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모 출판사(라고 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북스피어'라고 밝히기로 한다) 대표 김홍민 사장이 '제주도 책방순례 및 북콘서트 여행'이란 걸 한 번 기획해 보자, 라는 돈 안 되는 아이디어를 내고 '방랑강기 - 제주유랑단'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2박3일 여행단을 만들어 그 기획을 강행한 이야기는 전에 해드린 적이 있죠? 문제는 당시 갑작스럽게 한 달 휴가를 얻게 되었던 저도 제주도에 가서 그 모임에 참석했고 급기야 모임이 끝나는 날 밤 유랑단의 반장으로 뽑히기까지 했다는 사실입니다.
매사에 빈틈 많고 계획성 없기로 유명한 제가 반장으로 뽑힌 이유는 그 모임이 이미 해체 상태나 마찬가지라(유랑이 끝났으므로) 앞으로 반장이 할 일이 거의 없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기껏 해야 서울에 올라가서 애프터 모임을 주선하는 것 정도인데, 막상 서울에 올라와 회사에 복귀한 저는 주중은 물론 주말 저녁에도 나가 일을 해야 할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마포 김 사장'이라 불리는 김홍민 대표도 제주유랑단보다 무모하고 규모도 더 커진 '떼거리 유럽서점 유랑단'을 조성해 출국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애프터 모임 모의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오전 출근길에 마포 김 사장에게서 카톡 문자가 카톡, 하고 왔습니다. 유럽에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회장님, 애프터 모임 하셔야지요."
뽑힐 땐 반장이었는데 어느새 저는 회장으로 승격되어 있었고 문자 메시지는 깍뜻한 존댓말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부하직원을 부리는 듯한 강압적인 분위기가 느껴져 저는 김 사장님의 명령이 떨어진 이상 애프터 모임을 하루라도 빨리 주선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만 같은 기이한 의무감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김 사장님에게서 카톡으로 모임 명단을 전해 받은 저는 그날 오후에 단체카톡방을 개설하고 모임 공지를 올렸습니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분도 계시고 해서 아무래도 금요일 저녁이나 주말이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장소는 김홍민 대표의 '박은영 대표가 운영하는 아리디(R.ed)에서 하는 것도 방법인데 말입니다'라는 한 마디 멘트에 의해 그곳으로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12월 15일 금요일이 어떠냐고 했더니 아리디(R.ed) 박은영 대표가 그날은 고양이 페어에 참석해야 하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입장을 전해왔습니다. 모임 장소의 주인이 다른 스케줄이 있다는데야 어찌 다른 방법이 없었죠. 귀여운 고양이들에게 의문의 일패를 당한 저희들은 그 다음주 금요일인 12월 21일로 날짜를 못박았습니다. 그날 해외출장인 분도 계시고 또 어린 아이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못 오는 분도 계셨지만 크리스마스를 넘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강행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12월 21일. 제가 전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고 긴 언덕을 걷고 하여 부암동에 있는 아리디(R.ed)에 도착했을 때 박은영 대표와 함께 방송작가인 강의모 씨, 은행 다니는 IT전문가 조규호 씨, 출판사 대표인 장선희 씨 등이 미리 와 계시거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착한 상황이었습니다. 김홍민 대표는 가게 안에 들어왔다가 주차 문제가 있다고 하며 다시 나갔는데 알고 보니 경미하게 차 사고가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곧이어 이정은 씨, 최진숙 씨 등도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가게 안에 놓여 있는 박은영 대표의 책과 그림들을 구경하며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빨강이 시킨 짓'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말해주듯이 가게 전체가 빨강을 비롯한 강렬한 컬러로 오밀조밀하게 구성되어 있었고 그동안 박은영 대표가 낸 책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동화책 <기차 ㄱㄴㄷ>는 기차를 테마로 ㄱ부터 ㅎ까지 유아들이 쉽게 한글과 접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른바 '학습 동화책'이었습니다. 제가 '기차 ㄱㄴㄷ' 같은 컨셉을 개발한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엄치손가락을 추켜 세웠더니 박 대표는 자기는 그런 생각까지는 못했는데 자신의 작업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준 것 같다며 좋아했습니다.
