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모 출판사(라고 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북스피어'라고 밝히기로 한다) 대표 김홍민 사장이 '제주도 책방순례 및 북콘서트 여행'이란 걸 한 번 기획해 보자, 라는 돈 안 되는 아이디어를 내고 '방랑강기 - 제주유랑단'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2박3일 여행단을 만들어 그 기획을 강행한 이야기는 전에 해드린 적이 있죠?  문제는 당시 갑작스럽게 한 달 휴가를 얻게 되었던 저도 제주도에 가서 그 모임에 참석했고 급기야 모임이 끝나는 날 밤 유랑단의 반장으로 뽑히기까지 했다는 사실입니다. 

매사에 빈틈 많고 계획성 없기로 유명한 제가 반장으로 뽑힌 이유는 그 모임이 이미 해체 상태나 마찬가지라(유랑이 끝났으므로) 앞으로 반장이 할 일이 거의 없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기껏 해야 서울에 올라가서 애프터 모임을 주선하는 것 정도인데, 막상 서울에 올라와 회사에 복귀한 저는 주중은 물론 주말 저녁에도 나가 일을 해야 할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마포 김 사장'이라 불리는 김홍민 대표도 제주유랑단보다 무모하고 규모도 더 커진 '떼거리 유럽서점 유랑단'을 조성해 출국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애프터 모임 모의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오전 출근길에 마포 김 사장에게서 카톡 문자가 카톡, 하고 왔습니다. 유럽에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회장님, 애프터 모임 하셔야지요." 

뽑힐 땐 반장이었는데 어느새 저는 회장으로 승격되어 있었고 문자 메시지는 깍뜻한 존댓말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부하직원을 부리는 듯한 강압적인 분위기가 느껴져 저는 김 사장님의 명령이 떨어진 이상 애프터 모임을 하루라도 빨리 주선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만 같은 기이한 의무감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김 사장님에게서 카톡으로 모임 명단을 전해 받은 저는 그날 오후에 단체카톡방을 개설하고 모임 공지를 올렸습니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분도 계시고 해서 아무래도 금요일 저녁이나 주말이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장소는 김홍민 대표의 '박은영 대표가 운영하는 아리디(R.ed)에서 하는 것도 방법인데 말입니다'라는 한 마디 멘트에 의해 그곳으로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12월 15일 금요일이 어떠냐고 했더니 아리디(R.ed) 박은영 대표가 그날은 고양이 페어에 참석해야 하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입장을 전해왔습니다. 모임 장소의 주인이 다른 스케줄이 있다는데야 어찌 다른 방법이 없었죠. 귀여운 고양이들에게 의문의 일패를 당한 저희들은 그 다음주 금요일인 12월 21일로 날짜를 못박았습니다. 그날 해외출장인 분도 계시고 또 어린 아이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못 오는 분도 계셨지만 크리스마스를 넘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강행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12월 21일. 제가 전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고 긴 언덕을 걷고 하여 부암동에 있는 아리디(R.ed)에 도착했을 때 박은영 대표와 함께 방송작가인 강의모 씨, 은행 다니는 IT전문가 조규호 씨, 출판사 대표인 장선희 씨 등이 미리 와 계시거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착한 상황이었습니다. 김홍민 대표는 가게 안에 들어왔다가 주차 문제가 있다고 하며 다시 나갔는데 알고 보니 경미하게 차 사고가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곧이어 이정은 씨, 최진숙 씨 등도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가게 안에 놓여 있는 박은영 대표의 책과 그림들을 구경하며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빨강이 시킨 짓'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말해주듯이 가게 전체가 빨강을 비롯한 강렬한 컬러로 오밀조밀하게 구성되어 있었고 그동안 박은영 대표가 낸 책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동화책 <기차 ㄱㄴㄷ>는 기차를 테마로 ㄱ부터 ㅎ까지 유아들이 쉽게 한글과 접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른바 '학습 동화책'이었습니다. 제가 '기차 ㄱㄴㄷ' 같은 컨셉을 개발한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엄치손가락을 추켜 세웠더니 박 대표는 자기는 그런 생각까지는 못했는데 자신의 작업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준 것 같다며 좋아했습니다. 

제주도에서 만나 책방 순례를 함께 하다가 헤어진 사람들이 훗날 다시 서울에서 만나는 것은 각별한 느낌이었습니다. 박은영 대표는 카톡 메시지로 예고했듯이 '샹그리아+피자+치킨 스테이크+디저트+음료'로 구성된 특별 안주들을 내놓았고 와인도 세 병 내놨는데 한 병을 무료 쾌척하는 대인배다운 풍모를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치킨 스테이크 요리는 자신이 영국 유학하던 시절 주인집 70대 노부부가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며 밤새 사랑을 나눈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던 보양식이었다는 설명까지 곁들여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공포을 선사했습니다. 신기하고 에로틱한 얘기이긴 한데 그렇다면 여기서 이 음식을 먹을 자격을 갖춘 사람이 과연 있단 말인가, 하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게 된 거죠. 결국 전날 밤을 건전하게 보낸 사람들끼리 서로를 위로하며 피자와 치킨 스테이크를 나누어 먹어야 했습니다. 김홍민 대표의 일본여행 계획 얘기로 불똥이 잠깐 튀었다가 다시 조규호 씨도 올해 세 번째 책을 내게 되었다고 해서 모두 축하의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제주도에서 저와 이틀간 룸메이트를 했던 의사 하민석 선생은 요즘 전국의 중고등학교들 돌아다니며 역사 강의를 한다고 해서 화제에 올랐습니다. 응급실 의사이면서 학생들에게 우리나라 역사 강의를 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니기 때문이겠죠. 저는 예전엔 의사나 화가들도 지식인이라는 소리를 듣던 시대가 있는데 하민석 씨가 그런 영광을 되살려 주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하정우를 닮은 외모와 목소리로도 제주도에서 화제를 모았는데 제가 '이 분은 사주도 잘 보는데...' 라고 새로운 정보를 누설했더니 모두들 눈이 반짝반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의 아내인 윤혜자 씨에게서 전화가 왔고 그 통화는 강의모 씨와 장선희 씨에게 넘어갔고 곧 아내가 이곳으로 오겠다고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두 분과 아내는 이미 친분이 있는 관계였던 것이었습니다. 하민석 씨의 이야기가 계속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의사이다보니 건강에 대한 의논이 많았고 특히 암에 대한 질문과 설명이 많았습니다. 하민석 씨에 의하면 무슨 암이든 사람은 결국 폐렴으로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면역력이 약해지면 호흡기가 쉽게 감염에 노출되어 그렇다나. 그러자 누군가 수잔 손탁도 그런 식으로 숨졌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면역력이 그렇게 중요하구나, 하고 깨닫는 기회였습니다. 

