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기로 한 이가 30분 정도 늦는다고 한다. 이 30분은 선물이다. 그 선물을 가장 아름답게 받는 방법 가운데 하나를 알고 있다. 아름다운 단편소설 하나를 읽는 일.”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윤대녕의 단편집 [대설주의보] 뒤쪽에 쓴 글이다. 그런데 정말 단편소설 한 편 읽는데 드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삼십 분? 한 시간? 신형철의 말대로라면 30분이면 족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절대 세상이 그렇지 않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어제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내 입장이 돼보시오](Put yourself in my shoes)를 읽었다. 아니, 읽기 시작했다. A4지를 가져다가 메모를 하면서 읽기는 했지만(등장인물에 대한 프로필을 메모하는 버릇이 있다) 한 시간 남짓이면 끝날 분량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소설을 끝내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우리는 도무지 심심할 틈이 없다. 만약 백수가 되면, 난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놀 거야!”, “출근을 안 하게 되면 그때부터 하루 종일 미드나 책을 보지 뭐.” 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그런데 그들이 정작 회사를 그만두고 나면 말한 것처럼 그렇게 ‘아무 것도 안 하고’ 살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현대인은 도대체 심심할 틈이 없다.
아침에 현관에서 집어온 신문을 마음먹고 정독해도 삼사십 분은 그냥 사라진다. 뭘 좀 읽거나 쓰고 있으면 금방 밥 먹을 시간이 돌아온다. 페이스북에 들어가 대충 훓어보고 내 글이나 사진에 댓글만 성의있게 달아도 한 시간은 후딱 지나간다. 시간을 빼앗길까봐 트위터는 이미 접은지 오래다. 그래도 호시탐탐 택배원나 외판원들이 초인종을 누르기 일쑤다. 잊었던 후배가 전화를 걸어 반갑지 않은 안부인사를 전하기도 한다. 이제 현대인들은 감방에 갇히거나 병원에 입원하지 않는 이상은 늘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아야 하고 뭔가 반복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저서 [피로사회]에서 ‘깊은 심심함’의 중요성에 대해 오래도록 이야기 한다. 현대인은 내적 외적 모티베이션에 의해 늘 뭔가에 쫓기게 되고 그럼으로써 만성적 피로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현대인들이 오래도록 누려보지 못한 깊은 심심함을 느끼는 일이다. 깊은 심심함은 뭔가 창조적인 일을 위한 과정에 꼭 필요한 요소라고 한다. 다시 말해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라는 것이다.
최근에 여지친구와 함께 뭔가 기획을 하고 글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기획안에 손도 대지 못하고 매일매일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도대체 하루 종일 혼자 놀고 있어도 심심해지지가 않는 것이다. 보다 못한 여자친구가 왜 글을 쓰지 않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어올 때면 난 늘 이렇게 대답한다. “응, 나 오늘 바빴어.”
어서 내 몸 안에 깊은 심심함이 흘러 넘치기를 바란다. 아마 곧 그렇게 될 것이다…심심해지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꼴이라니. 이게 무슨 한심한 역설이란 말인가. 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다들 마음 독하게 먹고 바쁘게 움직이자. 남들보다 먼저 깊은 심심함을 쟁취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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