제주도에서 만나 책방 순례를 함께 하다가 헤어진 사람들이 훗날 다시 서울에서 만나는 것은 각별한 느낌이었습니다. 박은영 대표는 카톡 메시지로 예고했듯이 '샹그리아+피자+치킨 스테이크+디저트+음료'로 구성된 특별 안주들을 내놓았고 와인도 세 병 내놨는데 한 병을 무료 쾌척하는 대인배다운 풍모를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치킨 스테이크 요리는 자신이 영국 유학하던 시절 주인집 70대 노부부가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며 밤새 사랑을 나눈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던 보양식이었다는 설명까지 곁들여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공포을 선사했습니다. 신기하고 에로틱한 얘기이긴 한데 그렇다면 여기서 이 음식을 먹을 자격을 갖춘 사람이 과연 있단 말인가, 하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게 된 거죠. 결국 전날 밤을 건전하게 보낸 사람들끼리 서로를 위로하며 피자와 치킨 스테이크를 나누어 먹어야 했습니다. 김홍민 대표의 일본여행 계획 얘기로 불똥이 잠깐 튀었다가 다시 조규호 씨도 올해 세 번째 책을 내게 되었다고 해서 모두 축하의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제주도에서 저와 이틀간 룸메이트를 했던 의사 하민석 선생은 요즘 전국의 중고등학교들 돌아다니며 역사 강의를 한다고 해서 화제에 올랐습니다. 응급실 의사이면서 학생들에게 우리나라 역사 강의를 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니기 때문이겠죠. 저는 예전엔 의사나 화가들도 지식인이라는 소리를 듣던 시대가 있는데 하민석 씨가 그런 영광을 되살려 주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하정우를 닮은 외모와 목소리로도 제주도에서 화제를 모았는데 제가 '이 분은 사주도 잘 보는데...' 라고 새로운 정보를 누설했더니 모두들 눈이 반짝반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의 아내인 윤혜자 씨에게서 전화가 왔고 그 통화는 강의모 씨와 장선희 씨에게 넘어갔고 곧 아내가 이곳으로 오겠다고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두 분과 아내는 이미 친분이 있는 관계였던 것이었습니다. 하민석 씨의 이야기가 계속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의사이다보니 건강에 대한 의논이 많았고 특히 암에 대한 질문과 설명이 많았습니다. 하민석 씨에 의하면 무슨 암이든 사람은 결국 폐렴으로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면역력이 약해지면 호흡기가 쉽게 감염에 노출되어 그렇다나. 그러자 누군가 수잔 손탁도 그런 식으로 숨졌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면역력이 그렇게 중요하구나, 하고 깨닫는 기회였습니다.
사주 얘기도 흥미로운 주제였습니다. 제가 제주도 호텔방에서 맥주 한 잔 더 하면서 사주라는 게 미신처럼 느껴진다고 했을 때 하민석 씨는 '저는 환자 차트 읽듯 사주를 읽습니다. 너무 정확하니까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했을 때 이미 사람들은 그에게로 다가가서 자신의 생년월일과 시를 앞다투어 건네고 있었습니다. 하민석 씨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닌 아들을 둔 강의모 씨가 먼저 인생상담을 했고 뒤늦게 다른 파티 두 군데를 박차고 왔다는 김지현 씨도 자신의 미래 계획과 함께 '도대체 나의 남자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람들이 의사가 봐주는 사주 관상에 흠뻑 취해있을 무렵 난데 없이 윤혜자 씨가 음식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음식활동가 고은정 선생의 새 책 [밥을 짓다, 사람을 만나다] 출판기념회에 갔다가 남은 음식을 싸왔다는데, 그게 대한민국 최고의 밥상을 만드는 분의 책 출판기념회이다 보니 그 메뉴도 범상치가 않아서 고등어 초밥과 바게트 위에 어란을 얹은 타파스 등이 테이블 위에 놓여졌습니다. 사람들은 훌륭한 안주가 도착했다며 와인과 함께 그 음식을 먹었고 난생 처음 회계를 맡아 현금과 카카오뱅크 등으로 회비를 걷던 저는 돈계산을 못해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아리디에서 내놓은 기본 메뉴가 이만오천 원이었고 와인값까지 생각해 사만 원씩 걷었는데 생각보다 술값이 저렴하게 나와 팔만 원 정도가 남은 것이었습니다. 이걸 어떻게 다시 나눠 주나 걱정을 하고 있는데 김홍민 대표가 "박은영 씨 새 책을 사서 보내주면 되겠네"라고 말해 단박에 해결이 되었습니다. 박은영 대표의 에세이 [밤과 여름 사이의 맛]이 온라인에 먼저 깔린다고 하니 그 책을 제가 사서 세종시에서 올라온 최진숙 씨 등 멀리 계신 분들부터 나눠드리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책값이 15,000원이니 8만원으로 사면 5권 정도인데 인원은 총 아홉 명이니까...아, 저는 참 총무 자질이 부족한 인간입니다.
어쨌든 즐거운 모임이었습니다. 어쩌면 술에 취해 비틀거릴 수도 있는 금요일 밤이었지만 아리디 안에서는 오로지 와인만 마시는 바람에 모두들 멀쩡한 얼굴로 작별인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저희 부부가 부른 '타다'가 도착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다른 분들도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아마 내년에 또 제주유랑단이 결성되면 여기 모인 분들 중에 다시 참석할 분들이 여럿 계시겠죠? 저도 형편이 허락한다면 다시 가고 싶은데 올해 같은 행운이 다시 따라줄지는 모르겠습니다. 요즘 세월도 험하고 우리들 사는 게 워낙 버라이어티 해서 말이죠. 그래도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서로 행복하기로 해요 우리.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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