사주 얘기도 흥미로운 주제였습니다. 제가 제주도 호텔방에서 맥주 한 잔 더 하면서 사주라는 게 미신처럼 느껴진다고 했을 때 하민석 씨는 '저는 환자 차트 읽듯 사주를 읽습니다. 너무 정확하니까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했을 때 이미 사람들은 그에게로 다가가서  자신의 생년월일과 시를 앞다투어 건네고 있었습니다. 하민석 씨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닌 아들을 둔 강의모 씨가 먼저 인생상담을 했고 뒤늦게 다른 파티 두 군데를 박차고 왔다는 김지현 씨도 자신의 미래 계획과 함께 '도대체 나의 남자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람들이 의사가 봐주는 사주 관상에 흠뻑 취해있을 무렵 난데 없이 윤혜자 씨가 음식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음식활동가 고은정 선생의 새 책 [밥을 짓다, 사람을 만나다] 출판기념회에 갔다가 남은 음식을 싸왔다는데, 그게 대한민국 최고의 밥상을 만드는 분의 책 출판기념회이다 보니 그 메뉴도 범상치가 않아서 고등어 초밥과 바게트 위에 어란을 얹은 타파스 등이 테이블 위에 놓여졌습니다. 사람들은 훌륭한 안주가 도착했다며 와인과 함께 그 음식을 먹었고 난생 처음 회계를 맡아 현금과 카카오뱅크 등으로 회비를 걷던 저는 돈계산을 못해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아리디에서 내놓은 기본 메뉴가 이만오천 원이었고 와인값까지 생각해 사만 원씩 걷었는데 생각보다 술값이 저렴하게 나와 팔만 원 정도가 남은 것이었습니다. 이걸 어떻게 다시 나눠 주나 걱정을 하고 있는데 김홍민 대표가 "박은영 씨 새 책을 사서 보내주면 되겠네"라고 말해 단박에 해결이 되었습니다. 박은영 대표의 에세이 [밤과 여름 사이의 맛]이 온라인에 먼저 깔린다고 하니 그 책을 제가 사서 세종시에서 올라온 최진숙 씨 등 멀리 계신 분들부터 나눠드리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책값이 15,000원이니 8만원으로 사면 5권 정도인데 인원은 총 아홉 명이니까...아, 저는 참 총무 자질이 부족한 인간입니다. 

어쨌든 즐거운 모임이었습니다. 어쩌면 술에 취해 비틀거릴 수도 있는 금요일 밤이었지만 아리디 안에서는 오로지 와인만 마시는 바람에 모두들 멀쩡한 얼굴로 작별인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저희 부부가 부른 '타다'가 도착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다른 분들도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아마 내년에 또 제주유랑단이 결성되면 여기 모인 분들 중에 다시 참석할 분들이 여럿 계시겠죠? 저도 형편이 허락한다면 다시 가고 싶은데 올해 같은 행운이 다시 따라줄지는 모르겠습니다. 요즘 세월도 험하고 우리들 사는 게 워낙 버라이어티 해서 말이죠. 그래도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서로 행복하기로 해요 우리.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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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도 아닌 인생이

              
                              마광수



별것도 아닌 인생이
이렇게 힘들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사랑이
이렇게 사람을 괴롭힐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결혼이
이렇게 스트레스를 줄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이혼이
이렇게 복잡할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시가
이렇게 수다스러울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똥이
이렇게 안 나올 수가 없네 



어제 글 쓰는 친구 우근이가 마광수 교수 1주기를 기념해 올린 글을 보고 예전에 스크랩 해놨던 그의 시를 다시 꺼내 읽어보았다. 마광수 교수는 연세대에 가서 연극반 지도교수를 하기 전에 홍익대 뚜라미 지도교수이이기도 했다. 당시로는 드물게 스물여덟 살에 교수에 임용된 천재였다는데 마침 우리 써클인 창작곡동호회 '뚜라미'의 지도교수를 맡은 것이었다. 뚜라미 10주년 때 동아리 임원이었던 나는 마광수 교수를 모셔와 같이 생일 파티를 했는데 그때 교수님이 재미 있는 후일담을 들려주며 우리를 웃겼다. 

"학교 써클 지도교수를 하라는데, 블랙테트라와 뚜라미 둘 중 하나를 하라는 거예요. 근데 블랙테트라엔 여자가 없잖아요."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에세이나 [즐거운 사라]라는 소설을 써서 옥고를 치뤘던, 야한 것만 좋아하는 이상한 교수 정도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윤동주 시 연구에 독보적인 존재였고 시와 그림에도 조예가 깊은 문인이었다. 

오늘 아침 그의 시 '별것도 아닌 인생이'를 다시 읽어보니 그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게 살았는지가 새삼 느껴진다. 기회가 되면 당시 책 출판 문제로 그와 함께 어이없는 옥고를 치뤘던 장석주 시인에게 고인에 대한 작은 이야기라도 한 토막 듣고 싶어진다. 물론 그런 기회가 쉽게 오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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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박근형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를 두 번째 보았을 땐가,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어쩌다가 나까지 배우들과의 술자리에 합석한 적이 있었다. 그때 회식 장소에 늦게 도착한 박근형 작가는 내 옆에 앉은 아직 군대도 안 간 스물두 살쯤 먹은 연극 지망생 청년에게 술을 따라주며 '뭐든 안 되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고 살라'고 말해 주는 것이었는데, 생각해 보면 멋진 충고였다. 뭐든 안 되는 게 당연한 거고, 그러다 뭐라도 하나 되면 정말 기뻐해야 하는 게 인생이라는 것이다. 


