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뭔지 아나?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참 X 같은 말이지. 야, 사실 죄가 무슨 죄가 있냐. 그 죄를 짓는 그 개새끼가 나쁜 새끼지... " 

어젯밤 늦게 한 케이블 TV 방송국에선 영화 [넘버 쓰리]를 틀어주고 있었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 송능한 감독이 1990년대 중반에 만든 이 영화엔 주옥 같은 명대사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배우 최민식의 입을 통해 전달된 마동팔 검사의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의 문제다.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피해 사실 고발로 시작된 대한민국 전반에 걸친 성폭력 문제는 최영미 시인의 시 '괴물'이 뒤늦게 조명 받음으로써 문화계의 '미투 운동(#metoo)'으로 확산되었다. 그의 시에 등장한 괴물이 원로 시인 고은이라는 건 이제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논란의 장본인도 마지못해 잘못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긴 했다. 그의 유감 표명에 진정성이 있냐 없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문제는 비겁한 공범의식을 시대의식으로 포장하며 그를 감싸려 들거나 한켠에서 일어난 작은 일 가지고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는 말자며 논란의 핵심을 흐리는 동료 문인들이나 문화언론계 인사들이다. 심지어 최영미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남발하고 있다고 말한 동료 시인도 있다. 

"너무 벗겨서 드러내기보다는 알면서도 모른 척 지나가는 그런 관대함이랄까, 그런 것도 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너무 시시콜콜 다 드러내고 폭로하고 비난하면 세상이 좀 살벌해지고 여유가 없어지는 것 같다. 우리가 이렇게 일거수일투족 조심하다 보면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리고 위 인용문은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예술가가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리 시시콜콜 따지려 드냐는 원로 평론가 김병익의 어이상실 중앙일보 인터뷰 내용 중 일부다. 좋게 얘기해서 행적은 단죄하되 시인의 예술까지 매도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논지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 보자. 누가 이제부터 고은의 시를 싫어하라고 하기라도 했나? 갑자기 고은의 시가 품질 나쁜 시로 둔갑을 하기라도 했나? 성추문 논란 이전이나 이후나 그의 시들을 좋아하든 말든 그건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다. 다만 이제 불행히도 그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우리에겐 그의 시들을 '색안경 끼고 볼 권리'가 생겼다고 얘기하는 것 뿐이다. 이게 맥락이다. 그건 우리만이 아니라 스웨덴 한림원의 입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추행범에게 노벨문학상을 준다는 건 작품이 아무리 멋지고 의미가 있어도 곤란한 일 아닌가. 시는 변하지 않았지만 시가 탄생한 배경이나 집안은 명백하게 변한 것이다.  

서정주가 친일시나 전두환 찬양시를 썼음이 밝혀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똑같은 소리를 했다. 시인의 행적은 밉지만 모국어를 빛낸 그의 찬란한 업적까지 저버리지는 말자고. 정말 그런가? 한 번 거꾸로 생각해볼 순 없을까. 그렇게 기회주의적인 사람이 어떻게 그런 아름다운 시들를 쓸 수 있는 걸까. 한 번 정신의학적으로 연구해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한 손으로는 성추행을 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명작을 써낼 수 있는 게 예술이라면 '예술의 진정성' 같은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거나 이미 소멸된 것이란 말인가. 

'행적은 단죄하되 시인의 예술까지 매도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논지를 계속 펼치고 있는 사람들의 말을 번역해 보면 '과정이 구리더라도 결과물만 좋으면 인생의 승자가 될 수 있다'는 깡패논리와 다름 아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자들이 계속 자기 자식들이나 후배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동안엔 언제라도 제2, 제3의 고은과 이윤택이 계속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바로잡는 방법은 지금이라도 그 더러운 손모가지들을 댕겅댕겅 잘라서(실제로 자르라는 얘기는 아니다) 더 이상 거짓된 작품을 생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그를 지켜본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성추행을 범하면 나도 저 꼴을 당하게 되겠구나'하는 경각심을 심어주는 것이다. 물론 그러고 나서도 서정주나 고은이나 이윤택의 작품이 여전히 좋다는 멘탈의 소유자들은 그냥 포기하자. 어떤 생각을 하건 뭘 좋아하건 그건 전적으로 그들의 자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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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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