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분노]라는 소설을 두 번 샀다. 두 번 읽은 게 아니라 두번 구입. 출퇴근길에 전철 안에서 짬짬이 읽다가 100페이지쯤 읽었을 때 어디선가 잃어버렸는데 책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책값이 16,500원이니까 나는 결국 33,000원짜리 이야기를 읽은 셈이다. 그래서 어땠냐구? 다시 사서 읽길 잘 한 것 같다. 아마도 올해가 다 가도록 나에겐 이보다 더 ‘올해의 책’은 없을 것 같으니까.
로런 그로프는 무시무시한 작가다. 안 그렇게 생겼는데 글은 독하고 능숙하고 교활하다. 섹스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마음에 딱 든다. 그리고 필력이 엄청나다. 글을 잘 쓴다는 건 시나리오 작가처럼 사건을 잘 짠다는 것과는 좀 다른 얘기다. 사건보다 중요한 건 그 모티브를 어떤 태도와 문체로 다루느냐인데, 뛰어난 작가일수록 가장 고귀해질 수도 가장 저속해질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가 그랬던 것처럼. 로런 그로프가 그렇다.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이 책엔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그리스 비극 얘기도 여기저기 끊임없이 인용된다. 남자 주인공 로토가 셰익스피어 연극을 주로 하는 배우였고 나중엔 잘 나가는 희곡작가가 되기 때문이다. 스물두 살에 결혼하는 그의 아내 마틸드를 만난 것도 그가 햄릿 역을 했던 날의 일이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호의와 사랑을 받았고 원하기만 하면 모든 여자와 잘 수 있었던 로토는 아무와도 말을 섞지 않던 신비한 여신 같은 마틸드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 청혼하고 순식간에 결혼을 한다. 소위 ‘킹카’들의 갑작스러운 결합에 어이 없어하던 친구들은(여자라면 대부분 로토와 섹스를 했던-쓰리섬을 했던 여자들도 있다)신혼파티에 와서 그들의 결혼이 곧 깨질 것을 예상하며 "뭐, 첫 번째 결혼이니까”라고 배배꼬인 속내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런 바람과는 달리 두 사람은 로토가 죽기까지 무려 23년간 다른 사람을 넘보는 일 없이 결혼생활을 영위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일찍 결혼한 남녀가 헤어지지도 않고 이십 년 넘게 함께 사는 얘기가 어떻게 흥미로운 소설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로런 그로프라는 작가의 힘이 빛난다. 이 소설은 로토와 마틸드의 격하고 찬란한 사랑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그 뒤엔 콜리와 에이리얼이 라는 음습한 인물들이 숨어 있는 교활하고 잔인한 드라마다. 이 책이 심리소설이었다면 왜 제목이 ‘운명과 분노’인지, 에이리얼과 마틜드의 비밀 거래는 두 사람의 결혼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원인과 결과가 딱딱 들어맞는 이야기를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이 책이 추리소설이었다면 마틸드가 왜 스물여섯 살에 낙태를 하고 스물여덟 살엔 불임수술을 하는 배신을 저질렀는지 밝혀내려 애쓸 것이다. 아니, 그보다 어렸을 때 정말 마틸드가 남동생을 계단에서 밀어 죽음에 이르게 한 게 사실인지부터 밝혀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문학책이다. 그것도 강력한 서사를 지닌 입체적인 문학 작품. 마침 이 책을 쓸 때 작가가 셰익스피어와 그리스 비극을 탐닉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현대적인 결혼생활을 소재로 삼았음에도 신화적인 구성과 고전적인 비극미를 함께 갖추게 되었다.
백만장자의 아들로 태어나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어머니에게서 단 한 푼의 돈도 물려받지 못했지만 매력적인 외모와 비상한 두뇌를 소유했던 한 사내와 어릴 적 불운했던 과거를 분노라는 동력으로 맞서려 했던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이 연상되는, 마치 세상 일을 모두 알고있는 듯한 로런 그로프의 우아하고 오만한 문체와 폭발적인 서사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인생사와 인간의 단면을 활자의 힘만으로 능숙하고 위엄있게 그려낸다.
그동안 누가 흥미진진하면서도 문학성까지 갖춘 소설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가네시로 가즈키의 [영화처럼],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 또는 [인생], 조너선 샤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조지수의 [나스타샤]등을 추천했는데 이제 한 권을 더 추천해야겠다. 바로 로런 그로프의 [운명과 분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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