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부터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고 살아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무슨 연유에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일곱 살 때까지는 '나는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말해서 어른들을 걱정시켰는데 막상 여덟 살이 되어 학교에 들어가더니 단박에 모범생이 되어버렸다. 당시엔 어른들이 시키는 것은 뭐든지 열심히 하거나 잘 해야 칭찬 받는 풍토였으므로 나는 어른들의 말을 잘 들으려 노력했고 공부도 꽤 열심히 했다. 그래서 놀고 싶을 때도 제대로 놀지 못했고 군것질을 하고 싶었지만 늘 용돈이 부족해서(또는 나이보다 어른스러운 아이이므로)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고등학교 때는 약간의 반항심이 있었지만 여러가지 규율과 입시에 대한 부담, 사춘기 특유의 존재론적 방황 등으로 인해 제대로 된 반항은 할 수가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약간의 자유가 생겼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과 술, 담배, 허무를 열심히 누리는 대신 학점이나 연애, 미래 설계가 펑크나기 일쑤였으므로 그것 역시 '자학'에 가까운 자유였다. 설상가상 군대엘 갔더니 자유라는 건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부대원 중 자야할 시간에 안 자고 버티는 놈 정도가 있었지만 그걸 자유라고 부르기엔 너무 서글프고 웃겼다. 

졸업을 하고 힘들게 광고대행사에 들어갔더니 선배들이 술을 사주며 우리는 영원한 '을'이라고 털어놓았다. 모든 걸 광고주가 시키는 대로 해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대행사에서 나와 친구와 크리에이티브 브띠끄를 차려보기도 했고 CM프로덕션에 들어가보기도 했다. 이번엔 '병'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을'인 광고대행사가 시키는 대로 해줘야 하는 것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다 사실이었다. 그래서 프리랜스 카피라이터로 독립도 해봤다. 내 위엔 아무도 없고 출퇴근 시간도 없고 일도 내가 마음대로 고를 수 있으므로 일단 자유는 넘쳐 흘렀다. 그러나 내가 하고싶은 대로 몇 번 했더니 곧 통장의 잔고가 바닥이 났다. 


세상에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 예전엔 왕이 있었고 지금은 기업의 회장님이나 건물주 등이 마음대로 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물론 사장이나 왕에게 물어보면 "무슨 소리야, 나도 내 맘대로 못 하는 게 얼마나 많은데?" 라고 외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마음대로 하고 사는 게 월등히 많은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그 증거로 대기업의 회장님들은 대체로 장수하는 반면 이인자들은 단명한다는 통계가 있었다. 삼성이었던가, 아무튼 연봉이 수십 억원인 부회장님이 평소 소주 한 잔 이상을 마시지 않는 게 음주 철칙이었다는데 그 이유가 '회장님이 언제 찾으실지 몰라서'였다고 한다. 너무 한심하고 슬퍼서 그 기사 내용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영화 [넘버 쓰리]의 대사처럼 '일등이 다 해먹는 세상'이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안희정 전 지사의 성폭행이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라는 심리에서 시작되었다는 전문가들의 진단이 나왔다.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해도 틀렸다고 말하거나 위험하다고 제지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그 상황은 반복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내가 하는 일은 다 옳은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누군가 반항을 하고 경찰이나 언론에 신고를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은 CEO의 인물 됨됨이가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이 되는 것인데, 안타까운 건 CEO가 되는 순간 공감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심리학자들의 증언이다. 그러니까 출세하더니 사람 변했다, 라는 말은 그 사람이 원래 싸가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인간의 특질이라는것이다. 

회사에서든 집에서든 요즘도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마음대로 못하고 산다고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쩌면 그 덕분에 요즘 세상을 좀 더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부탁하고 싶다. 문재인 대통령부터 시작해 회장님들, CEO, 건물주님들, 아주 작은 가게의 사장님들까지, 혹시라도 내가 지금 내 마음대로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해 보라고. 물론 대단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부탁해 본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우월적인 지위에 서 본 적이 없어서, 라는 말씀만은 삼가하기 바란다. 당신이 고은이나 이윤택, 오달수, 안희정, 김기덕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남자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일단 우월적 위치에 서 본 것이니까. 그리고 그것이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대한민국의 정계, 학계, 법조계, 문화계를 강타하고 있는 '미투운동'의 본질이니까.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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