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의 한 호텔이다. 설 연휴, 아내의 넓은 마음과 배려 덕분에 아무 것도 안 하고 혼자 지낼 수 있는 24시간이 주어지자 나는 고심 끝에 호텔방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와 스티븐 킹이라는 작가들을 데려왔다([직업으로서의 소설가]와 [무라키미 하루키 잡문집] 그리고 [유혹하는 글쓰기]를 가져왔다). 이건 참으로 폼 안 나는 선정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통속적인 작가들이라니. 더구나 이 책들은 여기저기 책장을 접고 밑줄을 치고 손때가 묻어있을 정도로 전에 여러번 읽은 책들이다.
내가 왜 이 책들을 들고 왔는지는 저녁에 교보문고에 가서 새 책을 한 권 더 산 후에 깨달았다. 요즘 잘 나가는 에세이 중 하나를 사서 그 문장의 흐름과 내용을 살펴보았는데(무슨 책인지는 안 알랴줌) 애써 고른 그 책을 읽다보니 역설적으로 하루키나 킹이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를 다시금 느끼게 된 것이었다.
일단 둘 다 문장이 참 좋다. 쉽고 평이한 단어들을 사용하되 에둘러 가는 일 없이 하고싶은 말을 차근차근 할 줄 안다. 독자들이 혹시 못 알아 들을까 걱정해서 부사를 남발하지도 않는다(실제로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그가 쓸데 없는 부사 사용을 얼마나 경계하는지 들려준다). 작가는 스토리나 플롯만 짜는 사람이 아니다. 쉽고 친절한 문장으로 어려운 내용을 잘 묘사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설사 작가가 아니더라도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은 다 비슷하다.
아침이다. 그래봤자 먹고 자고 하는 것을 빼면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라 내가 쓰고싶은 글까지 많이 쓰지는 못했지만 오랜만에 광고 카피가 아닌 글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그러면서도 편안하게 궁리할 수 있는 소중한 시공간이었다. 더구나 내 곁에는 무라카미 하루키나 스티븐 킹이라는 엉청난 선생님들이 있었으니. 나는 하루키나 킹 같은 작품을 쓰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당대의 문장 고수들에게 한 칼 가르침을 받으려 해 본 것이었는데 다행히 그들이 나를 내치지 않고 친절하게 거두어 주었을 뿐이다. 이만하면 워런 버핏과의 백만 불짜리 점심식사보다 낫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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