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토요일에 만나서 괜히 걷다가 헤어지는 모임 '토요WalkingQueen'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이번엔 남산길을 코스로 정했습니다. 벚꽃은 다음 주가 절정일 것 같지만 저희가 그때는 다른 스케줄이 있어서 이번 주로 정한 것이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아침에 영화 [약속]을 보러 일찍 명동으로 나갔습니다. 전도연과 설경구가 또 얼마나 사람들을 울릴까 걱정을 하면서 갔고 실제로 영화를 보면서 저와 아내 모두 엄청나게 눈물을 흘렸지만 결론적으로 영화를 보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월호 참시 이후의 개인적 삶을 정면으로 다룬 극영화이다 보니 접근 자체가 굉장히 조심스러웠으나 시나리오와 연기에서 과잉이나 쓸 데 없는 욕심을 부리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이창동 감독이 제작을 맡았고 감독인 이종언도 이전 이창동의 작품에서 일을 했던 인물이라 믿음이 가기도 했었죠.
영화 상영 시간 내내 코를 풀어내며 우느라 힘이 쪽 빠진 저희 부부는 충무로의 단골집인 '사랑방 칼국수'에 가서 닭백숙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동대입구 태극당에 가서 커피와 빵을 먹으며 영화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오후 두 시 정각에 오늘 처음 참여하는 이창희 씨가 오셨습니다. 저와 페친이신데 그림을 그리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유화를 그리신답니다. 곧이어 채윤정 씨가 도착해서 함께 나가 걷기 시작했습니다. 국립극장 쪽으로 올라가 남산을 한 바퀴 도는 코스였습니다. 오후에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날이 잔뜩 흐렸지만 그래도 봄을 맞아 여기저기서 피어난 개나리, 진달래, 벚꽃 들의 기운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꽃들의 아름다움과 싱그러움을 만끽하면서 차가 없는 남산길을 걸었습니다.
이창희 씨는 많이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나오셨다고 했고 저희는 잘 오셨다고 박수를 보냈습니다. 자기는 나무와 숲이 많은 곳으로 오면 후각이 날카로워진다고 하며 덕분에 식물들의 냄새를 많이 느낄 수 있어 좋다고 했습니다. 채윤정 씨도 조금 귀찮았었는데 막상 나오니 너무 좋다고 하며 활기찬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세 시가 넘으니 비가 후두득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와 저, 채윤정 씨는 윈드브레이커의 모자를 뒤집어썼고 이창희 씨는 가방에서 고장 난 우산을 꺼내 썼습니다. 걷기 힘들 정도의 비는 아니라서 다행이었습니다. 한남동 쪽을 돌아 다시 동대입구 쪽으로 내려와 걷기를 멈추고 평안도집에 가서 족발 대자를 시켰습니다. 제가 소맥을 세 잔 만들어 돌렸더니(요즘 금주 중인 윤혜자 씨는 물을 마셨습니다) 다들 맛있다고 하며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배가 부르지만 계속 음식이 들어가는 게 신기하다는 뻔뻔한 얘기를 하면서 막국수와 빈대떡까지 시켜 먹었습니다. 술이든 음식이든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일어난 저희는 바로 옆에 있는 '달콤커피'에 가서 커피도 한 잔씩 마셨습니다. 이창희 씨가 창밖을 바라보며 비가 오니 참 좋다고 했고 채윤정 씨가 자기도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졸지에 소녀가 된 세 여성과 함께 이런저런 감성 수다를 떨다가 족발 값 및 커피값을 N분의 1로 나누어 주고받음 뒤 헤어졌습니다. 아무런 목적이나 이슈 없이 그냥 내키는 사람들끼리 토요일에 만나 걷는 게 생각보다 즐겁습니다. 다음 토요워킹퀸엔 또 어떤 분들이 함께 하실지 벌써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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