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서울대병원 영안실에 간다고 했다. 5월 말에 <남자요리교실>에서 나에게 '데리야끼 스테이크 요리' 특별강의를 해주셨던 김승용 선생이 너무도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나를 만나셨던 게 마지막 수업이었다고 하니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비극적인 부음이었다. 정정하던 분이 그렇게 갑자기 가시다니. 나도 함께 가서 조문을 하고 싶었지만 회사에 급한 프로젝트가 있어서 꼼짝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2015년 당시 우리나라는 메르스가 창궐하는 중이었고 믿었던 삼성병원과 서울대병원이 그 전염병의 주요 확산지라는 게 뒤늦게 밝혀지면서 모두들 분노하고 있을 때였다. 아내 혼자 그런 곳에 보내는 게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성격상 말린다고 안 갈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갈 때 가더라도 마스크라도 단단히 하라고 당부를 할 뿐이었다. 

회사 회의실에서 메르스 관련 뉴스를 보다가 서울대병원이 스쳐 지나가길래 "어, 아내도 지금 저기 문상 가 있는데..."라고 했더니 같이 일하던 고재영 실장님이 "진짜요? 지금 당장 나오라고 하세요. 큰일 나요! 당장이요!"라고 외치는 게 아닌가. 늘 천하태평이던 고 실장님이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소리를 지르는 건 처음 보았다.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얼른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얼른 거기서 나와. 응, 글쎄 빨리 나오라니까!" 

나하고는 상관 없다고 생각했던 중동호흡기증후군, 즉 메르스가 구체적으로 내 삶에 개입을 시도한 날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든 착한 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이거나 가리지 않고 아무에게나 덤비는 무서운 전염병 메르스. 마스크도 하지 않고 병원을 활보하던 아내는 다행히 무사히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곧 메르스를 잊었다. 정부 당국에서 이제 다 완치 되었다고 했으니까. 우리나라는  메르스 안전국가라고 했으니까. 그러다가 2018년 가을 김탁환의 소설 [살아야겠다]를 통해 메르스와 다시 만났다. 이번엔 메르스가 아니라 '메르스의 진실'과 만났다. 

"2015년 여름, 한반도를 휩쓸었던 메르스는 186명의 확진 환자와 38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런 간단한 기사문이나 뉴스 한 꼭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숫자로만 표시된 환자와 피해자들에게선 아무런 고통이나 애환이 느껴지지 않는다. 메르스라는 전염병도 관념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 그게 어떤 형태로 다가오는지 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고통을 주었는지 알 길이 없다. 일단 질병이란 게 그렇다. 걸렸거나 안 걸렸거나 딱 두 가지 뿐이다. 걸린 사람은 왜 하필 나한테 이런 불행이 온 걸꺼 억울해 하고 안 걸린 사람은 어휴, 다행이다 하고는 곧장 외면하는 비정한 세계. 그 중간에 서서 피해자는 물론 피해자가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공감과 의심을 불러 일으켜주는 존재가 바로 소설가다. 글을 쓰는 사람은 그래서 필요한 것이고 그게 바로 작가의 효용 중 하나라고 김탁환은 믿고있는 듯하다. 

[살아야겠다]는 관념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2년 동안 메르스 완치자와 유가족을 인터뷰하고 당시 벌어진 일을 촘촘하게 취재한 뒤 에두르지 않고 메르스가 창궐하고 있는 병원과 병실 한가운데로 돌진한다. 그리고 김석주와 길동화, 이첫꽃송이처럼 피와 살을 가진, 방금 전까지 펄펄 살아있던 사람들의 얘기 속으로 들어간다. '번호'가 아닌 '사람'을 찾고자 했던 작가 김탁환이 르포 형식을 포기하고 '피해자들의 서사'가 있는 소설로 구성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이첫꽃송이의 직장 상사인 선우 기자의 입을 통해 이렇게 밝힌다. 

