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를 읽고 그 새로운 스타일에 가슴 설레던 스무 살 청춘이 2017년에도 여전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지금이 1990년대라면 도시적 감수성을 흡수하고 싶어서, 라고 간단히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썼던 하루키도 소설을 써온지 40년이 되어간다. 언제까지나 청춘의 아이콘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변함없는 인기는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양 사나이나 [1Q84]에 나오는 두 개의 달처럼 온갖 이상한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 '하루키 월드'의 힘 때문일까. 꼭 그런 것 같지만도 않다. 그렇다면 지금도 여전히 신작이 나오기만 하면 출판사들끼리 선인세를 줘가며 하루키라는 작가를 확보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상실'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원초적 감성 때문 아닐까. 상실은 근대 이후 모든 지구인에게 통하는 보편적 정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처음 하루키 바람을 몰고 온 소설 [노르웨이의 숲]은'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출판사나 역자가 임의로 바꾼 것이겠지만 결과적으로 'Norwegian Wood'이라는 비틀즈의 노래 제목보다 훨신 무라카미 하루키를 잘 드러내는 키워드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문장을 대하는 그의 태도다. 그렇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일단 문장의 마술사다.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조용한 서재에 앉아 방금 떠오른 아이디어를 이리저리 공굴리며 어떻게 하면 깔끔한 문장으로 써낼 수 있을까 고민하고 다시 쓰고 정돈하는 작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루키는 특히 전문직을 묘사하는 데 능숙하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소설엔 자신만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전문가들이 자주 나온다. '프로페셔널'이라는 단어에 어떤 모럴을 추가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이번엔 화가다. 초상화를 그리는 데 남다른 실력과 통찰을 지닌 화가.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꼬이는 바람에 눈코뜰 새 없이 바쁘던 지난 며칠 간었지만, 그래도 회사와 집을 오가는 전철 안에서, 또 휴일 아침 등을 이용해 [기사단장 죽이기]를 다 읽었다. 이번 주인공은 화가인데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따로 있지만 결혼을 한 뒤부터는 생계를 위해 꿈을 접어두고 초상화를 '주문 제작'하는 서른다섯 살의 남자다(하루키의 소설에선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얘기는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일단 주인공들은 부자는 아니지만 하나 같이 마음만 먹으면 밥 벌어 먹고 살기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을 정도의 능력자들이다).

어느날 아내 유즈가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고 있음을 알리며 헤어지자는 일방적인 통보를 한다. 그 동안 얘기도 안 하고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한 건 무척 미안하게 생각한다면서. 여기서 하루키의 녹슬지 않은 문장이 빛난다.

그녀의 통보를 듣고 내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비가 얼마나 오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조용하고 잔잔한 바다였다. 그러면서도 몸에 은근하게 스며드는 냉기를 몰고 오는 비였다. 그 냉기는 봄이 아직 멀리 있음을 알려주었다. 빗줄기 너머 흐릿하게 오렌지색 도쿄타워가 보였다. 하늘에는 새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다들 어느 지붕 밑에서 얌전히 비를 피하고 있으니라.
"이유는 묻지 말아줄래?" 그녀가 말했다.

고향에 있는 애인에게서 헤어지자는 편지를 받고 연필을 몇 자루 깎은 뒤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가서 '여, 많이 밝아졌네?!'라는 소리를 들었던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 주인공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느닷없긴 하지만 하루키 소설에서 이미 익숙한 코드다. 누군가가 갑자기 사라지거나 죽거나 하는 상황. 그러면 주인공은 주변을 정리하고 먼 여행을 떠난다. 이번에도 주인공은 자신의 집을 나와서 '북쪽'으로 기약없는 여행을 떠난다. 이유는 그저 북쪽으로 가야할 것만 같은 느낌 때문이다. 그리고 돌아와 자신만의 아지트를 마련한다. 요양원에 가 있는 아마다 도모히코 - 대학 친구의 아버지이자 원로 화가 - 의 작업실 겸 별장이다.

마침 시내 문화센터에서 그림 지도 아르바이트를 맡아 그럭저럭 생활은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평소에 하고 싶었던 추상화 작업에 몰두하면 된다. 그러나 소설 주인공의 일상이 이리 평화롭게 흘러갈 리가 있나. 어느날 머리가 하얗게 센 멘시키라는 묘한 남자가 찾아와 거액의 작품료를 제안하며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한다. 거절하려던 주인공은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와 닮은 멘시키라는 남자에게 묘한 흥미를 느껴 그 일을 수락한다. 새로운 사건의 시작이다.

