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에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발명한 이후 가장 인상적인 데뷔작은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였다. 적어도 쿠엔틴 타란티노가 [저수지의 개들]을 들고 나오기 전까지는. 이젠 ‘비디오가게 점원 출신의 영화 천재’라는 수식어는 골백 번도 넘게 들어서 식상할 만도 하지만 그래도 타란티노가 변함없이 천재라는 사실에 쉽게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천재들, 특히 예술 쪽 천재들의 특징을 한두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자유분방함’과 ‘싸가지’가 될 것이다. 억울한 일이다. 그놈들은 아무렇게나 꾸며대는 거 같은데도 저절로 플롯이 생기고 디테일이 살아난다. 어딘가 혼자 처박혀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결정적 증거를 내놓는 탐정처럼 무심하게 이야기를 툭 던지는 건방진 놈인데도 여자들은 그 앞으로 달려가 콧소리를 낸다. 왜냐하면 그놈들은 하고싶은 대로 해도 좀처럼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으니까. 당장은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 입체적으로 조명해 보면 그게 다 필요한 그림이었고 꼭 필요한 이야기였으니까.

 

그러니 나 또한 그녀들과 같은 입장이 된다. 생각해 보라. 타란티노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일단 흥분이 되지 않던가. 이번엔 또 어떤 얘기로 우리를 낄낄거리게 만들지, 어떤 의외의 캐릭터로 우리의 뒤통수를 칠지 전두엽 근처가 간잘간질해지지 않던가.

 

 

타란티노의 최신작 [장고: 분노의 추적자]는 남북전쟁 발발 이 년 전 시점의 서부극이다. 그렇다. 놀랍게도 서부극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놀랄 일은 아니다. 코엔 형제가 그렇듯이 이제 타란티노도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증거를 대볼까? 지금 당장 헐리우드에서 타란티노가 부르면 누구든 달려온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왔고 사무엘 L. 잭슨이 왔다. 윌 스미스는 물망에 올랐다가 너무 매끈하게 생겼다는 지적이 이는 바람에 주연 자리를 제이미 폭스에게 넘겨야 했다. 크리스토프 왈츠는 작년에 [바스터즈;나쁜 녀석들]에 이어 연이은 출연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단지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타란티노의 영화에 출연하는 걸까? 아니다.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데쓰 프루프] 시나리오를 쓸 때였던가? 보통 사람들은 글이 안 풀려 호텔방에서 물구나무를 섰네, 머리를 쥐어뜯었네 어쩌구 하고 있을 때 타란티노는 “어서 이걸 써서 사람들한테 들려줘야 할텐데.”라는 조바심을 가지고 손가락에서 불이 나게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타란티노의 시나리오는 한 마디로 재밌다. 나는 [저수지의 개들]의 그 유명한 오프닝 시퀀스가 지금도 너무너무너무 좋다. 정장을 차려입고 은행을 털러 가기 전 커피숍에 주르르 앉아서 웨이트리스에게 팁을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한심한 문제로 마돈나의 [Like A Virgin]까지 들먹이며 싸우는 갱들이라니.

 

그런데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도 똑 같은 장면이 나온다. KKK단원들이 모여 장고와 슐츠 박사를 공격하기 직전에 말 위에 앉아 흰 복면에 뚫린 눈구멍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문제로 불만과 수다를 끓여붓는 장면이다. 이 장면 하나만 봐도 이건 타란티노표 영화임에 틀림없다. 또 디카프리오가 흑인 노예의 두개골을 들고 골상학 운운하며 깜둥이들의 노예근성을 설명하는 장면은 어떤가. 이 장면은 가난하던 시절 타란티노가 시나리오를 써서 토니 스코트에게 팔았던 [트루 로맨스]에서 크리스찬 슬레이터의 아버지 데니스 호퍼가 “이탈리아 놈들은 모두 깜둥이의 자손”이라며 크리스토퍼 월큰을 약올리던 모습 그대로다. 생각해 보면 타란티노는 변한 게 없다. 그런데도 늘 새롭고 재밌다. 오죽하면 꼬장꼬장한 아카데미 심사위원들도 이번만큼은 별다른 고민 없이 타란티노에게 시나리오상을 안겨 줬을까.

 


타란티노가 서부극을 만들면 어떤 얘기가 될까? 아무래도 존 포드보다는 세르지오 레오네쪽이겠지. 그런데 이건 그 정도가 아니다. 일단 주인공이 흑인이다. 디카프리오는 난생 처음 악역이다. 게다가 백인들은 모두 흑인들에게 병신 취급을 받다가 결국 몰살당한다. 꿈 같은 얘기라고?  그렇다면165분간의 불량식품 같은, 그러나 영양가까지 풍부한 롤러코스터를 지금 당장 타보시라. 당신이 놀러 간 역사공원이 순식간에 놀이공원으로 변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짐 크로스의 [I Got A Name]을 비롯한 탁월한 선곡들도 놓치지 마시라)

 


아, 참. 타란티노가 사랑스러운 점 한가지 더. 그도 가끔 자기 영화에 출연을 한다. 이번에도 나온다. 그러나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알기 때문에 언제나처럼 찌질한 역으로 잠깐 출연한다. 이번엔 허리춤에 다이나마이트를 잔뜩 두르고 있다가 어이없이 폭발해 죽는 역이다. 이건 타란티노가 팬심으로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했더 CSI의 에피소드 ‘무덤 속의 위험’(Grave Danger)에서 범인이 자살하던 것과 똑같은 방법이다. 유머 넘치는 구라는 물론 깨알 같은 디테일까지, 역시 타란티노는 갑인 것이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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