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나는 5월에 만나 이 년 후 5월에 결혼식을 했고 또 내 생일도 5월에 있는데 이들이 나란히 이어져 있는 까닭에 해마다 오월이면 함께 여행을 한다. 어떤 때는 제주도를 가기도 하고 태국처럼 가까운 해외로 나가기도 했다. 작년엔  일본 교토와 오사카에 갔었고 이번엔 부산에서 일주일을 보내기로 했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어디 가서 무엇을 꼭 보거나 먹어야지 하는 뚜렷한 목적은 없다. 그저 서울이 아닌 곳에서 두 사람이 온전히 24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토요일 정오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KTX를 탄 우리들은 열차 안에서 더 이상 커피나 간식을 팔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바람에 부산까지 커피를 마시지 못하고(자판기가 있었으나 현금도 없었고 캔커피를 마시기는 싫었으므로) 괴로워하다가 겨우 도착한 부산역에서는 커피 대신 어묵을 한 꼬치씩 사 먹고 호텔로 향했다. 밖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미리 예약한 중앙동의 한 호텔에 올라가 짐을 풀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 투썸플레이스에서 커피를 한 잔씩 마셨다. 창밖으로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내는 여행지에서 비를 만나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시 21층 객실로 올라온 우리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뒤 각자 침대에 누워 가져온 책들 - 나는 이명수 선생이 전에 보내준 [내 마음이 지옥일 때]와 서울역에서 산 김진영의 [마당이 있는 집], 아내는 서울역에서 산 김훈의 [연필로 쓰기] - 게으르게 뒤적이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비가 와서 그런지 이따금씩 네온이 반짝이는 중앙동과 광복동 거리는 더 이국적으로 보였다. 우리는 이명세 감독의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등장해 더 유명해진 40계단에 올라 '이곳은 6.25 때 내려온 피난민들의 애환이 담긴 곳'이었다는 설명문을 읽고 정말 거기 쓰여있는 대로 영도다리가 보이는지 바다쪽을 쳐다보았다. 계단 위 왼쪽으로 쭉 이어지는 인쇄골목을 지나 국제시장에도 잠깐 들러보았다. 몇 년 전 여기에 있는 '개미집'에 와서 왕창 먹고 마셨던 추억을 소환했다. 사실은 예약해 놓은 식당으로 사는 길이었는데 아직 예약시간이 되지 않았기에 시간을 떼울 겸 거리를 천천히 배회한 것이었다. 

 

드디어 여섯 시가 되어  아내가 인스타그램에서 만나 전부터 눈여겨 봤다던 <유노우>라는 일식요리집으로 갔다. 처음엔 사장님 혼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기에 우리는 우리는 카운터 자리에 앉아서 음식이 준비되기를 기다렸다. 곧 아름다운 여직원도 나타났다. 이 분은 식당의 첫 스텝인데 5살 때 고열로 청력을 잃었다고 한다. 지금은 수술도 하고 보청기를 끼고 있어서 소통을 할 수 있지만 작은 소리는 잘 못 듣는다는 얘기를 인스타그램에서 읽었다. 사장님이 어렸을 때 친구나 동네 형 등 장애인들과의 좋은 추억이 있어서 얼굴도 보지 않고 청해서 이 분을 뽑았다는데 결과적으로 너무 예쁘고 손님들을 세심하게 살피는 성실한 직원이었다.

 

우리는 생선회 모듬과 키조개튀김 등을 시키고 술은 사케를 주전자에 담아달라고 했더니 정말 날렵한 주석주전자가 나왔다. 주석이 차가운 기운을 오래 지켜준다는 설명도 들었다. 일식집은 카운터에 앉으면 주방장이 생선을 요리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특전이 주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오이를 얇게 저며 우리를 놀라게 하던 사장님은 생선을 가져와 날렵하게 회를 치기도 하고 젖은 천에 감쌌던 오징어를 풀어 가볍게 칼집을 낸 뒤 썰어 접시 위에 담기도 했다. 꼬챙이에 생선을 샤샤샥 꿴 뒤 오른쪽 가스레인지로 달려가 굽기도 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 흡사 묘기대행진을 보는 것 같았다. 

 

세 테이블에 갈 모듬회를 함께 만들어 한 그릇씩 담아 냈는데 우리에게 온 건 분재처럼 작은 나무들 사이로 각종 회가 누워 있어서 마치 '숲을 지나 회를 먹으러 바다로 가는 느낌이 들었다. 회도 맛있고 술도 좋아서 아내와 나는 그 만족스러움에 거의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사장님인 유병찬 요리사가 나온 '츠지요리학교'(가게 앞 명판에 표시가 되어 있다)는 커리큘럼도 빡세고 되게 힘든 곳이라고 한다. 

 

키조개튀김튀김이 나왔는데 정말 바삭하고 맛이 좋았다.어느덧 사케 주전자 하나가 다 비워졌다 . 원래는 한 주전자 마시고 나면 소주로 바꾸기로 했는데(사케는 비싸니까) 아내가 사케 한 주전자만 더 마시면 안 되냐고 묻기에 망설이지 않고 사케 한 주전자를 더 시켰다. 오늘 같은 날 안 마시면 도대체 언제 이렇게 맛있는 안주에 사케를 마신다는 말인가. 죽순튀김과 표고새우튀김 등 다양한 음식이 서비스로 나왔고 마지막으로 대선소주를 한 병 시키니 마침 금태구이까지 나왔다.  우리는 금태 두 마리의 크기가 서울보다 30%는 더 큰 것 같다고 하며 엄지 두 개를 세워 보였다. 

 

 

"가게를 연 지 한 일 년 되셨죠?"라고 아내가 물으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장님은 원래 충청도가 고향인데 부인이 부산 사람이라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고 곧 둘째딸이 태어난다고 했다. 처음엔 좀 외진 곳이라 선배들이 여기 가게 여는 걸 말렸는데 마침 부산에서 유명한 블로거 한 분이 오셔서 가게를 포스팅해준 뒤부터는 전화를 받느라 일을 못할 정도로 손님이 몰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 얘기를 하면서 마침 오늘 그 블로거 커플이 오셨다고 하는데 가르키는 손을 보니 바로 우리 옆자리 커플 손님이었다. 그 블로거는 술과 음식이 너무 맛있는데 마침 자기가 임신 중이라 지금 술을 못 마신다고 아쉬워했다. 

 

배가 너무 불렀다. 남은 소주는 내가 마시고 사케는 아내가 해치우기로 했는데 결국은 소주와 안주를 아주 조금 남겼다. 부산 여행 첫 날의 첫 식사는 완벽했다. 모든 식재료는 훌륭했고 유병찬 요리사의 요리는 노련했다. 식기 하나하나에도 공을 들인 태가 역력했다. 너무 뿌듯하고 고마운 마음에(사실은 아내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 계산할 때 10퍼센트를 더 얹어달리고 했더니 처음엔 사양하다가 곧 받겠다고 하고는 직원에게 고생했다며 바로 현금으로 바꾸어 주었다. 음식 가격이 서울의 70% 수준이라고 아내가 귀뜸을 했다. 다시 밖으로 나와 비그친 거리를 천천히 걸어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여행을 한다는 것은 일상을 벗어나는 즐거움도 있지만 이렇게 새로운 사람과 장소를 만나는 기쁨도 있다. 국제시장 근처다. 부산 중구 광복중앙로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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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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