일요일에 회사에 나와 아이디어를 짜내다가 이런 부정적이고 퇴폐적인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뭐든 안 되면 안 되는데. 내일은 뭔가 똑똑한 게 있어야하는데. 아...저녁은 뭘 먹을까. 아내에게 전화를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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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병>

뒷담화의 향연 2017. 7. 6. 16:16


어제 부친상을 당한 후배 상모 신애 부부를 보러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갔다가 오랜만에 뚜라미 선후배들을 단체로 만났다. 남천이는 머리카락이 점점 많아진다는 소릴 들었고 동호는 뒤늦게 애인이 생겨 프로포즈를 한다고 자랑을 하기도 했다. 상화는 자신이 다니는 주얼리 회사의 홍보 방안에 대해 나와 잠깐 얘기를 나누다가 아이가 아파 먼저 일어선다고 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현경이가 부친상 공고를 뚜라미 페이지에 올렸는데 그걸 잘못 읽은 명지가 그 밤에 장지인 파주 성당으로 가서 전화를 하는 일이 발생했다. 나도 분당 서울대병원으로 가야 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일원동 삼성병원 영안실로 간 적이 있기 때문에 명지가 지금 느끼고 있을 황당함과 자괴감이 얼마나 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머리카락이 예술가처럼 멋지게 센 권일이는 요즘 강경화 장관 덕분에 백발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농담을 날리며 웃었다. 나는 아침부터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 아홉 시쯤 집에 가려고 일어섰으나 복도에서 인엽이 형과 딱 마주치는 바람에 다시 돌아와 상 앞에 주저앉았다. 그래도 열 시까지는 있다 가는 게 문상객의 도리 아니겠느냐는 선배의 충고를 차마 저버릴 수 없어서였다.

현경이 말에 의하면 요즘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도마에 오르는 경우가 잦다고 한다. 예전과 달리 여름 휴가도 오지 않고 각종 모임에도 불참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삼사 년 내리 여름 '대기리 휴가'를 가지 못했는데, 사실은 그때마다 절박한 사정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예전에 비해 내가 너무 여유없이 살아서이기도 하다. 어쨌든 고마운 일이다. 이번 대기리 휴가는 주말 일박이일이라도 참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인엽이 형도 도대체 요즘은 영화를 한 편 보거나 책 한 권 읽지 못하며 살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형과 예전에 같이 본 영화와 책들 얘기를 신나게 나누다가 내가 술병이 나서 입원했던 얘기까지 하게 되었다.

부모님 집에 얹혀 살고 있던 나는 당시 직장을 잠깐 쉬고 있었는데, 남아도는 시간과 불안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매일밤 사람들을 만나 술을 퍼마시고 들어오다가 어느날 덜컥 병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밤부터 슬슬 열이 나고 편도선이 붓기 시작하더니 결국 두통까지 찾아와서 밤새 한잠도 잘 수가 없었다. 병원은 아홉 시에 진료를 시작하는데 열이 펄펄 나고 머리는 깨질 듯 아파 도저히 그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여섯 시에 택시를 잡아타고 청구성심병원 응급실로 갔다. 

침대 위에 누워서 덜덜 떨고 있었는지 아니면 씩씩거리고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아무튼 한참 후에 당직 의사가 나를 진찰실로 안내해 이곳저곳을 만지고 쑤시고 들춰보고 하더니 거의 탈진 상태인 나에게 다가와 '다 알고 있다'는 표정과 목소리로 속삭였다.


닥터 : 지금 아무 생각이 없으시죠? 
성준 : 네... 

닥터 : 가족들한테는 감기몸살이 심한 걸로 해줄 테니까   
          며칠만 입원해서 쉬세요. 술병 났습니다. 
성준 : 아, 네...고맙습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대로 6인병실로 올라가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입원을 했다. 가족들은 워낙 신경이 예민한 내가 심신이 미약해진 나머지 병이 난 것 같다고 진심으로 걱정을 해줘 나를 더욱 미안하게 만들었다. 첫날은 죽이 나왔는데 정말 한 숟가락도 먹지 못하고 그대로 물리고 말았다. 입이 깔깔하고 얼굴을 숙이면 쏟아질 것 같아서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날은 그렇게 링거 수액을 맞고 주사와 약 처방을 받은 뒤 한숨 푹 자고 났더니 몸이 한결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이튿날부터는 죽을 먹기 시작했다.입맛이 돌고 점점 기운을 차리게 되니 병원에 누워있는 일이 심심하게 느껴졌고 새삼 세상이 궁금해졌다. 의사에게 이제 괜찮아진 것 같다고 했더니 그래도 이틀 정도는 더 입원을 해야한다고 야단을 쳤다.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워 TV를 보는데 드라마에 출연하는 탤런트들이 술집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얘기를 하고 있었다(당시엔 TV에서도 담배 피우는 장면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와, 쟤네들은 좋겠다. 마음대로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실 수 있어서. 송충이가 솔잎을 먹듯이 나는 술을 마셔야 하나 보다 생각했다. 

내가 입원을 했다고 했더니 악당 같은 친구 남길 씨와 내성이 형이 문병을 오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이들한테는 친구가 술병이 걸려 입원을 한 사실 자체가 무척 재미있고 신나는 이벤트인 것 같았다. 남길 씨는 나를 살살 꼬셔 병원 근처 호프집으로 끌고 갔다. 처음엔 질색을 했지만 막상 생맥주 한 잔을 마시니 세상 살 것 같았다. 웃음이 나왔다. 아,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이렇게 나쁜 친구들이 있나. 근데 맥주집에서 환자복은 너무 튀는구나...


예전 추억에 젖어 있다가 문득 차리니 벌써 열한 시 반이었다. 이젠 정말 일어서야지 하고 있는데 뒤늦게 재섭이와 한우가 도착했다. 한우는 운영하는 닭갈비집 영업을 마치고 오느라 늦은 것이고 재섭이는 집에 가서 저녁까지 먹고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아 수다를 떨다가 결국 한 시가 다 되어 일어났다. 한 번 만나면 쉽게 헤어지지 못하는 게 뚜라미들의 오랜 습성이라는 사실을 잠깐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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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동이 형

뒷담화의 향연 2016. 4. 30. 22:12





처음 들어보는데요. 


학생들은 '이적표현물'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이 년 전 춘천에 있는 한 대학교의 '카피랑이팅 실습' 시간에 있던 일이다. 나는  강의 시간에 "요즘 가수 이적과 작가 김영하가 각각 칼럼을 연재 중인데 칼럼 제목이 하나는 '이적표현물'이고 하나는 '영하의 날씨'라네요. 재미 있지 않아요?" 라고 했다가 졸지에  꼰대가 된 기분을 맛보아야 했던 것이다. 대학교에 걸개그림 하나만 잘못 걸어도 이적표현물이라는 누명을 쓰고 철거 당하거나 끌려갔던 게 엊그제 일 같은데,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니. 이런 게 세대차이인가.세상이 많이 변하긴 변했구나. 제기랄. 