"전쟁이든 참사든 전염병이든, 생사를 넘나드는 사건의 기록일수록 어떤 그룹의 서사인지가 명확해야 해. 이대로 간다면 메르스 피해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숫자로만 남을 거야. 통계 자료로만 호출될 거고. 피해자 각자가 어떤  개성을 지녔고 어떤 꿈을 꾸었고 어떤 상처를 입었고 어떤 고민을 했는지 그 사람 됨됨이를 기록해야 해. 그리고 피해자들의 서사는 지구 전체로 확산해야 해."  

선우 기자의 말대로 그들은 어떤 개성을 지녔고 어떤 꿈을 꾸던 사람들이었나. 치과의사였던 김석주는 인간의 고통을 줄이거나 없애고 싶어서 뒤늦게 의사가 되었지만 어느날 림프종 환자가 되었고 결국 그걸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왔다가 메르스에 감염되었다. 출판사 물류창고에서 일하는 베테랑 직원 길동화는 책을 좋아하고 운동을 좋아하는 중년 여성인데 여동생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왔다가 메르스  환자가 되었다. 방송국 수습기자인 이첫꽃송이는 병원에 와서 죽음에 이른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다가 메르스의 마수에 걸려들었다. 유난히 우애가 깊었던 그녀의 친척들도 그 장례식에 조문을 오는 바람에 단체로 메르스에 걸려 목숨을 읽거나 큰 봉변을 당했다. 세 사람 모두 같은 시간대에 같은 장소에 머물렀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었다. 그런데 왜 하필 이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첫 번째는 운이 없어서다. 전염병은 사람을 가리지 않으니까. 그리고 두 번째는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거나 작동되지 않아서다. 사실 우리는 두 번째에 더 분노해야 한다. 평소엔 놀다가도 위기가 오면 우리를 보호하라고 나라에 세금도 내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는 거니까. 그런데 어이없게도 사람들은 두 번째보다 첫 번째에 더 쉽게 기댄다. 그래, 운이 안 좋았던 거지. 다행히 나나 우리 가족은 괜찮았지만. 안타까워... 사람이 운에 인생을 맡기고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인데. 적어도 문명화나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회에서는. 그런데 정부나 관계 당국에선 메르스를 어떻게 대처했던가. 초동 대처도 늦었고 제대로 된 콘트롤타워도 없었다. 감염된 사람은 이름 대신 번호로 호칭되었고 사람이라기보다는 '병균덩어리'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감염자가 다른 사람에게 병을 전염시킨다는 것 때문에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인식이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환자들은 이미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로부터 감염되니까 언뜻 들으면 옳은 소리처럼 들리지만 이건 정말 비인간적인 의견이다. 이런 생각들이 많은 메르스 환자들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만든 것이다. 

정부나 기관이 피해자를 돕기는커녕 오히려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는 이 기가 막힌 상황에 대해 이첫꽃송이는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말은 잘못된 인식이며 '몇 명을 감염시켰든 메르스 환자는 모두 피해자'라고 울부짖는다. 바로 그런 잘못된 인식 때문에 김석주는 격리변동에서 림프종 환자가 아니라 마지막 남은 메르스 발병자로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전염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보호장구로 중무장을 하고 집으로 찾아온 병원 직원을 보고 누구냐 묻는 다섯 살 우람이의 질문에 "아빠 친구 중에 안드로메다 우주인이 있는데..."라고 거짓말을 하는 남영아의 모습은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살아야겠다'라는 김석주의 간절한 희망과 '살려내겠다'라는 남영아의 처절한 저항이 우주복보다 더 두텁고 단단한 이 사회의 무관심과 두려움에 의해 사그러지고 마는 장면이다. 그래서 이 책의 표지에 우주복을 입은 사람이 등장하게 된 것이라고 북스피어 김홍민 대표는 말한다. 

