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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일기 32

음주일기 2012. 2. 28. 23:59


 

'존나, 니체적이지 않습니까?’

 

서울을 떠나 경기도 광주 ‘초월읍’이란 동네로 이사가면서 정욱씨가 내게 남긴 황당한 멘트다. 광고를 시작하기 전 모 카피학원에서 만나 허접스럽게 안면을 튼 우리는 그 후 한 놈은 대행사로 한 놈은 영화사로 가서 카피 쓰고 먹고 사느라 일년에 한두 번 겨우 생사만 확인하고 살던 처지였다.

내가 정욱씨를 다시 만난 것은 어느 해 일월 마포에서 시무식을 마치고 뛰어들어간 회사 화장실에서였다. 변기에 앉아 무심코 일간스포츠에 실린 신춘문예 감성소설부문 당선작을 읽던 나는 ‘흠, 제법 깜찍하네…’라고 중얼거리다가 남정욱이란 낯익은 이름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 것이다. ‘별일이야. 이 인간이 신춘문예를 다 하고.’ 하며 축하전화를 건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지나갔다.

 

정욱씨가 난데없이 크리스마스 파티를 제안해 왔다. 하지만 난 성탄절 연휴를 맞아 양평에서 하룻밤 사이에 두 번의 술자리(저녁에 바베큐 파티에 취해 들어가 자다가 새벽에 깨서 또 아침까지 마심)를 가졌었기에 도저히 다음날 대낮부터 술판을 벌일 컨디션이 아니었다. ‘파티라는 단어는 도무지 우리와 안 어울리는 거 아니냐’는 나의 의견을 무시한 채 그는 무조건 초월읍으로 열두 시까지 오라고 통보를 한다.

정말 환장한다. 나이 마흔이 되어 새삼 크리스찬으로 변신했다는 사실만 해도 충격적인데 급기야 크리스마스 파티라니.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이사도 가고 교회도 나가게 됐다는 사정을 듣긴 했지만 그렇게 일요일마다 교회를 열심히 나갈 줄은 몰랐다.

교회 ‘청년부’ 생활을 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지 않느냐는 나의 빈정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착실히 예수쟁이의 길을 걷던 그 인간, 이젠 대낮부터 크리스마스를 빙자한 술 파티를 하자는 것이었다.

 

멤버는 정욱씨와 그의 여자친구 수화씨, 경돈과 지연 커플, 그리고 내가 전부였다. 문정동으로 나를 픽업하러 온 경돈?지연 커플과 함께 광주에 있는 정욱씨의 아파트로 갔다. 48평형의 넓은 아파트였는데 거실에 가구나 커튼이 전혀 없어서 아파트라기보다는 마치 콘도에 놀러 온 기분이 든다는 게 특이한 점이었다.

내가 마주앙 한 병을 사들고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정욱씨와 수화씨는 놀랍게도 연어요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씽크대에서 등을 보이고 열심히 요리를 준비하고 있는 두 사람은 흡사 신혼부부 같다.

 

연어와 야채 등등 고급스러운 안주를 상에 놓고 앉은 우리는 와인을 마실까 소주를 마실까 고민하다가 결국 소주를 마시기로 한다. 한잔 두잔 마시며 수화씨와 경돈 커플 그리고 내가 새삼 인사를 나눈다.

 

교회 분의 소개로 정욱씨와 만났다는 수화씨는 고등학교 선생님이라고 하는데 특이하게도 기술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떻게 여자분이 기술선생님 될 생각을 다 했냐는 경돈의 질문에 ‘기술교육과를 다녀서 그렇다’라는 당연한 대답이 돌아온다. 생전 결혼을 할 거 같지 않던 정욱씨가 ‘처음으로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생겼다’고 하더니 선생님과 맺어질 줄은 정말 몰랐다.

 

경돈과 지연은 오년이나 동거를 하고 있는 커플이다. 내년에 드디어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란다. 말하자면 한쪽은 ‘동고동락’을 다짐한 커플이고 또 한쪽은 ‘동거동락’을 하고 있는 커플이다. 할 말이 별로 없는 나는 그저 술을 마실 뿐이다.