이래저래 우울한 날이었다. 그런데 강의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더 우울한 소식을 들어야 했다. 루 리드가 죽었다는 것이다. 아아, 루 리드가 죽다니. 술 한 잔이 간절해졌다. 사람들은 루 리드라고 하면 영화 <접속>에 흐르던 노래 'Pale Blue Eyes'정도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가지고 루 리드를 애도할 순 없다.  당장 'Walk On the Wild Side'라도 듣고 싶어졌다. 생각해 보니 같이 루 리드를 들으며 앤디 워홀이나 J.J 케일까지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국동이 형 뿐이었다. 국동이 형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는다. 어느 술집이냐고 물었더니 병원이란다. 암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했단다.뭐, 암? 언제요?! 며칠 됐어. 히히 웃는 국동이 형. 아, 씨발. 이게 지금 웃을 일인가. 루 리드는 죽었고 국동이 형은 암에 걸렸다니. 도대체오늘 어쩌자고 이렇게 우울하냐.  


국동이 형이라고 있다. 나이는 나보다 한 열 살 가량 많은데 아직 결혼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내가 광화문MBC빌딩 안에 있던 MBC애드컴이라는 광고대행사 들어가서 그날 처음 만났던 사람이다. 일단 광고대행사라는 곳에 출근하는 건 생전 처음이라 얼이 빠져 있었고 그날은 각 부서와 팀마다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날이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11층 복도에서 누군가가 ‘아, 이건 말이 안 되잖아!”라고 소리를 지르며 자신을 붙잡는 손을 뿌리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 화를 내던 사람이 바로 정국동 차장이었다. 그는 어리둥절하고 있는 나한테 오더니 “야, 아까 그 사람이 나 찾거든 못봤다고 해.”라고 말하면 씩 웃고 돌아섰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정국동 차장은 총각이었고 디자이너였다. 지금은 모두 아트 디렉터라고 하지만 그때는 광고 디자이너라는 명칭이 더 흔할 때였다.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술을 좋아했고 음악을 좋아했다. 그런데 취향의 폭이 좁아서 모든 술과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술은 맥주만 마셨고 음악은 브리티쉬 락과  락큰롤, 그리고 마국의 서던락 등을 즐겨 들었다. 처음부터 국동이 형과 친했던 것은 아니었다. 팀도 달랐고 술 취향도 달랐다. 나는 소주를 주로 마시러 다녔으므로 국동이 형과 만나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팀 개편이 되면서 내가 정국동 부장 팀으로 발령이 났다. 그때만 해도 반항적인 기개가 살아있던 나는 상관의 농담에 더 센 농담으로 맞서거나 잘난척을 하며 그의 잘못을 지적하는 등 사사건건 감정적으로 부딪혔다. 살살 달래가면서 윗사람의 비위를 맞춰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왜 이러고 계세요?”

“외로워서.”


업무가 끝나지 않아 야근을 하던 나는 퇴근한 디자이너 자리에서 맥캔토시 컴퓨터로 재미 없는 골프 게임을 계속하고 있던 정국동 부장에게 가서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아마 또 여자와 헤어진 모양이었다. 국동이 형은 참 재주 좋게도 어린 여자애들만 사귀었다. 그것도 이십대 초중반만. 왜 그렇게 어린 여자애들만 사귀냐고 물었더니 '스물다섯 살만 넘어가도 정신을 차리기 때문에 그 전에 뭘 모를 때 꼬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긴 하지만 맞는 말이기도 했다. 그는 결혼보다는 연애가 더 좋았던 것이다. 그래서 어쩌다가 종로나 신촌에 있는 술집에서 그를 만나면 그가 사귀고 있던 '어린 여자애들'도 자동으로 만날 수가 있었다. 다들 엄청 술을 잘 마셨고 다들 쉽게 친구가 되었다. 종로에 있던 LP 많은 단골 술집 '투뮤직'에서는 도어스의 ‘Light My Fire’가 나오면 우리들의 애국가가 나온다며 모인 사람 모두 술잔을 높이 들었다.


우리가 주로 다닌 술집들은 신촌에 있었다. 회사가 마포로 이사를 간 이유도 있지만 LP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실 수 있었던 ‘ROCK’이나 ‘Rolling Stones’가 모두 신촌에 있기 때문이었다. '투뮤직'의 주인 인하 씨도 나중에 신촌에 'LPG'라는 가게를 또 열었다. 우리는 한 때 출근부 도장 찍듯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 집들을 다녔다. ‘ROCK’의 주인 호성이 형이나 ‘Rolling Stones’의 주인 두성이 형도 서로 친해서 가게가 먼저 끝나는 사람이 전화해서 만나 따로 술을 마실 정도였다. 가게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대중 씨나 '들찐이 날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젊은 단골 여자아이의 얼굴도 그립다. 우리는 술집 주인들과 어울려 새벽 한두 시가 넘어 신촌시장에서 2차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가 ‘Rolling Stones’에 불이 나서 두성이 형과 영화감독 이훈 씨 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나왔을 때 국동이 형이 혹시 그 자리에 있었던 건 아닐까 하고 많은 사람들이 안부 전화를 했었다. 다행이 형은 전날 술이 과해서 그날은 일찍 집에 들어갔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때 뉴스에서는 ‘락카페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며 술을 마시다 화재가 발생해서 사망했다’라는 식으로 기사가 나와서 우리를 화나게 했다. ‘Rolling Stones’는 당시 홍대에서 유행하던 락카페처럼 오렌지족들이 테이블 사이에서 춤을 추다가 부킹을 하는 곳이 아니라 락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시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기운이 넘쳐서 밤새워 술을 마시고도 아침이면 발딱발딱 일어나 출근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국동이 형은 일하기 편한 사람은 아니었다. 우선 아침잠이 많아서 지각을 자주 했고 회의 시간을 앞두고 사라지기도 잘 했다.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실컷 농담을 하며 킬킬거리고 놀다가 갑자기 안면을 바꾸고 일을 시키는 일도 흔했다. 한 마디로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질투심도 강했고 연애를 잘 하는 남자 후배들을 무조건 존경하는 성향도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익혀왔던 서브컬처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자신의 기준에 어긋나면 대놓고 미워하기까지 했다. '아담이 눈뜰 때'라는 소설에서 킹 크림슨 노래였던가 'penny'를 'penis'로 잘못 번역한 소설가 장정일을 기회 있을 때마다 미워했던 게 대표적인 케이스다. 재미 있지만 범생이 같은 무라카미 하루키보다는 날라리 과인 무라카미 류를 더 좋아하는 것에 자부심을 표했으므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들은 폄하되기 십상이었다.  '문화적인 잘난 체' 하면 또 어디 가서 안 지던 내가 이런 국동이 형과 사사건건 대립했던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급기야 어느날은 'Rock'에서 'Renaissance'라는 그룹의 보컬이 애니 허슬럼인지 그레이스 슬릭인지 술내기를 했는데 내기에서 이긴 내가 하도 대놓고 좋아하는 바람에 국동이 형이 대단히 삐친 사건이 발생했다.  



