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나 연극들은 '잘해야 본전'이라는 인식이 대다수다. 문자와 상상력만으로 지유롭게 구성되었던 원작을 두 시간 남짓 스크린이나 연극 무대로 재구성하려면 과감한 생략과 변조가 필수라 원작을 읽은 사람들에겐 상대적으로 아쉬움을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아쉬움은 원작을 먼저 읽은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당연한 권리이기도 하니 원작을 직접 쓴 사람의 경우는 더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연극 [댓글부대]의 원작자인 소설가 장강명은 이 연극을 보고 너무 놀랍고 재미있어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고 한다. 도대체 얼마나 뛰어난 연출과 연기이기에. 재공연 소식 링크를 공유하며 알리는 그의 이런 페이스북 소개글을 출근길 전철 안에서 읽던 나는 반가운 마음에(나도 소설 [댓글부대]의 열렬한 팬이었으므로) 무심코 댓글을 달았는데 작가가 댓글과 링크 공유를 한 사람들에게 선착순으로 초대권을 두 장씩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놀라운 행운이었다. 덕분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공연 첫날을 선택해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으로 갔다.
삼궁과 찻탓캇, 그리고 10査10은 '팀-알렙'이라는 인터넷마케팅 업체의 일원이다. 인터넷 여론을 조작해 학원 강사의 평판을 좌우하는 등 발군의 실력을 보이던 이들은 어느날 수수께끼의 조직 '합포회'로부터 국내 굴지의 기업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에 걸려 죽은 여직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망하게 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영화의 내용과는 상관 없이 현장에서의 임금 체불을 문제삼아 가짜 증인, 증언 등을 만들어내 인터넷으로 퍼뜨리자 영화는 초기에 사회적으로 관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흥행몰이에 실패한다. 내친 김에 이들은 정치적 이슈에 민감한 여성커뮤니티(여초사이트)에 들어가 사사건건 정당함에 대한 시비를 거는 댓글들을 통해 그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다. 여기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ectness)이 어떻게 'PC Police'라는 자기검열 체제로 변색될 수 있는지에 대한 재미있는 예들이 제시된다.
그리고 그들은 드디어 이철수라는 정체불명의 실장님이 제시하는 막대한 금액과 함께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회장님'의 지시에 따라 이 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10대들을 선동하는 작업에 투입된 것이다. '팀-알렙'은 원래 왜곡, 조작, 혐오 등이 특기인 일베들이었다. 인터넷에 능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뭔지 아는 사람들. 그러나 실제 인간관계는 서툰 키보드 워리어들. 소설가 장강명은 이들이 '프레임의 전환'을 통해 어떻게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그를 통해 선거에 까지 개입했는지를 치밀한 취재를 통해 작품으로 형상화했다. 자칫 르뽀처럼 건조할 수 있는 이야기는 이름도 괴상한 삼궁과 찻탓캇, 그리고 10査10 등의 캐릭터를 통해 입체적인 인물들로 살아 움직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연극의 극본과 연출을 맡은 이은진은 원작을 철저히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찻탓캇과 계속 대화를 나누는 신문기자를 임소진이라는 여성으로 바꿈으로써 극의 흐름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었다. 연극 무대라는 제한적인 공간에서도 팀의 브레인인 삼궁의 야망, 넷상에서는 유능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연인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찻탓캇, 그리고 대인기피증이 심한 오타쿠 10査10에게 인간적 훈기를 불어넣어 관객들로 하여금 '일베이긴 하지만 알고보면 쟤들도 불쌍하구나'라는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솜씨를 발휘한 것이다. 마지막에 쇠사슬에 묶인 어떤 물체(지금은 밝히지 말아달라는 극단측의 부탁이 있어서)가 천장에서 내려오는 모습은 간단한 상상력만으로 무대를 얼마나 넓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뛰어난 연출력의 예이다.
커튼을 이용한 공간적 아이디어와 드라마적 완성도도 뛰어나다. 그리고 첫회임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호연이 빛났다. 장강명 작가가 예전에 들었다는 "요즘은 일베도 연극하나?"라는 어느 관객의 평은 아마 10査10 역을 맡은 민경희 때문에 나오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캐릭터가 딱이었다. 삼궁이나 찻탓캇 역도 고르게 연기가 좋았고 이철수나 임소진 역할도 든든한 연기력을 선보였지만 가장 인상 깊은 배우는 회장님 역의 김정호였다. 얼마 전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 역을 맡았던 이 배우는 당시엔 '너무 정극에 충심한 연기 아닌가?'하는 아쉬움이 실짝 있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그야말로 그 '정극스러움'이 빛을 발했다. 한때 권력과 금력의 정점에 서 있었으나 이제는 늙어 꼬부라진, 가운을 입고 꾸부정한 걸음걸이로 나타나 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비뚤어진 신념을 설파하는 목소리와 대사 처리는 전율을 금치 못하게 하는 에너지가 있었다.
장강명은 현재 가장 핫한 소설가이다. 그는 소설가가 되기 전 동아일보에서 11년간 기자를 하며 이런저런 보도상을 받았고 소설가가 된 후에도 오늘의작가상, 한겨레문학상 등 국내 문학상을 휩쓸어 '그랜드 슬럼'을 달성했다는 평을 받았다. 이 작품도 4.3평화문학상 수상작이었다. 상을 받은 게 중요하다기보다는 자신의 작업에 얼마나 열심이고 객관적으로 인정받는지를 말하고 싶어서 이 얘기를 굳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의 작품을 연극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기회라니 신나지 않는가. 망설이지 말고 지금 당장 예매 사이트에 들어가 표를 사시라. 후회하지 않는 110분을 보장한다. 2018년 6월 24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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