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나는 TV를 보는 스타일과 시간대가 다르다. 아내는 아무 때나 TV를 켜도 처음 보는 드라마나 쇼의 내용을 금방 파악하고 적응하는 편이라면 나는 무슨 프로그램이든 처음부터 보지 않으면 잘 이해를 못하거나 흥미를 잘 느끼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불시에 TV를 켜고도 프로그램에 금방 빠져드는 아내가 신기했다. 결혼 전에 성수동에서 동거를 시작할 때는 거실 TV를 없애고 안방에서만 보았기 때문에 TV 시청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방안에서 아내가 TV를 보더라도 나는 밖에서 책을 읽거나 일을 하는 등 다른 짓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성북동으로 이사를 오면서 집 크기가 작아지자 집안에서 TV를 틀면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이 함께 봐야 했다.
아내는 TV를 그리 좋아하는 편도 아니다. 다만 예전에 혼자 살 때 저녁에 집에 들어오면 너무 쓸쓸해서 들어오자마자 그냥 TV를 켜놓는 게 버릇이 되었다고 했다. 이른바 '백색소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문제는 내가 그런 성향이 못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심코 틀어놓은 TV에도 신경이 쓰여 다른 일을 하거나 잠을 자지 못했다. 하루는 늦게까지 일을 하다 들어왔는데 아내가 TV를 켜놓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다음날 일찍 일어나 회사에 나가야 해서 먼저 자겠다고 했고 아내는 TV를 좀 더 봐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러라고 대답했다.
문제는 TV 내용이었다. 12시가 넘어 케이블TV에서 틀어주는 무슨 단막극 재방송이었는데 거기 출연한 남자 연기자 새끼가 처음부터 끝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나는 방문이 없는 침실에 누워 어쩔 수 없이 그 드라마 내용을 고스란히 다 들어야 했다. 소개팅을 하러 나온 남녀가 카페에서 처음 인사를 나누는 상황이었다.
남) 안녕하세요~~!! (엄청 소리를 지르며)
여) 네, 안녕하세요.(다소곳하게)
남) 반갑습니다~!!!
여)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르세요?
남) 제가 방송국 조연출인데요~~!
여) 그런데요?
남) 오늘 녹화장에서 실수로 폭발이 일어났어요!
여) ....
남) 그때 고막을 다쳤는지, 소리가 잘 안 들려서요!!!
여) 어머...그러세요?!!
이젠 여자까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미칠 노릇이었다. 드라마 내용 전개 상 소리를 지르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게 이 드라마의 웃음 포인트였으니까. 나는 한참을 참다가, 어이 없어 하다가, 헛웃음을 짓다가, 화를 내다가 결국 아내에게 어렵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여보, TV 좀 끄면 안 될까? 저 새끼 너무 소리를 지르네." 그러자 거실에서 뭔가 다른 것을 하던 아내가 고개를 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 끌게."
알고보니 아내는 이미 그 드라마를 보지 않고 있었던 것이았다. 괜히 나만 혼자서 바보처럼 끙끙 앓았다. 입만 열면 커뮤케이션을 외치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나지만 막상 이런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서로 솔직하게 말한는 게 중요하다. 아무리 부부 사이라도 사랑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다소 뻔한 교훈을 얻은 사건이었다. 나는 그날 밤 아내가 흔쾌히 TV를 꺼주는 바람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고 다음날부터 열심히 일을 해서 지금처럼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음, 이건 아니구나. 비약이 너무 심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