나를 미워하던 국동이 형은 어느 해 팀 개편이 있을 때 나를 그 힘들다는 '대한항공 팀'으로 팔아넘겨 버렸다. 그 팀은 별명이 '0830부대'였는데, 그 이유는 전날 저녁에 회의를 하면 바로 다음날 아침 여덟 시 삼십 분까지 인쇄 광고 시안들을 완성해 광고주 책상 위에 올려놔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매일 밤을 새는 지옥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내가 팀을 옮긴지 얼마 지나지 않아 IMF의 광풍이 대한민국 전역에 몰아쳤다. 회사에서도 미친듯이 인원감축을 단행해야만 했는데 국동이 형네 팀은 팀장인 국동이 형부터 밑의 직원들까지 몽땅 잘린 반면 대한항공팀은 단 한 명도 잘리지 않고 모두 살아남은 것이다. 당시 막강한 광고주였던 대한항공 광고팀이 대행사에 전화를 해서 자기 팀원 중 한 명만 잘라도 광고대행 끝, 이라는 엄포를 놓았던 것이다. 다들 일엽편주에 올라탄 것처럼 어질어질하던 시절이었다.  



국동이 형은 라면집을 하면 딱 어울릴 것 같아.


우리들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요리를 좋아하기도 했고  회사 앞 라면가게 '명재네'에서 간식을 먹을 때면 가장 맛있게 먹는 사람도 국동이 형이었다. 그리고 이젠 광고 디자인 업무에서 손을 떼고 좀 맘 편하게 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동이 형은 단호했다. 광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잘린 회사인 MBC애드컴 건물의 한 층에 세를 내고 들어와 사무실을 차렸다. 사무실 이름은 'Cream'이었는데 이건 에릭 크랩튼, 진저 베이커, 잭 브루스가 결성한 전설적인 브리티쉬락 그룹의 이름임과 동시에 속어로 '정액'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는 게자랑이었다. 흡사 일제시대에 시인 이상이 자신이 차린 다방 간판에 '69'라고 써놓고는 그게 섹스체위를 뜻하는 것인데 아무도 모른다며 좋아하던 것과 같은 형국이었다. 'Cream'은 망할듯 망할듯 망하지 않으면서 계속 명백을 유지해 나갔고 국동이 형은 저녁이면 여전히 신촌이나 홍대 부근 술집에서 두비 브러더스의 'Long Train Running'을 신청하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꾸준하게 술을 마시는 국동이 형이 나중에 죽으면 우리가 돈을 모아 신촌에 공덕비라도 하나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고, 그 소리를 들은 우리들은 모두 동감의 의미로 고개를 끄떡였다. 




시간이 흘러갔고 국동이 형도 나도 나이를 먹어갔다. 나는 그 이후 다른 대행사들과 프리랜서 생활을 거치느라 예전 직장동료들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데 함박눈이 미친듯이 쏟아지길래 국동이 형한테 '눈이 오는데 전화 걸 사람이 딱히 생각나지 않아서 형한테 걸었다'고 했더니 '눈 오는 날 내가 왜 니 전화를 받아야 하느냐'며 불 같이 화를 내고 끊었다. 그래도 국동이 형은 잊혀질 만하면 전화를 걸어 술을 마시자고 했다. 어느날은 오후 세 시부터 전화를 걸어 '이젠 아무도 나와 술을 마셔 주지 않는다'고 징징거렸고 어느날은 '술도 사주고 왕복 택시비까지 오자마자 현금으로 줄 테니 지금 당장 홍대앞으로 나오라'는 내용의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나는 택시비까지 그냥 받는 게 미안해서 내가 좋아하던 책을 몇 권 들고 나갔는데 그 중 하나가 아사지 지로의 '칼에 지다' 1,2권이었다. 나중에 국동이 형은 이 소설을 너무 잘 읽었다며 '사무라이 소설을 그렇게 잘 쓰는 사람은 처음 봤다'라는 소감을 피력하기도 했다. 물론 국동이 형이 사무라이 소설을 이 책 말고 또 읽은 게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즈음 같이 만나 친구 중에 드라마 '이산'과 '동이'를 썼던 후배 김이영이 있었는데 이영이가 정국동이라는 이름이 정말 특이하다며 언젠가 꼭 한 번 자기가 쓰는 사극의 인물 중 하나로 기용하겠다고 허락을 구하기도 했다. 나도 예전에 '백만장자와 결혼하가'라는 그녀의 드라마에 이름을 빌려준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들으니 '화정'인가에서 정말로 '정국동 대감'이라는 캐릭터가 등장을 했다고 한다. 정국동이라는 이름은 강호동만큼이나 특이해서 같은 회사를 다녔던 카피라이터 탁정언 선배가 쓴 소설 '이름 없는 전쟁' 에도 등장한다. 당시 회사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재구성해서 쓴 소설이라는데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모두 다 바뀌었고 정국동만 이름과 캐릭터가 실제 인물과 비슷하게 나왔던 재미 있는 작품이다. 



루 리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 국동이 형이 암에 걸린 걸 알게 된 나는 며칠 후 여자친구와 함께 봉투에 오만 원을 넣어가지고 병원으로 찾아갔다. 난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정작 몇 달간 술 담배를 못한 국동이 형은 얼굴이 뽀얬다.  과연 이 위기를 이겨낼 수 있을까 걱정을 했더니 다행히 초기에 발견한 암이라 완치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다른 데가 아파서 검사를 하다가 우연히 암을 발견하게 된, 억세게 운 좋은 케이스였던 것이다. 문병을 당하는 일 자체가 즐겁고 신난다는 듯 히히히 웃는 국동이 형은 의외로 환자복이 잘 어울렸다. 



