗아 먹으며 두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책 어디에도 그로 인한 새로운 인식에 대한 얘기는 없었습니다. 황당하더군요.

 


부커상 수상에 빛나는 언어의 마술사 얀 마텔이 펼치는
놀랍고 감동적인 227일산의 인도 소년 표류기

- 인간이 이토록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드문 경험이었다. 중앙일보
- 파이의 희망이 점점 커져 당신 심장 안에서 노랫가락이 되어 흐르기를. 조선일보
- [로빈슨 크루소] [걸리버 여행기] [백경]을 잇는 최고의 모험소설 마거릿 애트우드
- 거칠고, 의미심장하고, 드라마틱하며, 재미있는 진정한 소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소설책 [파이 이야기]의 책 뒷면과 띠지에 붙어있는 서평들입니다. 어느 것 하나 ‘또 다른 이야기’에 대한 언급조차 없습니다. 번역자의 후기를 읽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이 나올 당시 서평자들이나 번역자까지도 이 작품의 진짜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인간승리’나 ‘희망, 또는 신의 문제’ 등으로만 파악하려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안 감독이 [라이프 오브 파이]를 영화로 만들면서 파이의 또 다른 이야기에 방점을 찍지 않았다면 이것은 그냥 소설의 부록쯤에 해당하는 에피소드로 남았을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이 대목은 이안 감독이 얼마나 대단한 시네아티스트인지 다시 한 번 증명해주는 사례이기도 하구요.


원작소설도 끝까지 읽지 않고 다른 매체의 리뷰도 읽지 않은 채 영화관에 간 덕분에 전 영화를 보고 나서도 이 영화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씨네21]에 쓴 글을 읽고 거기에 제 나름의 생각까지 보탠 뒤에야 극장에 가서 이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그 진가를 마음껏 즐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 전에도 [팅거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화끈한 첩보물인 줄 알고 갔다가 그 진중한 분위기에 눌려 두 시간 동안 몸을 배배 꼬며 고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야구에 대한 지식이나 비즈니스적 감각이 전무한 상태로 [머니볼]을 보고 나와 “이게 뭐지?” 하고 당황한 적도 있구요. 스필버그의 [뮌헨]도 1972년 당시의 국제 정세와 사회적 분위기를 좀 더 익히고 갔더라면 훨씬 더 풍부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었을 텐데, 라고 후회를 했습니다.

 

스포일러를 두려워한다는 건 텍스트를 대하는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변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난 아무 것도 모르는 순수한 상태에서 그것과 마주치고 싶어요”는 언뜻 들으면 순결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눈앞에 있는 것만 겨우 보고 듣고 만족하겠다는 심뽀인 것입니다.

여행을 가면서 그 지역에 대한 역사나 문화를 일부러 공부하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로마를 여행하면서 로마의 역사나 로마 황제들의 에피소드를 하나도 모르고 간다면 포로로마노의 콜로세움에 가더라도 그에겐 그저 무너져가는 오래된 돌담에 불과하겠죠. 나중에 “야, 로마가 경치는 참 좋더라,” 뭐 이런 정도의 얘기야 할 수도 있겠지만.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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