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일기 11

음주일기 2012. 2. 28. 23:50


모처럼 노는 토요일이다. 목요일에 정원, 혜원 자매, 그리고 한상과 함께 북악터널 근처에 있는 ‘절벽’에서 술을 마셨으므로 금요일엔 집으로 곧장 귀가했다. 오랜만에 놀토를 맞아 늦잠을 즐긴 뒤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 길에 낮술 한잔 걸치기에는 거의 완벽한 조건이다.

집에서 가까운 청계산에 한번 가보자고 한 게 벌써 몇 달 전이다. 한상이, 양진홍씨 등과 함께 갈 생각이었지만 게으른 양진홍씨가 등산에 관심을 보일 리가 없다. 우리가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전화해주면, 그때 버스를 타고 청계산 입구로 달려와서 술만 마시겠다고 한다. 놀라운 발상이다. 남들이 ‘산이 거기 있으니 오른다’라면 이 사나이는 ‘산이 거기 있는데 그냥 쳐다보면 되지 왜 올라가냐’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청소를 하고 있는데 한상이가 차를 몰고 강남에 도착한다.(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 당연히 집에서 밀린 가사일에 매진하거나 어린 딸을 돌봐야겠지만 오늘은 희진씨에게 ‘광고주 중에 등산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라는 씨도 안먹히는 거짓말을 하고 나왔단다) 어차피 술을 마실 생각이므로 차를 집 앞에 대고 버스를 탄다. 78-1번을 타고 30분쯤 가니 금방 청계산 입구다. 입구부터 도토리묵과 파전, 닭도리탕 등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어느 지역이든 유원지나 산에 가면 천편일률적으로 도토리묵을 판다. 도대체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이렇게 도토리묵에 목을 매게 된 것일까. 조금 올라가다 보니 ‘매봉’과 ‘옥녀봉’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안내판을 보니까 옥녀봉이 매봉보다 조금 더 낮고 코스도 짧다. 당연히 옥녀봉을 택한다.

역시 우리가 잠든 사이에도 많은 사람들은 꾸준히 산에 오르거나 도토리묵을 먹어왔다는 걸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날이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젊고 늙은 등산객들이 꽤 많다. 지나가는 아저씨들끼리 ‘어제하고 오늘은 또 다르네…’라고 하는 말을 우연히 엿듣고 둘 다 전율한다. 아니, 저 사람들은 여길 매일 올라온단 말야?

“우리가 청계산을 너무 우습게 봤나 봐...헉헉”

한상이가 숨을 몰아쉬며 자연에 경외심을 표한다. 나한테 좀 천천히 가라고 짜증도 낸다. 중간 정도 올라갔는데 벌써 숨이 차고 땀이 솟는다. 산은 올라갈수록 경사가 심해지고 아직 옥녀는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발걸음이 이상해지길래 등산화를 내려다 보니 밑창이 거의 떨어져 개혓바닥처럼 너덜너덜 한다. 한 십년 전에 사서 약수터 다닐 때 신다가 처박아 두었던 트래킹화인데 드디어 오늘 수명이 다한 모양이다. 졸지에 절름발이처럼 절뚝거리며 산에 오른다. 한상이는 아까부터 발뒤꿈치가 아프다고 한다. 내가 중년에 나타나는 ‘통풍’ 아니냐고 놀렸더니 매우 불안해 하는 표정이다.

많은 땀을 흘리고 애쓴 보람 끝에 정상에 도착한다. 옥녀봉 정상엔 먼저 올라온 사람들은 물론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줌마까지 있어 우리가 힘들게 올라왔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다. 시원한 경치와 함께 경마장이 보이는 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려 했으나 너무나 많은 아줌마 아저씨들이 프레임을 침범하고 계셔서 결국 반대편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라는 푯말 옆에 앉아서 사진을 찍는다. 얼른 내려가 막걸리나 마시자며 한상이가 양진홍씨에게 전화를 한다.

“아니, 거기까지 올라가다니…대단한데!”

수화기 너머로 양진홍씨의 목소리가 들린다. 시간 맞춰 서둘러 오라고 얘기하고 산을 내려가는 도중에 다른쪽 등산화마저 밑창이 떨어져 나간다. 내리막길이라 위험하므로 할 수 없이 잠깐 앉아 등산화 끈을 푼 뒤 발에 칭칭 감고 내려간다.

등산로 입구에 즐비한 술집 중 좀 넓은 곳으로 들어가 앉아 해물파전과 도토리묵, 막걸리 두통을 시킨다. 오랜만에 맑은 공기를 쐬며 운동을 했다는 자부심에 막걸리를 벌컥 벌컥 마신다. 파전과 도토리묵도 맛있다. 주변엔 등산조끼, 등산바지, 등산화에 배낭까지 지나치게 완벽하게 갖추고 온 등산객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닭도리탕이나 도토리묵을 먹고 있다. ‘히말라야도 아니고 겨우 청계산에 오면서 너무 갖춘 거 아니니?’ ‘저 배낭엔 뭐가 들었을까, 혹시 도토리묵 아냐?’ 등등의 하찮은 농을 하며 술을 마시고 있는데 양진홍씨가 도착한다. 좀 이따가 승완씨도 청계산으로 오기로 했단다. 진홍씨와 승완씨는 이년 전에 이혼을 했다. 비록 같이 살다가 이혼은 했지만 지금도 서로 친구처럼 오누이처럼 지낸다. 이런 말 하긴 싫지만 약간은 ‘쿨’한 인간들이다. 승완씨와는 두사람이 신혼일 때부터 친하게 지내서 지금도 가끔 같이 술을 마신다.