몇 달 전 국동이 형을 홍대앞 따루주막에서 만났다. 요즘은 술 담배를 안 하지만 여전히 술집을 쏘다니며 밤새도록 논다고 한다. 이젠 자기가 술을 못 마시니까 다름 사람들이 마시는 걸 보면서 노는 것이다. 아마 여전히 이쁜 가게 주인들과 친하게 지내느라 그러는 것이리라 짐작을 해본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는 소리가 있지 않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국동이 형은 우리가 살아서 공덕비를 세워주지 못할 정도록 오래 살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만장하신 신사숙녀 여러분, 혹시 신촌이나 홍대앞에서 키가 작고 통통한 60대 초반의 무알콜 락애호가를 만나거든 내 얘기를 하며 맥주 한 잔을 요구하시라. 국동이 형은 아마 당신께 흔쾌히 맥주 한 잔을 사주고 나에게 전화를 걸어 '너 때문에 또 삥을 뜯겼다'라고 투덜거릴 게 틀림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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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환이 형

뒷담화의 향연 2016. 4. 20. 21:13



오후 4시쯤 '어디 가서 아이데이션이나 좀 할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며 회사 근처 카페를 향해 비적비적 걸어가다가 느닷없이 규환이 형을 만났다. 규환이 형처럼 생긴 사람이 저기서 날 보고 웃고 서 있길래 가까이 가보니 정말 규환이 형이었다. 형도 길을 걷다가 '저거, 내가 아는 놈 같은데...' 하고 긴가민가 서 있었다고 한다.


너무 반가웠다. 나는 마침 카페 가는 길인데 같이 가서 커피나 한 잔 하자고 규환이 형을 꼬셨다. 가방도 들지 않고 손에는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 한 권, 맨발에 스니커즈까지, 예전 대한민국 최고의 CF감독이던 시절의 스타일과 포스는 지금도 여전했다. 의자에 앉아 커피와 케이크를 주문하고 내가 신입사원 시절에 정동MBC빌딩 엘리베이터 앞에서 형을 만났던 얘기부터 다른 뚜라미 선배들의 안부까지 두서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규환이 형은 우연히 내 블로그인 '편성준의 생각노트'에 들어와 글을 좀 읽었는데 의외로 깊이가 있었고 무엇보다 솔직하게 쓰는 게 마음에 들었다고 말해 주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형이 나의 글을 읽을 거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규환이 형도 지난 20년 간 틈날 때마다 꾸준히 뭔가를 쓰고 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내용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 또는 나는 무엇인가'에 다름 아니라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요즘 나에게 무슨 책을 읽고 있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최근에 읽은 카뮈의 책들 중에서 니체에 관한 이야기를 했고 그것과 통하는 김민기의 옛노래 얘기도 했다. 그러면서 '힌두교의 인생 4단계'에 대한 얘기도 정말 재미있게 들려줬다. 나에게 평소 뭘 할 때 제일 즐거운지, 뭔가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게 뭔지, 그래서 가장 화나는 게 뭔지 등을 물었다. 신기했다. 형의 질문에 기계적으로 대답만 했을 뿐인데도 정작 내가 뭘 좋아하는지, 또 앞으로 뭘 하면 즐거울 지가 좀 더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형은 뉴욕에서 살면서 무척 외로웠는데 어느덧 그 외로움 때문에 예전과 달리 두꺼운 책들까지 천천히 다 읽을 수 있었던 경험을 했고 그러면서 더 깊이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마치 소설가 황석영이 감옥에 가서 대하소설들을 뒤늦게 다 읽었다고 하더니 그런 거군요, 라고 내가 아는 척을 했더니 맞다고 하며 웃었다.


형은 나에게 일 말고도 쓰고 싶은 글을 계속 써보라고 얘기했다. 요즘 영화 중 팀 로스가 나오는 [크로닉]을 꼭 보라고도 했다. 되도록이면 혼자 보라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 자기가 막걸리 한 잔 할 때 부르면 당장 달려 나오라는 명령도 했다.



아이데이션은 못했지만 운 좋은 날이었다. 논현동에서 길을 가다가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을 손에 든 옛선배를 만나 찻집에서 수다를 떤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 아까 페북에 썼던 글인데, 나중에 혹시라도 규환이 형 여기 들어오시면 읽고 반가워 하시라고 여기에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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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제 친구 민석이와 민석이 여자친구,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이 연신내에서 밥을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민석이가 화장실 간 사이에 민석이 여친은 제게 민석이와 사귀기로 결심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에 대해서 얘기해줬습니다.  


그때 민석이가 일을 쉬고 잠깐 놀 때였는데, 어느날 이 여자가  민석이네로 전화에서 민석 씨를 찾았더니 어머니가 "민석이, 요 앞에 만화가게 갔는데?"라고 말씀하시더란 것입니다. 서른이 넘은 아들이 엄마에게 만화가게 간다고 무심히 애기하는 것도 그렇고, 아들 만화가게 갔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친구한테 전해주는 엄마도 그렇고. 그 순간 그 집이 너무 마음에 들더라는 것입니다. 


휴대전화도 별로 없던 시절의 얘기입니다. 눈이 오는 날이라 별 게 다 생각이 나나봅니다. 그래서 그 둘이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잘 살았냐고요? 에이, 그건 또 아니죠... 민석인 지금도 혼자 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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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코끼리가 그려진 에버노트라는 앱을 본 적이 있는가. 기억력이 좋은 동물로 알려진 코끼리를 사용한 이 앱은 ‘모든 것을 기억하라( Remember Everything)’라는 모토처럼 세상의 모든 기억을 향상시키겠다는 비전을 갖고 태어난 기업이자 디바이스의 이름이기도 하다. 언제든지(Ever) 기록하고(Note) 자신만의 콘테츠를 언제까진(Ever) 저장할 수 있다.  스마트폰에서 혹은 컴퓨터에서만 쓸 수 있는 메모 어플리케이션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최고의 노트다. 