김탁환은 이 소설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몇 번이나 포기할 뻔 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큰 시각이 존재하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정부는 정부대로 우왕좌왕, 뒤늦게 형식적인 백서나 내놓을 게 뻔했고 감염자나 그가족들도 매우 개별적이고 비전문가적인 입장에서 이 재난의 사회적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다행히 의사이자 피해자였던 김석주와 간호사 출신의 보호자 남영아 부부가 나타나 그들의 기록과 일기를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함으로써 소설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던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여러 번 눈물을 흘렸다. 소설을 잘 써서라기보다는 소설 속에 나열된 팩트들이 너무 답답하고 슬프고 화가 나서 나오는 눈물이었다(라고 하긴 하지만 이건 결국 소설가가 소설을 잘 써서,라는 도돌이표가 된다). 김석주는 억울하게 죽었고 길동화는 잘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 반쪽난 폐를 움켜쥔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다. 이첫꽃송이 같은 경우에만 겨우 정상적인 기자 생활을 하고 있다. 메르스 환자였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이차 피해를 두려워하며 신분을 숨긴채 살아가고 있는데 국가는 아직까지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고 있다. 작가는 책 뒷쪽에 실린 '감사의 글'에서 메르스 관련 재판이 아직도 진행중이라고 썼다. 그 재판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이것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가 메르스에 걸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그 배에 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안주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한 앞으로도 달라지는 건 없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해결책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메르스에 대한 소설을 넘어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묻는 질의서나 다름없다. 사람들로 하여금 메르스가 내 문제이기도 했음을 인식하게 하고 뭔가 변화를 원하게 만드는 것, '나는 메르스에 걸리지 않았으니까'라는 허망한 안심이 얼마나 부질 없는것인지를 일깨우는 것, 그걸 소설만큼 잘 할 수 있는 장르가 또 있을까? 그제 전철 안에서 이 소설을 다 읽고 눈물을 삼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 탄 사람들 모두 메르스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냥 한 때 있었던 전염병이고 이미 다 끝난 거라고만 생각하겠지. 나도 [살아야겠다]를 읽기 전엔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필요한 거다. 김탁환 작가는 그래서 고마운 사람이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김탁환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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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에 있는 연희문학창작촌은 참 좋은 곳이더군요. 우리나라 현역 작가들이 들어와서 일정 기간 작품을 쓰고 가는 일종의 레지던스였는데, 우선 조용한 동네에 자리 잡고 있는 벽돌 건물이라 고전적인 느낌이 났고 녹음이 우거진 건물들 사이로 난 산책로는 걷는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곳이었습니다. 2018년 10월 13일 토요일 오후, 연희문학창작촌 안에 있는 <책다방 연희>라는 곳에서 '독하다 토요일'의 일곱 번째 모임이 있었습니다. 지난 여섯 번은 한 달에 한 번씩 회원들끼리 대학로 카페 겸 서점인 '책책'에 모여서 한국 소설들을 읽었는데요(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 -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 - 한강의 [흰] - 김언수의 [뜨거운 피] -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 -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이번엔 번외편이자 오픈 모임으로 김탁환 선생을 모시고 그의 소설 [이토록 고고한 연예]를 읽기로 했던 것입니다. 

저와 윤혜자 씨가 페이스북을 통해 공지를 했고 소설가 김탁환 선생도 따로 공지를 해서 많은 분들이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2시부터 모여서 한 시간 동안 묵독을 하고 3시부터 행사를 시작하기로 했었지만 장소가 바뀌어서 그런지 많은 분들이 지각을 했습니다. 김하늬 씨 같은 경우는 뒷문 쪽으로 오는 바람에 책다방 연희로 들어오질 못해서 고생을 했구요. 2시 40분 경에 김탁환 선생이 와서 같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조금 더 사람들을 기다리다가 3시 10분경에 제가 인사를 하며 행사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독하다 토요일'은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한 시간 정도 미리 정해진 책을 각자 가져와 묵독하고 그 이후에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인데 모임의 모토가 '너무 열심히 하지 말자'라는 얘기를 인사말 삼아 했습니다. 우리가 문학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뭔가 이루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너무 심각한 토론을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 저의 처음 생각이었고 아직은 그런 생각이 모임에서 통용되는 것 같아서 좋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모임이 끝나면 얼른 같이 술을 마시러 술집으로 몰려간다고 했더니 다들 웃으셨습니다.  

'우리는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김탁환 선생이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이토록 고고한 연예]에서 감명 깊었던 구절을 낭독해보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정아름 씨가 나와서 87페이지 부근에 있는 달문이 인삼 장사하는 대목을 읽었고 572페이지 부분도 좀 긴 내용이지만 읽었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제가 203페이지쯤 달문이 선배 재인들을 만나 산대놀이로 번 돈을 몽땅 나눠주고 나서 모독과 나누는 대화를 읽었습니다. 

