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에 회사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먹었다. 회사 이사를 앞두고 놀리기만 하던 마당에서 고기라도 구워먹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온 김에 카피라이터와 PD들이 급히 고기를 사러 가고 숯을 대령하고 했던 것이다. 고기가 구워지기 직전 잠깐 어지러웠던 나는 우연히 내 책꽂이에서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를 꺼내 펼쳐들었다. 정말 아무데나 펼쳤는데 거짓말처럼 시 제목이 '애인은 고기를 사고'였다. 뭐 이런.





애인은 고기를 사고 



이민하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나풀나풀 스웨터를 벗는다 애인은 고기를 사고 상추를 사고 깻잎을 사고 나는 원피스를 벗고 코르셋을 벗고 피어오르는 솜털들을 벗고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닦고 있던 거울에 매달려 낮잠을 잔다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검은 페인트로 정원수를 칠하고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심이 까만 연필을 밤새 깎는다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흑연 가루에 목이 메어 눈에서 구름을 뚝뚝 흘린다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배꼽을 어루만지고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붉은 신호등을 어깨에 매달고 달려간다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산부인과에 다녀오고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손목의 피를 풀어 욕조에 잠긴다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구급차에 실려 가고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의사를 사랑하고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자궁을 꿰매고 애인은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고기를 사고 나는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구두를 닦고 애인은 스무 해째 고기를 사고 나는 애인이 있는 정육점을 지나 스무 해째 엘리베이터를 타고 훨훨훨 공중으로 하관되고 애인은 정육점에 배달된 나의 엘리베이터를 끄르고




장정일이 새파란 시인이던 시절에 쓴 시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 버전 업되어 나타난 것처럼 경쾌하고 개성 넘치는 시였다. 그러나 난 시를 잘 모른다. 그녀는 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고양이는 골목의 사생활입니다. 그리고 시는 세계의 사생활입니다. 길 위에는 산책하는 시, 굶주린 시, 낮잠을 즐기는 시, 병에 걸린 시도 있고, 집 안에는 사람들이 떠받드는 시, 갇혀 버린 시도 있습니다. 그러다 사람들 모르게 탈출하는 시, 사람들 모르게 죽어가는 시들이 있습니다. 거리에는 시가 넘치지만 세계의 화합이나 질서나 품위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시는 세계의 사생활을 지켜줍니다. 그것이 시가 공동체에 가담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이민하의 이 시를 읽고 평론가 신형철은 "그녀의 시는 관습적인 서정시를 면도칼(환상)로 자해하며 흘리는 붉은 피다"라고 썼다. 참 대단한 시에 대단한 평론이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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