보통 모델을 세워놓고 그림을 그리는 일반 화가와 달리 그는 모델과 긴 면담을 하고 스냅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혼자서 작업을 한다. 책에는 그 과정과 이유가 놀랍도록 논리적으로 그려져 있다. [댄스 댄스 댄스]에서 주인공이 글 쓰는 것을 '눈 치우기'에 비유했듯이 하루키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마샬아츠 하는 걸 운전이나 레고 쌓기처럼 단계적으로 그려내는 걸 좋아한다. 또한 초상화 그리기의 디테일한 묘사는 하루키의 글쓰기 과정을 묘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특히 그가 '방울소리' 때문에 뒷뜰에서 이상한 구덩이를 발견한 후 그 것을 그리고 싶어하는 장면은 이 소설가가 어떤 이야기를 쓸까 결정하는 계기나 과정도 이렇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그럴 듯하다.

왜 갑자기 그런 그림을 그릴 생각이 들었는지 의미나 목적을 밝혀내기는 불기능했다. 다만 어느 순간, 어떻게든 이 <잡목림 속의 구덩이>를 그리고 싶어졌다.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무언가-어떤 풍경, 물체, 인물-가 지극히 순수하게, 매우 심플하게 마음을 사로잡고, 나는 붓을 들어 그것을 캔버스에 그려나간다. 이렇다 할 의마가 없을뿐더러 목적도 없다. 단순한 변덕 같은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다고 나는 생각했다. '단순한 변덕'이 아니다. 무언가가 내게 그림을 그리라고 요구했다. 매우 강렬하게, 그 요구가 나를 움직여 그림을 시작하게 하고, 내 등을 떠밀어 단기간에 작품을 완성시켰다. 어쩌면 그 구덩이 자체가 의지를 지니고 나를 움직여 제 모습을 그리게 했는지도 모른다-어떤 의도를 품고서, 마치 멘시키가 (아마도) 어떤 의도를 품고 내게 자기 초상을 그리게 한 것처럼.


소설에는 사건이 존재하지만 사건만큼이나 중요한 게 배경이요 맥락이다. 하루키는 이 배경과 맥락 구축에 매우 성실하다. 그의 소설이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데, 화가인 주인공의 직업을 상세하게 묘사하거나 아마다 도모히코의 빈 유학시절, 난징대학살 등을 다루는 건 다 '견고한 건축물' 같은 소설을 만들어 내고싶은 창작자로서의 욕망일 것이다. 다만 일본에서는 하루키가 난징대학살을 다룬 것 가지고 호들갑을 떨었다는데, 그렇다고 갑자기 그가 '현실참여작가'가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루키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장치 소설'이기도 하다. 독립적이고 쿨한 주인공의 이야기가 뻗어가는 길목마다 무수한 장치들이 숨어있는데, 이번에도 '이데아'나 '메타포' 같은 실제로는 말도 안 되는 개념들이 시침 뚝 따고 등장해서 중요한 화두들을 던진다. 그런데도 이 소설에 빨려들어가는 것은 하루키가 구축하는 세속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문화적 코드들 때문이다. 실제로 이 소설에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가 계속 턴테이블 위에서 돌아가고, 돈 지오반니나 일본화에 대한 얘기들이 끊임없이 언급된다. 심지어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에 대해 퀴즈를 내기도 한다. 시퀀스에만 몰두하는 게 아니라 이런 코드들을 이야기 전반에 잘 섞어내는 것이 그를 일류 작가로 만들었으리라. 물론 아직도 잔뜩 미스테리들을 벌려 놓고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라고 의뭉을 떨거나 상상만으로 헤어진 아내를 임신시켰다고 우기기도 하지만.

한편,열세 살 짜리 여자애가 주인공에게 자기 가슴이 작다고 하는 장면은 매우 하루키적이면서도 역설적으로 하루키가 나이 든 사람임을 보여준다. 먼저 '작은 가슴'에 대한 부분. 소녀는 자신의 가슴이 작다며 "남자들은 가슴 큰 여자들을 좋아하잖아요."라고 말한다. 자신의 가슴인데도 남자들부터 생각한다. 다분히 남성중심적이다. 한겨레 기자들이 모여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을 얘기하는 기사를 읽었는데, 하루키가 작은 가슴을 좋아한다고 거듭 밝히거나 성기 사이즈 얘기를 하는 것 등은 매우 자신이 없어보인다는 얘기가 나왔다. 뭐, 별로 그런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다. 다만 그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는 것 자체가 매우 하루키스럽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그러나 소설이 끝나갈 때까지 소녀의 가슴 얘기를 하는 건 좀 지겨웠다.

그래도 하루키는 하루키다.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은 '오직 나만을 위해 온전히 개인적인 시간을 쓴다'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리고 아직도 신선함을 읽지 않은 유머감각이 사랑스럽기도 하다. 멘시키가 오믈렛을 만드는 장면 묘사의 눈부심도 탁월하지만 그의 거실에 비싼 꽃병이나 귀한 골동품들이 여기저기 많이 놓여있는 걸 보고 주인공이 '큰 지진이 오지 않아야 할 텐데' 라고 생각하게 하는 그를 어찌 미워할 수 있겠는가.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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