일차로 막걸리 네통을 비우고 나니 배도 부르고 해서 잠깐 나가 쉬면서 이차를 가기로 했다.가게 밖으로 나오다 보니 입구에서 사람들이 비지를 공짜로 퍼간다. 한상이가 눈을 반짝이며 다가가서 비닐봉지에 비지를 한 바가지 퍼 담는다. 진홍씨와 나도 번갈아 바가지로 퍼 담다가 내친 김에 승완씨 몫까지 또 한 바가지를 퍼 담는다. 세 놈이 비지 네 봉지를 들고 술집을 기웃거리고 다니려니 좀 쑥쓰럽다. 눈에 띄는 술집으로 들어가 승완씨가 좋아한다는 닭도리탕과 소주를 시킨다. 네이버카페 전여옥 반대 싸이트의 열혈회원인 진홍씨와 내가 전여옥을 열라 씹으며 탄핵정국 얘기를 하고 있는데 마침 승완씨가 도착한다.

한상이는 이혼 후에 승완씨를 처음 보는 거라 더 반가워한다. 서로의 생활 애기를 하고, 한상이의 딸 얘기를 하고, 돈 얘기, 집 애기를 하다가 섹스 얘기까지 나온다. 출산 이후에 육아에 바빠 아직 부부관계를 하지 않았다는 한상이 얘기에 모두들 안타까워 한다. 총각보다 섹스 빈도가 적어서야 되겠냐고 하며 나를 쳐다보지만, 괜한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 싫은 난 노코멘트로 일관한다. 결혼 생활에서 섹스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전 부부 둘이 열심히 설파한다. 평소에 ‘그거’라도 열심히 잘 해줬으면 이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었다는 승완씨의 공격에 진홍씨가 약간 밀리는 형세다. 진홍씨는 ‘평소엔 너무 안하다가 어쩌다 한번 하면 엄청 잘해주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어떤 분야에서든 역시 벼락치기는 좋지 않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다.

날이 어둑해지자 저마다의 비지 봉다리를 들고 버스를 탄다. 강남역에서 내려 우리집에서 한잔 더 하기로 한다. 소주 몇 병을 사들고 들어가 술상을 차린다. 승완씨가 냉장고의 묵은 김치를 꺼내 비지찌게를 끓였다. 맛이 되게 이상하지만, 그냥 참고 먹기로 한다. 얼마 전에 산 에릭 클랩튼의 언플러그드 뮤직DVD를 보며 술을 마신다. 진홍씨가 핑크 플로이드를 틀라고 성화였지만 그건 너무 시끄럽다고 판단, 코어스 언플러그드를 데크에 올린다. 진홍씨와 승완씨에게 둘이 그렇게 혼자 살고 있는니 다시 합치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서로 손을 내저으며 싫다고 난리다. 아무튼 이상한 인간들이다. 너무 오랫동안 술을 마셔서 모두 지친다. 한상이가 부른 대리운전 기사가 도착함으로써 긴 술자리도 끝이 난다.

산행을 핑계로 오랜만에 대낮부터 술을 마셨다. 내친 김에 길고 달콤한 잠을 자려 했으나, 역시 일요일 새벽부터 깨어나 신문지 휘날리는 강남역 주변을 돌아다니다 공사장 인부들이 먹는 음식점에 들어가 아침을 먹었다. 그래도 일요일을 하루 종일 쉴 수 있다니, 좀 살만 하다.