나도 에버노트 사용자다. 그런데 굉장히 초보적인 사용자다. 내가 에버노트로 하는 일이라고는 길을  가다가 또는 사무실에서 멍때리다가 갑자기 생각난 단어나 문장을 재빨리 기록하고 나중에 그걸 찾아 다시 새로운 글이나 아이디어로 발전시키는 것뿐이다. 때로는 신문 칼럼이나 인터넷 기사를 스크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게 거의 다다. 나는 하위 폴더들을 생성해 정보를 분류하지도 못하고 태그 기능으로 데이터를 검색하지도 못한다. 이 모든 게 무식하고 게을러서 그렇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번에 홍순성 소장이 쓴 에버노트 책의 제목 ‘프로들의 에버노트’라는 제목을 짓게 되었다. 홍 소장은 우리나라에서 에버노트에 가장 정통한 스마트 워킹 및 정보관리컨설턴트다. 나는 몇 년 전 아내의 추천으로 홍 소장이 진행하는 에버노트 유료강좌에 한 번 참석한 적이 있었다.  글을 쓰거나 아이디어를 내는 데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워낙 컴맹 수준인 나는 다름 참석자들이 다 이해하는 애버노트 기본 사용팁을 거의 숙지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예나 지금이나 스마트 워터가 아닌 나는 그저 메모만 하는 것으로도 에버노트 사용에 만족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후로 페이스북을 통해 서로 간간히 안부를 묻게 되었고 사람 좋아하고 또 사람들끼리 연결해 주기 좋아하는 홍 소장 덕에 나의 힘으로는 만나기 힘든 직종의 몇몇 전문가들과 몇 번의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예전부터 인복이 많은 나의 행운 덕분이다.

얼마 전 홍 소장이 새로운 책의 이름을 공모한다는 글을 페이스북 담벼락에 올렸다. 책 제목의 조건은 일단 짧을 것(두 단어면 좋겠다), 그리고 ‘일 잘하는 사람들의 에버노트’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을 것 등이었다. 이미 많은 분들이 댓글로 책 제목 응모를 하고 있었다. 나도 그냥 지나치기 싫어서 ‘프로들의 에버노트는 어떠세요?’라는 댓글을 달았다. 그리고 며칠 후 홍 소장으로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일단 내가 응모한 ‘프로들의 에버노트’를 후보작으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종 결정 전까지 몇 가지만 더 아이디어를 내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조금 더 고급스러운 제목은 없을까, 조금 더 아이디얼한 것은 없을까 하는, 모든 저자들의 욕심이었다. 

마침 휴가를 내고 집에서 쉬고 있던 나는 주말 동안 아이데이션을 좀 더 해서 이렇게 메시지를 보냈다. 

"홍 소장님, 책 제목 관련 메모입니다. 짧게 생각해보면 ‘프로들의 에버노트’ 정도가 제일 나은 거 같구요, 조금 더 긴 문장이 되도록 생각해 보면 ‘에버노트로 성공하기’나 ‘성공하는 사람들의 에버노트 습관’ 같은 패러디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Good job with Evernote’처럼 아예 영어를 쓰는 건 어떨까 생각도 해봤고 ‘모든 것을 기억하라’같은 에버노트의 모토를 생각하면 ‘내가 만드는 보물창고, 에버노트’ 같은 의미 확장도 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두 단어라는 제약 때문에 쉽지가 않더군요. 어쨌든 제가 생각한 것들은 이 정도입니다. 휴가 중인데 나름 바쁘네요. 더 많은 아이디어를 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책 제목이 ‘프로들의 에버노트’로 전해졌다는 소식이 왔다. 그리고 책 제목 때문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책이 잘 팔려서 곧 2쇄를 찍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렸다. 엉겁결에 지은 제목이 사람들에게 많이 전달된다니 반갑고 기쁘다. 그리고 들국화컴퍼니에서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다시 행진’이라는 들국화 콘서트 제목을 생각해 낸 나의 아내처럼 나도 ‘프로들의 에버노트’라는 제목을 지었다는 생각에 일말의 뿌듯함도 느껴졌다. 그저께 월향 이태원점에서 만난 홍 소장이 방금 출간된 ‘프로들의 에버노트’ 두 권을 우리 부부에게 선물로 주셨다. 이왕 이렇게된 거, 책을 열심히 읽고 앞으로는 좀 더 프로처럼 일해봐야겠다. 그러고 보니 내 티스토리 블로그 이름도 '편성준의 생각노트'다. 물론 이건 기타노 다케시가 펴낸 책 제목을 패러디한 것이긴 하지만. 


(조금 전 샤워하다가 생각난 카피를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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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말 폭염의 절정이었죠. 이렇게 더운 여름날 오전 압구정역까지 갔다가(우리 부부는 전철을 거꾸로 타고 무려 다섯 정거장이나 갔다가 다시 불광동 방향으로 가는 멍청한 짓을 저질렀거든요) 불광동으로 종로3가로 광장시장으로 종횡무진 돌아다니다 보니 몇 년 전 겪었던 ‘한여름 화장실 사건’이 문득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날도 오늘처럼 햇볕이 엄청 뜨겁고 습한 날씨였는데, 저는 어찌된 일인지 대낮에 혼자 구 안세병원사거리 근처를 터벅터벅 걷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랫배에 가스가 차더니 장이 꼬이면서 특정부위가 매우 아파오는 것이었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놈들한테 흔하게 일어나는 생리현상이죠. 문제는 그럴 경우 제가 몇 분을 견디지 못하고 아무데서나 일을 저지를 소지가 충분한 놈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위기에 빠진 저는 미친듯이 화장실을 찾아 근처 건물 사이를 달렸습니다. 


다행히 더큰집설렁탕과 SK주유소 사이 지하 이발소 건물에 화장실 문이 열려 있더군요. 저는 크게 기뻐하며 한달음에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변기 위엔 앉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하하. 절박함과 안도감이 뒤섞이며 저도 모르게 웃음과 눈물이 한꺼번에 나왔습니다. ‘열린 화장실’은 정말 누군가에게 천사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일단 급한 일을 해결하고 일차 물을 내리고 나니(저는 늘 중간에 물을 한 번 내립니다) 비로소 찌는듯한 무더위가 느껴지더군요. 화장실 안은 너무나 무더웠습니다. 


저는 꾀를 내어 변기에 앉은채로 티셔츠를 벗었습니다. 정말 더울 때는 웃도리만 벗고 있어도 몸의 열이 많이 날아가거든요. 그런데 좁은 화장실 안에서 벗은 티셔츠를 두 팔에 걸친 상태로 괄약근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저에게 곧 불행한 일이 생겼습니다. 갑자기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어떤 여자분이 저를 바라보며 마구 비명을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아아아~!!