김탁환 선생은 자신이 쓴 문장을 남이 읽는 걸 들을 때마다 묘한 감정이 든다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독자는 인상 깊은 부분이라며 낭독을 하는데 막상 작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힘을 주었던 대목을 찾아 읽어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죠. 작가와 독자의 입장이 그만큼 다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얘기는 다른 데서는 해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김탁환 선생에겐 [이토록 고고한 연예]라는 작품이 어떤 분기점이 된 것 같습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작품임을 넘어서 이제 '달문의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까지 가지게 되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앞으로 10년 정도는 계속 달문의 마음으로 '사회파 소설'을 계속 써내려갈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달문이 예술에 임하던 자세로, 달문이 사람들을 만나던 자세로, 그리고 나아가 달문이 인생을 살아가던 그 눈부신 자태로. 

그러기 위해서 일단 소설가로 살아가는 것 이외에 모든 것을 정리했다고 합니다. 작업실도 너무 커서 크기를 줄이고, 영화쪽 만나던 사람들도 대폭 정리했고(선생의 작품이 영화화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칼럼이나 에세이도 안 쓰는 걸 원칙으로 정했다고 했습니다. 강연도 도서관 강연 말고는 안 하기로 하고요. 쉽게 말하면 돈이 되는 건 거의 다 안 하기로 한 것인데 ‘이게 다 달문 때문’이라며 웃었습니다. 가히 마루야마 겐지가 산속으로 들어갈 때 세웠던 결기만큼 김탁환의 마음가짐도 (온화한 성품과는 달리) 매우 분연했습니다. 

오는 10월 22일에 나오는 새 소설 [살아야겠다] 얘기를 했습니다. 메르스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토록 고고한 연예]보다 20페이지 정도 더 두꺼운 책이라 했습니다. 추천사를 써준 심리 기획자 이명수 선생이 '해머 같은 소설'이라고 했다지요. 우선 두께 때문에 그랬겠지만 아마도 프란츠 카프카가 얘기한 그 '망치'까지 중의법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36살의 주인공은 실존인물이었는데 마침 오늘이 그의 생일이라고 했습니다. 김탁환 선생은 학생들을 지도할 때도 언제나 주인공의 나이와 생일 등을 꼭 물어본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인적사항들이 촘촘히 정해져야 비로소 소설의 등장인물은 유일무이한 존재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걸 부여받은 캐릭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볼륨 자체부터 다르니까요. 예전에 허 샤오시엔 감독이 줄리엣 비노쉬와 <빨간 풍선>이라는 영화를 찍을 때 카메라 프레임 안으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줄리엣 비노쉬의 남편 직업이 교수라는 것과 예전에 부부 사이에 있었던 자잘한 에피소드들까지 설명해주더라는 애기를 듣고 감탄했었는데, 또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역시 뛰어난 작가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나오기 이전부터 김탁환 선생은 ‘인간은 이야기하는 동물이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했습니다. 세상엔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이야기 앞에서 무력해지지 않겠다는 태도가 소설을 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이야기 앞에서 무력해지는 경우는 예를 들면 ‘영화를 보는 순간’이라 했습니다. 독서와는 달리 관객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이 영화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대로만 받아들여야 하니까).
그런데 단편 소설을 읽고 내 인생을 바꾸었다, 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인생을 바꾸는 건 언제나 장편소설이라는 거죠. 왜 그럴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많은 곳을 가기도 하구요. 그런데 그 무엇 하나 나의 의도대로 되는 건 없습니다. 태어나보니 이미 내 부모가 있는 것이고 우연히 만난 사람과 하라고 하니까 그냥 결혼을 하기도 합니다. 활동하는 시대도 내가 정할 수 없죠. 그런데 소설가는 그런 걸 다 의지대로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장편소설에서는. 그래서 장편소설을 쓴다는 것은 주어진 대로 살지 않고 작가가 원하는 세상을 의지대로 그려나가는 행위라고 뜻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작가는 언제나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고 했습니다. [전쟁과 평화]도 [죄와 벌]도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물을 만듭니다. 김탁환은 왜 정도전을 골랐을까. 왜 하필 달문이었을까. 이유는 그 인물에 그의 질문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어오라고 시켰더니 다 읽은 학생들이 ‘이 소설에 어떤 정보가 들어 있어서 읽으라고 한 건지 잘 모르겠다’라는 반응을 보여 충격 먹은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 질문을 한다는 건 학교 다니는 내내 모든 책은 시험에 나오는(또는 세상살이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읽는 것이지 이야기가 만들어낸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걸 배운 적이 없다는 뜻이었으니까요. 아무 감정을 싣지 않고 그냥 이야기만 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김탁환 선생은 그게 가장 안 좋은 태도라고 했습니다. 논리적이기만 하면 내용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착각이라는 거죠. 인간은 감정이 전달되어야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허구인 소설을 읽어야 하는 것이구요. 