(2004.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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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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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21 진중권 특집 기사 ‘陳의 전쟁’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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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혹시 누군가가 “진중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묻는다면 “아니 왜 골치 아프게 그런 걸…”이라고 하거나 “진중권이 똑똑한 건 나도 알겠는데, 너무 독선적이고 또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늘어져서 싫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난 지금 진중권이 싫으냐 좋으냐, 또는 옳으냐 그르냐보다 더 중요한 게 우리 사회가 진중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애티튜드’에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진중권이라 존재는 국회의원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말도 안 되는 수준 낮은 얘기들을 끝도 없이 지껄여대는 강용석이나, 진중하고도 해맑은 얼굴로 입만 열면 거짓말을 일삼으시는 ‘이명박근혜’ 들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겨레21 898호는 진중권 특집으로 무려 14페이지를 할애했다. 큰 제목은 ‘陳의 전쟁’. 그 동안 진보진영의 논객으로 또 한겨레21의 필진으로 오랫동안 활약해 온 진중권이기에 그들의 심회는 남다를 것이다. 팝아트로 처리한 표지 사진만 보더라도 그들이 갖고 있는 진중권에 대한 애증의 정도를 능히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겨레21이 마냥 진중권에 대해 ‘제 식구 감싸기’ 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기사 머릿글을 여는 이세형 기자의 글은 “진중권은 전사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면서 조선일보,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은 물론 자신과 견해가 다르거나 잘못 됐다고 판단하면 그게 ‘황빠’든’심빠’든 ‘나꼼수’든 가리지 않았던 그의 전력을 꼼꼼히 살피며 진중권의 운명적 고독에 대해 조명한다. 혹시 진중권은 근대소설의 주인공들처럼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문제적 인간, 즉 진정한 ‘반영웅(Anti-hero)’일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또한 같은 편으로 분류되던 강준만 김규항 등과의 불화를 통해 진중권의 싸움 코드를 살핀 고나무 기자는 1998년 진중권을 세상에 알린 책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비롯해 김규항과의 논쟁에 이르기까지 그의 무기가 상대방의 글을 그대로 풍자한 어법과 감정적이기를 주저하지 않는 비꼼에 있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이 비꼼으로 인한 ‘싸가지 죄’다. 싸가지 하면 얼른 떠오르는 동지가 하나 있다. 바로 “저렇게 옳은 말을 저렇게 싸가지 없게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라는 말을 들었던 유시민 대표다. 그러나 유시민은 정치인이다. 일단 정치인의 맷집은 일반인과는 매우 다르거니와 유시민은 이제 예전처럼 논쟁의 중심에 서지도 않는다. ‘싸가지 법 빼고 보자’라는 코너에서는 이 시대의 논객들인 이진경 이택광 심영섭 한윤영의 인터뷰를 통해 진중권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제공한다. 나는 그 중에서도 진중권이 사용하는 단어들 때문에 그를 엘리트주의로 몰아붙이는 건 옳지 않다고 본다는 이택광 교수의 말에 공감한다.

 

일각에서는 그에게 엘리트주의자의 혐의를 두지만, 동의 못한다. 트위터에서 종일 범부들과 치고받는 사람이 무슨 엘리트인가. 진중권을 엘리트주의자라 비난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반지성주의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지식인을 혐오하고 토론하지 않으려는 것, 논쟁의 장 자체를 회피하려는 것. 이 자체가 권위주의다.

 

 

또한 같은 잡지에서 오랫동안 ‘진중권과 정재승의 크로스’라는 코너를 연재해 옴으로써 ‘실생활에서의 개인적인 진중권’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는 정재승 교수가 “우리는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라고 고백하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사화적 이슈가 터졌을 때 (시간이 충분히 흐른 뒤 ‘심사숙고를 통한 복기’를 하는 학자들과는 달리) ‘곧바로’, 이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제안하는 논객의 업무에 늘 열심이다. 또 자신이 판단하기에 옳지 않거나 미학적으로 촌스러우면, 그걸 굳이 ‘틀렸다, 촌스럽다’ 대놓고 말해야 속이 시원한 ‘모난 성격의 소유자’다. 영화평론가들을 대신해 [디 워]의 지지자들과 싸워주었듯, 황우석의 지지자들과 대신 싸워주었다는 점에서 과학자들은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

 

 

김남일 기자는 조선시대 숙종 때의 정치가 김춘택을 필두로 김기진 박영희 염상섭 이광수 양주동 등 192년대의 문인들과 1950년대의 황산덕 정비석의 ‘자유부인 논쟁’, 1070년대 이어령, 김수영의 순수∙참여 논쟁 등 ‘백과전사파 논객’들의 계보를 꿰보며 그 맨 끝자리에 진중권을 조심스럽게 자리매김 해본다. 사실 진중권이라고 왜 나꼼수나 김규항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겠는가. 다만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트위터가 없던 시절에 쓴 김수영의 시와 짧은 산문들이 그 시대에 날리는 트윗이었다면, 반대로 언제나 싸움닭처럼 발톱을 세우고 전방위로 달려들어 좌충우돌 하는 진중권이야말로 경제 논리에 함몰되고 생각하기 싫어 집단지성에 판단을 맡겨버리려 드는 대한민국 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용감한 존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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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도 읽었던 윤준호의 <젊음은 아이디어 택시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윤준호 선생은 지난 30년 간 깊고 정갈한 카피를 많이 써 온 분이다. 윤제림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광고에 대한 책이지만 읽어나가다 보면 세상의 모든 이치들도 광고 크리에이티브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난 이 책을 읽던 도중 오래 전 책장에 박아 두었던 핼 스테빈스의 [카피캡슐]이라는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뭔가 행동을 유발하는 글이 좋은 글이라는 명제를 믿는다면, 이 책은 분명 좋은 책이다. 이 책이 꽂혀있던 교보문고 서가에 때마침 발길이 멈춰 섰던 그 우연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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