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나 괜히 걷다가 헤어지는 모임 '토요워킹퀸'이 열리는 날이었는데 오전에 급하게 정리해 넘겨야할 일이 있어서 나는 정시 출발을 하지 못하고 아내만 먼저 나갔다. 열두 시쯤 겨우 일을 마치고 나가 어제의 중간기점인 마장역 근처 '황귀닭곰탕'에서 윤정, 동현, 하늬 등 멤버들을 만났다. 이곳은 24시간 영업을 하는 기사식당인데 닭백반, 닭곰탕, 닭껍질, 닭껍질무침 등 메뉴들이 세분화 되어 있고 가격도 아주 싸다. 남대문 갈치골목의 '진미닭집'의 포스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훌륭한 닭요리집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닭껍질 요리를 시켰고 닭백반을 시킨 아내가 닭껍질무침도 하나 시켰다.
"닭껍질을 보니까 캐서린 비글로의 영화 <폭풍속으로>가 생각나네."
내가 이렇게 말을 꺼내자 아내가 "거기서 키애누 리브스가 얼마나 멋있게 나오던지." 라고 말을 받았다. 키애누 리브스와 패트릭 스웨이지 둘 다 너무나 멋있게 나오던 끝내주는 오락영화였다고 다들 그 작품을 추억했다. "거기서 키애누 리브스가 FBI 사무실을 걸어가면서 선배에게 이런 말을 하거든. 저는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닭껍질도 안 먹어요. 그래서 어, 저놈들도 닭껍질은 몸에 안 좋다고 조심하는 모양이구나 생각했지."
그러자 듣고 있던 윤정이 마지막에 키애누 리브스가 FBI 신분증을 바다에 던지는 장면이 멋있었다고 말했다. "그 장면하고 똑 같은 게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라는 영화에 나와. 하트로 나오던 티모시 보텀스가 마지막에 A- 학점이 적힌 성적표를 종이비행기로 만들어 바다에 날리지. 하트는 계약법을 가르치던 킹스필드 교수의 딸과 사귀었는데 그 딸이 린지 와그너였어. <소머즈>에 나왔던."
윤정이 놀라서 묻는다. 어떻게 그런 걸 다 기억해요? 예전에 영화 좋아하는 친구와 그 대사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고 대답하자 옆에서 동현도 말한다. 저도 <폭풍속으로>는 많이 봐서 거의 외우다시피 봤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대사가 있었는지는 몰랐네요. 그런자 아내가 "오빠는 날 앉혀놓고 맨날 이런 얘기를 해. 난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라며 웃는다. 아내는 영화 제목이나 배우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라 이런 내가 특히 이상하고 한심하게 느껴질 것이다. 나는 아내가 못 알아 들으면 순자라도 앉혀놓고 그런 얘기를 계속 한다고 농담을 했다.
생각해보면 참 쓸 데 없는 얘기들이다. 폭풍속으로가 밥을 먹여주냐 아니면 거기서 돈이 나오냐. 그러나 나에겐 이런 실없는 얘기를 할 때가 가장 즐겁고 걱정 없는 시간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아무런 목적없이 흘려버리는 일종의 치유시간이라고나 할까. 늘 중요한 얘기만 하고 사는 인생은 재미 없다. 그런 면에서 요즘 내가 회사에서 지내는 시간을 돌아보면 처참할 지경이다. 직원들과는 물론 클라이언트와 만나도 농담 한 마디 하지 않는 것이다. 농담이나 한담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위험신호다. 이렇게 계속 나사가 안 풀어지면 크리에이티브한 생각을 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회사에서 안 되면 집에서라도 정신의 나사를 자주 풀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그나저나 닭껍질을 다 먹고 다시 청계천 길을 걷느라 <폭풍속으로> 얘기를 다 하지 못했다. 사실 그 영화는 캐서린 비글로가 감독이지만 제임스 카메론이 옆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멋진 영화로 탄생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녀의 전남편이었던 제임스 카메론은 이 영화의 제작자로서 당시 자신이 감독하던 영화보다 더 열심히 이 작품에 심혈을 기울이는 의리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제임스 카메론은 영화 작업을 하다가 만난 여자들과 계속 결혼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건 그의 첫 영화였던 <터미네이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영화의 시나리오를 써가지고 영화사를 돌아다니던 제임스는 게일 앤 허드라는 제작자와 만나 '감독을 하는 조건으로 단돈 1달러에 시나리오를 파는' 담판을 지었고 내친 김에 그녀와 결혼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에이리언2> <터미네이터2> <타이타닉> <아바타> <알리타> 같은 블럭버스터 영화들로 이어지는 제임스 카메론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이것도 다 쓸 데 없는 얘기이긴 하지만. 뭐, 그냥 그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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