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의 영화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은 장만옥에게 아무 것도 묻지 말고 그냥 일 분만 같이 시계 초침을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일 분이 흐르자 그윽한 눈빛을 하고는 이렇게 여자의 마음을 흔드는 멘트를 날린다.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 우리는 일 분 동안 함께 했어. 난 잊지 않을 거야. 우리 둘만의 소중한 일 분을."
생각해보면 아비는 요즘 우리가 얘기하는 '나쁜 남자'의 전형이었다. 참 유치하지만 난 이 대사가 너무나 절묘해서 오래 전부터 날짜에서 시간까지 죄다 외우고 있었다.
갑자기 비가 후두득 떨어져 안으로 들어온 토요일 오후의 성북동 소행성. 신디 로퍼의 ‘At last’앨범을 틀어놓고 각자 책을 읽던 아내와 나는 빗소리에 마음이 움직였다. 창 밖을 바라보던 아내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와, 좋은데.”
그래서 나는 우리 둘만의 일 분을 남겨보기로 했다. 컴컴한 하늘에선 사나운 비가 내리고 오디오에선 신디 로퍼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내는 [음식의 언어]라는 책을, 나는 [오래된 생각]이라는 소설을 읽고 있다. 그녀는 내가 이런 동영상을 찍은 걸 아직 모른다. 방금 또 천둥이 쳤다. 뭔가 깊은 산장에 둘만 갇혀 있는 느낌이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