저도 소리를 질렀습니다. 갑자기 믿었던 화장실 문이 열린 것만도 황당한데 모르는 여자가 변태 쳐다보듯 제 벗은 몸을 보고 있었으니까요. 생각해보면 한 2초 정도밖엔 안 되는 순간이었겠지만 그 어떤 기간보다도 밀도가 높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게 어찌된 일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죠.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 모든 의문이 풀렸습니다. 그 화장실은 여자화장실이었고 제가 들어간 곳은 마침 문고리가 고장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너무나 급한 나머지 그런 사항들을 챙길 틈이 없었던 거구요.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여자화장실 문을 열었더니 어떤 변태 같은 놈이 웃통을 벗고 바지도 벗은채 변기 위에 앉아 씩씩거리고 있으니 그 여자분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저는 그 화장실에 더 있다가는 졸지에 변태로 몰려 몽둥이찜질을 당할까봐 겁이나 미친듯이 건물을 빠져나와 달렸습니다. 그날 화장실에서 저 때문에 놀라 쓰러졌던 그 여자분, 뒤늦게라도 이렇게 사과 드릴게요. 그땐 전도 너무 경황이 없었어서 그랬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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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규어 아티스트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더구나 이소룡 피규어를 만들어 많은 골수팬들을 확보하고 있는 사람은 전 세계를 통틀어 어니 킴 단 한 명뿐일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 아티스트가 나랑 꽤 친분이 있는 사람이다. 피규어 아티스트 어니 킴(김형언)은 내가 활동하던 대학 서클뚜라미의 일년 선배다. 동네가 비슷해 학교 다닐 때도 전철에서 자주 만났고 취미도 비슷해 집에서김형언의 혼자 듣는 음악실같은 걸 녹음하며(내가 게스트로 출연하면둘이 듣는 음악실로 제목이 바뀌었다) 키득키득 놀기도 참 많이 했다. 미대를 나온 어니 형은 대개의 아티스트들이 그렇듯 음악에도 소질이 많아서 기타와 피아노를 참 잘 쳤고 대학 일학년 때부터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다가 한때 프로 뮤지션으로 앨범을 내기도 했었다. 일찍이선우라는 광고 프러덕션에서 조감독을 거쳐 나중에 감독까지 했으니 나의 광고 인생 선배이기도 하다.

 

대학교 일학년 때 동기 여자애들이서클실에 들어가 보면 얼굴이 창백한 미소년이 와서 기타를 치는데, 분명 한 대의 기타에서 두 대의 기타 소리가 난다는 것이었다. 그 미소년은 다름아닌 어니 형이었고 그의 기타 주법은쓰리핑거였다. 통기타 음악동아리에 들어가면 대부분 쓰리핑거 주법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어니 형의 쓰리핑거는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스승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의 기타 선생은 다름 아닌 폴 사이먼. 그렇다. 어니 형의 음악적 뿌리는 ‘Simon & Garfunkel’이었던 것이다. 어니 형은 자신의 소년 시절 열렸던 사이먼 앤 가펑클의 전설적인센트럴파크 공연 실황비디오 테이프를 매일 슬로우 비디오로 돌리고 또 돌려보면서 기타 주법을 사숙했던 것이다. 도대체 몇 번을 봐야 기타를 전혀 못 치던 소년이 폴 사이먼처럼 기타를 치게 되는 걸까? 이건 정말 미친 짓이며오타쿠의 전형이다.(노약자나 청소년 여러분, 따라 하려면 따라 해 보라).

 

사이먼 앤 가펑클이 1981년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약 50만 명의 관객을 불러모은 무료 공연은 이렇듯 한 소년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들이 바꾸어 놓은 인생이 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을 처음 들었을 때의 그 감흥을 잊지 못한 사람은 여기저기 참 많았던 것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폴 사이먼의 기타를 좋아했고 그의 아름다운 노랫말을 좋아했으며 아트 가펑클의 청아한 목소리에 매료된 것 등이었다. 그리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사이먼 앤 가펑클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침내 여 모임을 만들게 되었고 서로 그들의 곡을 부르고 연주하면서 그들만의순결한 감성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들을 기리는트리뷰트 공연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2013년 가을밤, 추석 연휴 마지막 일요일 홍대앞 디딤홀에서 사이먼 앤 가펑클을 기리는 ‘Old Friends Concert’가 열렸다. 어니 킴과 홍정우, 안진영, 안태영 형제 등 동호회 회원들이 모여 오랜만에 제대로 된 공연을 펼친 것이다. 센트럴파크 공연 때처럼 ‘Mrs. Robinson’이 먼저 울려 퍼지자 관객들은 미소를 머금기 시작했고 ‘Homeward Bound’, ‘April, Come She Will’을 차례로 들으며 모인 사람들은 모두 타임머신을 타고 각자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뮤지션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홍정우 씨는 목소리가 짱짱하고 청아하며 특히 존 덴버의 노래를 잘 한다. 그날도 콘서트 중간에 존 덴버의 ‘Calypso’와 빌리 조엘의 ‘PianoMan’, 김광석의먼지기 되어등을 불러 흥을 돋구었다. 안진영, 안태형 형제 같은 경우는 참 특이했는데 둘 다 기업인으로 활동하면서도 성당의 성가대 등을 통해 음악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사는 분들이었다. 어니 킴 형의 결혼식에서도 이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는데, 이날은 참 많은 곡들을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사랑해요라는 노래를 히트시켰던 고은희 이정란 누나들도 뚜라미 선배들인데 이날은이정란/이윤선커플로 출연해 옛노래와 새노래를 들려주었다.

 

무협영화를 보면 웬만한 사람들은 다 날아다니는 게 당연하듯이 여기서는 평범하게 생긴 사람들도 무대에만 올라오면 다들 기타를 잘 쳤고 노래를 잘 불렀다. 신기한 일이었다. 사회활동을 하면서 돈을 벌어 가족을 공양하며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능숙하게 악기를 다루고 음악을 즐기며 타인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산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를 이들은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어니 킴은 공연 중간에 자신의 아내와 나눈 얘기를 하며 한숨을 쉬었다.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있는데 왜 이렇게 돈도 되지 않는 공연을 하느냐?”고 묻는 아내에게 얼른 속시원한 답변을 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형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꿈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꿈을 꾸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마음 속엔 어린 시절의 추억이 접혀 있고 이루지 못한 꿈들이 숨어 있다. 그런데 그 꿈을 가끔이라도 다시 꺼내 반짝반짝하게 닦아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해야 더 정확한 문장이 될 것이다. 자신의 생계와는 관계없이 무엇인가 소중한 가치를 나누는 사람들우리는 이런 사람들을진짜 부자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비록 그들이 몇 평짜리 집에 살고 있는지,  통장에 얼마의 액수가 찍혀있는지는 알 수 없을지라도 말이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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