김탁환 선생은 소설은 적어도 세 번은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그냥 읽고, 두 번째에는 작가의 입장에 서서 왜 하필 그 인물이고 그 시대였을까를 생각하면서 읽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읽으면서 확 끌리거나 유난히 싫은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며 읽어보라 했습니다. 그런 게 눈에 띄는 이유는 작가가 그걸 쓰기 전에 ‘천 번 정도’는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소설은 태생부터 굉장히 ‘의도적’인데 그런 건 장편소설 말고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모여 장편 소설을 읽는 일은 매우 소중한 것이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무엇인가를 함께 느껴보자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작가 김탁환이세 번씩 읽고 싶어질 정도로 짱짱하게 쓰는 외국 작가가 있으면 몇 명만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존 스타인백과 필립 로스, 그리고 가즈오 이시구로와 오르한 파묵을 들었습니다. [분노의 포도], [빨강머리의 여인], [순수 박물관] 등등의 작품을 거론하면서 말이죠. 

“베스트셀러 작가로 살지 않겠습니다. 진지한 독자 만 명과 살겠습니다. 달문처럼.” 

이제 달문처럼 살겠다고 한 김탁환 작가는 대학 때 우리나라에 18세기부터 있었던 대하소설들을 읽고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유씨삼대록]이나 [곽장양문록] 같은 소설을 읽은 거죠. 그것도 몇 번씩이나.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역사소설을 쓰게 되었고 역사 공부를 더 하게 되었으며 또 그러다 보니 이제는 자기만 쓸 수 있는 게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밖에 못 쓰는 글을 쓰자, 인간의 본질을 틀어쥐고 장편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자, 라고 결심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결론처럼 했을 땐 장내가 잠시 숙연해졌습니다. 

그러나 숙연함도 잠시. 강의가 끝나고 몰려간 백암순대국에서는 순대와 수육에 많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갔고 2차로 간 치킨집에서는 각자 치맥을 아낌없이 들이부었습니다. 그 날 처음 뵙는 분들도 많았는데 모두 금방 친해져서 너 나 할 것 없이 웃음꽃을 피웠고 평소엔 뒷풀이에서 맥주만 간단히 마시다가 먼저 사라지곤 하던 김탁환 선생도 그날은 아주 작정을 하고 나왔는지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결국은 거의 모든 멤버가 3차인 중화요리 전문점 ‘문차이나’까지 가서 백주를 벌컥벌컥 마시며 밤을 불살랐습니다. 

모두 취해서 다행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거실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가지와 핸드폰 속 사진들을 보니 대단했더군요. 그런데 기분이 매우 상쾌했습니다. 소설을 통해 만나서 그런지 모두 같은 마음처럼 느껴졌구요. ‘독하다 토요일’의 번외편 모임은 이렇게 끝을 맺고 다음 달엔 ‘독하다 토요일 2기’ 모임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선 앞으로 회원들이 함께 읽을 책들을 정해야 하는데, 이번엔 회원 여러분들의 추천을 받아 리스트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한국의 소설에 국한해서 읽어볼까 합니다. 어떤 책들이 좋을까요? 혹시 좋은 책 알고 계시면 추천 좀 해주세요. 꼭 새 책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우리가 아직 안 읽은 책은 다 새 책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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