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환이 형

뒷담화의 향연 2016. 4. 20. 21:13



오후 4시쯤 '어디 가서 아이데이션이나 좀 할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며 회사 근처 카페를 향해 비적비적 걸어가다가 느닷없이 규환이 형을 만났다. 규환이 형처럼 생긴 사람이 저기서 날 보고 웃고 서 있길래 가까이 가보니 정말 규환이 형이었다. 형도 길을 걷다가 '저거, 내가 아는 놈 같은데...' 하고 긴가민가 서 있었다고 한다.


너무 반가웠다. 나는 마침 카페 가는 길인데 같이 가서 커피나 한 잔 하자고 규환이 형을 꼬셨다. 가방도 들지 않고 손에는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 한 권, 맨발에 스니커즈까지, 예전 대한민국 최고의 CF감독이던 시절의 스타일과 포스는 지금도 여전했다. 의자에 앉아 커피와 케이크를 주문하고 내가 신입사원 시절에 정동MBC빌딩 엘리베이터 앞에서 형을 만났던 얘기부터 다른 뚜라미 선배들의 안부까지 두서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규환이 형은 우연히 내 블로그인 '편성준의 생각노트'에 들어와 글을 좀 읽었는데 의외로 깊이가 있었고 무엇보다 솔직하게 쓰는 게 마음에 들었다고 말해 주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형이 나의 글을 읽을 거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규환이 형도 지난 20년 간 틈날 때마다 꾸준히 뭔가를 쓰고 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내용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 또는 나는 무엇인가'에 다름 아니라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요즘 나에게 무슨 책을 읽고 있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최근에 읽은 카뮈의 책들 중에서 니체에 관한 이야기를 했고 그것과 통하는 김민기의 옛노래 얘기도 했다. 그러면서 '힌두교의 인생 4단계'에 대한 얘기도 정말 재미있게 들려줬다. 나에게 평소 뭘 할 때 제일 즐거운지, 뭔가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게 뭔지, 그래서 가장 화나는 게 뭔지 등을 물었다. 신기했다. 형의 질문에 기계적으로 대답만 했을 뿐인데도 정작 내가 뭘 좋아하는지, 또 앞으로 뭘 하면 즐거울 지가 좀 더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형은 뉴욕에서 살면서 무척 외로웠는데 어느덧 그 외로움 때문에 예전과 달리 두꺼운 책들까지 천천히 다 읽을 수 있었던 경험을 했고 그러면서 더 깊이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마치 소설가 황석영이 감옥에 가서 대하소설들을 뒤늦게 다 읽었다고 하더니 그런 거군요, 라고 내가 아는 척을 했더니 맞다고 하며 웃었다.


형은 나에게 일 말고도 쓰고 싶은 글을 계속 써보라고 얘기했다. 요즘 영화 중 팀 로스가 나오는 [크로닉]을 꼭 보라고도 했다. 되도록이면 혼자 보라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 자기가 막걸리 한 잔 할 때 부르면 당장 달려 나오라는 명령도 했다.



아이데이션은 못했지만 운 좋은 날이었다. 논현동에서 길을 가다가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을 손에 든 옛선배를 만나 찻집에서 수다를 떤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 아까 페북에 썼던 글인데, 나중에 혹시라도 규환이 형 여기 들어오시면 읽고 반가워 하시라고 여기에도 올립니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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