 

정욱씨와 내가 옛날 얘기를 조금씩 한다. 정욱씨는 작가가 된 뒤 <약속, 거짓말 그리고 또 거짓말>이라는 소설을 냈으나 잘 팔리지 않았고 일간스포츠에 <블루 수퍼마켓>이라는 영상소설을 연재하다 야하고 폭력적이라는 욕만 잔뜩 먹은 뒤 <천사는 가끔 지상에서 죽는다>라는 제목으로 출간을 했으나 역시 화제가 되지 못했던 이력이 있다.

영화사에서 기획실장으로 일을 오래 했기 때문에 지금도 가끔 영화 컬럼을 스포츠신문에 연재하기도 한다. 내가 보기엔 글을 참 잘 쓰는 인간인데 도무지 잘 풀리지 않는 게 문제다. 성격 탓인가. 같이 놀던 박민규나 김탁환 등등이 지금 상종가를 치고 있는 걸 생각하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니 정욱씨가 일렉기타를 꺼낸다. 이 친구는 기타를 좋아해 친구들과 아마추어 밴드까지 결성했는데 막상 활동은 거의 안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기타 연주를 배경음악 삼아 다들 흐뭇하게 술을 마신다. 거듭 사양하는 나에게 기타를 안겨 할 수 없이 나도 김광석의 노래를 한 곡 부른다. 다 부르고 나니 후회가 된다. 술이나 계속 마실 걸.

 

잠시 지루해진 틈을 메우려 자리를 방으로 옮긴 뒤 비틀즈의 옛 영화 <Let It Be>를 틀기로 한다. 정욱씨와 경돈은 인터넷 음악동호회에서 만난 사이라 모이기만 하면 음악 얘기가 끊이지 않는다. 더구나 경돈은 몇 년 전에 음악까페를 하다 말아먹은 경력까지 있다.

나도 어렸을 적 AFKN에서 가슴을 두근거리며 봤던 그 영화를 이십여년 만에 다시 마주하니 참으로 감회가 새롭다. 폴과 존, 조지, 링고가 연습실에서 즉흥연주를 하는 장면들이 마냥 부럽고 신기하다. 천재들이 놀멘 놀멘 작업을 하는 동안 옆에서 담배를 꼬나 물고 있는 오노 요코의 모습도 보인다.

 

드디어 애플레코드사 옥상에서의 전설적인 공연이 시작된다. 우리들은 <Get Back>의 전주가 흘러나오자 ‘JoJo was a man who though…’로 시작되는 첫 소절을 신이 나서 따라 부르고 수화씨는 ‘뭐 이런 놈들이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한쪽에서 걱정스럽게 쳐다본다.

비틀즈의 노래는 폴과 존이 거의 다 만들었지만 <Something>이나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같이 귀에 착착 감기는 노래들은 의외로 조지의 곡이다. 내가 그 얘기를 했더니 정욱씨는 폴이나 존처럼 엄청난 천재들이 웬만한 곡은 끼워주려고 하지도 않았을 테니 조지도 이를 악물고 곡을 쓸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한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다. 노력파 조지를 위해 또 한잔.

 

영화가 끝나고 나자 지연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목걸이 페넌트를 꺼낸다. 스왈롭스키 제품인데 정욱씨와 수화씨에겐 커플 세트로 큰 것, 작은 것을 하나씩 주고 내겐 큰 것 하나를 준다. 지연은 경돈과 함께 홍대앞에서 액세서리 장사를 한 경험이 있다. 경돈도 자기가 만든 음악 CD를 우리에게 한 장씩 선물한다. 즐겨 듣던 음악을 모아 만든 귀한 음반이다.

 

술과 음식이 있고 음악과 영화가 있고 선물도 있다. 이건 정말 기대치 못했던 멋진 크리스마스 파티다. 어느덧 술이 좀 되었고 지연은 마루에서 담요를 덥고 자고 있다. 대낮부터 마셔서 그런지 꽤 취했는데도 시간은 일곱 시를 조금 넘겼을 뿐이다.

 

잘 먹고 잘 마셨어요. 또 놀러 올게요. 자고 가라는 정욱씨의 성화를 뒤로 한 채 버스를 타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좋은 사람들을 둔 덕분에 올 크리스마스도 따뜻하게 지냈다. 그래서 사람에겐 친구가 필요한 모양이다.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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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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