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정말 폭염의 절정이었죠. 이렇게 더운 여름날 오전 압구정역까지 갔다가(우리 부부는 전철을 거꾸로 타고 무려 다섯 정거장이나 갔다가 다시 불광동 방향으로 가는 멍청한 짓을 저질렀거든요) 불광동으로 종로3가로 광장시장으로 종횡무진 돌아다니다 보니 몇 년 전 겪었던 ‘한여름 화장실 사건’이 문득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날도 오늘처럼 햇볕이 엄청 뜨겁고 습한 날씨였는데, 저는 어찌된 일인지 대낮에 혼자 구 안세병원사거리 근처를 터벅터벅 걷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랫배에 가스가 차더니 장이 꼬이면서 특정부위가 매우 아파오는 것이었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놈들한테 흔하게 일어나는 생리현상이죠. 문제는 그럴 경우 제가 몇 분을 견디지 못하고 아무데서나 일을 저지를 소지가 충분한 놈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위기에 빠진 저는 미친듯이 화장실을 찾아 근처 건물 사이를 달렸습니다. 


다행히 더큰집설렁탕과 SK주유소 사이 지하 이발소 건물에 화장실 문이 열려 있더군요. 저는 크게 기뻐하며 한달음에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변기 위엔 앉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하하. 절박함과 안도감이 뒤섞이며 저도 모르게 웃음과 눈물이 한꺼번에 나왔습니다. ‘열린 화장실’은 정말 누군가에게 천사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일단 급한 일을 해결하고 일차 물을 내리고 나니(저는 늘 중간에 물을 한 번 내립니다) 비로소 찌는듯한 무더위가 느껴지더군요. 화장실 안은 너무나 무더웠습니다. 


저는 꾀를 내어 변기에 앉은채로 티셔츠를 벗었습니다. 정말 더울 때는 웃도리만 벗고 있어도 몸의 열이 많이 날아가거든요. 그런데 좁은 화장실 안에서 벗은 티셔츠를 두 팔에 걸친 상태로 괄약근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저에게 곧 불행한 일이 생겼습니다. 갑자기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어떤 여자분이 저를 바라보며 마구 비명을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아아아~!!


저도 소리를 질렀습니다. 갑자기 믿었던 화장실 문이 열린 것만도 황당한데 모르는 여자가 변태 쳐다보듯 제 벗은 몸을 보고 있었으니까요. 생각해보면 한 2초 정도밖엔 안 되는 순간이었겠지만 그 어떤 기간보다도 밀도가 높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게 어찌된 일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죠.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 모든 의문이 풀렸습니다. 그 화장실은 여자화장실이었고 제가 들어간 곳은 마침 문고리가 고장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너무나 급한 나머지 그런 사항들을 챙길 틈이 없었던 거구요.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여자화장실 문을 열었더니 어떤 변태 같은 놈이 웃통을 벗고 바지도 벗은채 변기 위에 앉아 씩씩거리고 있으니 그 여자분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저는 그 화장실에 더 있다가는 졸지에 변태로 몰려 몽둥이찜질을 당할까봐 겁이나 미친듯이 건물을 빠져나와 달렸습니다. 그날 화장실에서 저 때문에 놀라 쓰러졌던 그 여자분, 뒤늦게라도 이렇게 사과 드릴게요. 그땐 전도 너무 경황이 없었어서 그랬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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